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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Feb 14. 2019

황만근이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이 소설을 읽지 않은 누군가가 제목만 보고 “그래서 황만근은 누구고, 뭐라고 했는데?”라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황만근 씨는 모자란 농사꾼이고, 사고로 죽게 되는데 그 직전에 주변 사람에게 ‘농사꾼은 빚을 지면 안 된다고’했어.” 단편소설을 한 줄로 요약해서 누군가에게 설명해주다 보면 책을 읽은 나 자신도 그리고 설명을 해주는 상황도 황당해질 때가 많다. 우리는 농사꾼도 아니고,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더 잘 아는 도시인으로 빚을 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렇다면 왜 ‘황만근’씨가 ‘빚’에 대해서 말한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황만근 씨의 동네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모두 빚을 진다. 이건 그 동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소설이 시작되는 지점도, 황만근 씨의 실종의 원인도 결국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전국 농민 총궐기대회’ 때문이다. 전국 농민이 다 부채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빚이 어디 소설의 황만근 씨와 농사꾼들만의 이야기인가. 한국의 가계부채 역시 지금 세계 3위라고 하니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온 국민이 부채 즉 빚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빚이 단순히 금전적 빚만이 아님을 우리는 황만근이라는 인물을 알아가며 알게 된다.

 

 품삯을 반 밖에 주지 않는 “동네의 일, 남의 일, 궂은일에는 언제가 그가 있었다.” 그조차도 그는 춤을 추듯이 흥겹게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도맡았다. 마을회관 변소의 분뇨를 퍼다가 혼잣 몸인 여씨 노인 같은 이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옆집에서 기계를 놀리면서도 빌려주지 않으면 “화가 나서라도 빚을 내며 사는” 사람들과 달리 그는 굳이 안 해도 될 선행을 자처한다.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놀리지만, 민 씨는 그와의 술자리에서 그가 하늘과 땅을 일으켜 세운 선각자로 생각한다. 그의 선행에 대해서는 일단 제쳐두고 동네 바보를 선각자로 격상시키는 비밀이 고작 빚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니, 독자인 도시인들이 지는 빚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랑은 내 시간을 상대방에게 기꺼이 건네주는 일이라고 한다. 최상의 관계인 사랑이 정의가 이러하다면 기본적으로 관계는 시간을 공유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의 관계 결렬은 대게 상대와 함께 공유할 시간의 부족 혹은 그를 이해하려는 정서적 여유의 부족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왜 부족할까? 정서와 시간의 빚을 내면서 살아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김영하의 소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속에서 확인했듯 현대 도시인들은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체력 즉 잠과 시간이 늘 아쉽다. 우리는 내일을 체력을 끌어다 오늘 쓰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오늘의 시간을 쏟는다. 아직 닥치지 않은 상황을 위해 자원을 끌어다 쓰는 것, 그것이 곧 ‘빚’이다.

  

 황만근 씨가 자처해서 맡았던 마을 공동의 일은 단순히 성인군자들이 행하는 시혜적 선행보다는 관계 유지에 더 가깝다. 그는 자신의 체력과 시간을 쏟아서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일을 맡는 것은 높은 도덕적 선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닌, 자신의 인생관, 농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번 빚을 지면 그 빚을 갚으려고 무리하게 일을 벌인다.” 현대인들의 삶이 이와 닮아있다. 소설의 농촌은 부채로 궐기대회를 일으키는 와중에도 농부들은 몇 명 나오지도 않는다.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바쁜지를 주장하는 이장은 만근 씨에게 경운기를 끌고 나갈 것을 당부한다. 바보 황만근 씨는 그로 인해 사고로 죽고 만다. 왜 경운기를 끌고 나갔을까? 그가 바보라서? 그렇지 않다. 만근 씨는 무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의 식사를 챙겨야 하고 자신의 볼일이 더러 남아있지만, 술을 마시면서 자연이 허락한 만큼만 일한다. 그에게는 빚이 없고 경운기를 끌고 나갈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있다. 그것은 고귀한 도덕성에서 비롯된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황만근’이 빚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 황만근이라는 바보가 죽기 바로 직전 던진 한 문장을 읽기 위해 현대인 즉 독자들은 시간을 들여 이 소설을 읽어야 만 하는 것이다.

 

 황만근은 위대한 인물이 아니고 바보에 가깝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 자리를 독자 혹은 다른 인물이 대체할 수 있다. 그가 선각자로 불리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빚을 지지 않는다는 사소한 실천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농사는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일이다. 해가 뜨면 일을 시작하고, 해가 지면 일을 멈춘다. 봄이 오면 씨를 뿌리고, 가을이 오면 수확을 한다.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농사의 원칙이다. 그러나 2000년이라는 현대의 부자연성, 비인간성이 농촌에도 스며들면서 이는 ‘빚’이라는 물질적인 형태로 발현되게 된다. 이는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다 지고 있는 빚을 황만근만큼은 지고 있지 않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점차 짧은 글을 선호한다. 시간과 정신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들여 소설을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황만근 같은 일반인에 미달하는 인물의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농사는 시간을 들여 벼가 익고 자라는 시간을 견뎌야만 수확할 수 있다. “황만근이 농사꾼은 빚을 지지 말라고 했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소설은 농사꾼의 자리에 소설의 등장인물과 독자 스스로로 치환시키고, 빚의 자리에 우리가 돈을 얻기 위해 희생했던 많은 것을 다시금 떠올려 배치시키고 숙성시키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황만근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한 문장의 의미를 완성시킬 시간과 여유가 고갈된 현대인에게 ‘소설’이라는 매체를 통해 ‘빚’의 개념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주제의식을 완성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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