사람이 사람에게 지켜야 할 그 어떤 선들이 있다. 한번 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그 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고, 더욱 치열하게 그 욕망에 매달리지 않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저버리는 선 너머의 삶. 그 욕망이 채워지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성적 욕망 혹은 부에 대한 갈망 그도 아니면 내 가족의 안위만을 위하는 그릇된 이기심일 수 있다.
처음이 어렵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한번 타인을 도구로 사용하면, 그 이기심은 작은 공동체를 넘어 사회를 붕괴시킨다. 그릇된 욕망과 이기심은 한 분야에서 멈추지 않는다. 모든 곳에 n번방이 자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더 많은 이의 삶을 파괴시키며 추악한 욕망만 채우려 든다. 한 인간이 지니는 정체성, 노동과 열정, 꿈과 사랑마저도 화폐가치로 치환되는 천민자본주의에서 이용되는 사람을 호구라고 일컫는다.
한번 호구가 된 경험을 한 이는 다시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쏟는다. 배우가 되고자 했던 아이에게는 대본 대신 법서를 쥐게 하고, 가수가 되고자 했던 이에게는 악보 대신 투자서를 읽게 만든다. 특정 학문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자신의 꿈을 지키기 위해 수단으로 무언가를 공부해야만 호구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수단화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삶을 다시 수단화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그 악순환의 고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익숙해진 아이에게 이것을 성장이나 어른이 되는 방식이라 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 우리도 누구나 한 번쯤은 호구였던 적이 있지 않은가.
목줄과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개는 무력감에 짖지 않는다. 사람을 개만도 못한 호구로 보는 인간이 너무 많다. 짖지 않으면 겁내지 않는다. 물지 않으면 폭력을 멈출 수 없다. 세상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 아이를 호구도 착취자라는 다른 이름의 어른으로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력감에 빠진 아이를 건져내야 한다. 방관하면 세상은 개와 주인으로만 나뉜다. 자본주의에서 언제 어디서나 주인이기만 한 삶은 몇이나 될까.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 진짜 어른은 다시 또 다른 아이를 키우고, 세상을 진보시킨다.
선을 넘은 착취자를 무력하게 만드는 기술은 호구가 분노하는 것이며, 이는 잠재적 범죄자를 감시하는 판옵티콘으로 작동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