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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Feb 14. 2019

오늘의 나에게 몇 번이나 다정했나요?

『나에게 다정한 하루』

 10대의 나에게 어른이란 주민등록증이 나온 사람이었다. 주민등록증이 나온 나에게는 대학에 들어간 사람이 어른이었다. 20살, 그 어른이 되고서는 정말 모르겠더라. 뭐가 어른인지. 나는 그 정의도 알 수 없는 어른이 늘 되고 싶었다. 물리적 성장으로는 더 이상의 기준을 둘 수 없으니 그렇다면 정신적 성장을 다짐하며 “자신에게는 엄격하나, 타인에게는 관대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게 어른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살았다고는 말 못 하겠다. 그래도 내 딴에는 그 정의에 부합하려고 발버둥 쳤다. 그리고 내 삶은 굉장히 피폐해져 있었다.

 

 정신력도 소모되는 자원이라는 것을 나는 몰랐다. 20대 청춘의 열정페이 마냥 나의 아웃풋들은 모두 나를 갈아 넣어야 겨우 나오는 허접한 산물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또 부끄러워 계속 나를 몰아붙였다. 어느 유명한 사람이 그러던데, 벼랑 끝으로 떨어져야 날개가 있는 줄 안다고. 근데 벼랑 끝에 몰리다 보면 대충 감이 온다. 내가 날개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나는 후자라고 믿었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티고 버티다 어느덧 졸업을 앞둔 4학년이 됐다. 이 책은 그런 나에게 맛있는 거 먹고 버티라 말하는 어른이었다.

 

 책의 저자, 서늘한 여름밤 줄여서 서밤이는 자신의 구질구질한 삶을 쉬운 만화로 보여준다. 서밤이는 심리학 전공자로 취업 100일 만에 퇴사한다. 이후 자신의 고민을 만화로 그려 2권의 단행본으로 선보인다. 이 책은 그중 두 번째다. 두 권의 책 중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1권에서 보여준 특유의 까칠함이 성숙해져 도리어 2권에서는 독자를 보듬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온화한 작가는 왠지 매력이 없다. 성인군자의 말씀이 좋은 줄은 알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이유와 같다. 훌륭해서 너무 먼 사람들의 말은 공감도 위로도 되지 않는다. 그녀는 못났고, 모났고, 자주 울며, 어린아이처럼 날 뛴다. 심리학 전공자가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비이성적인 순간을 담은 에피소드들 투성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더 나아지려 아등바등하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닮고 싶다. 8살 정도 더 살아본 못났지만 열심히 사는 언니가 들려주는 구차한 일기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일하는 나는 나를 지치지 않고 써왔다. 무엇인가 낭비하거나 비효율적이면 너무나 괴로웠다. 어떤 것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내 마음을 아주 많이 낭비했다. 나의 조바심에는 돈이 들지 않았고, 나를 위한 시간은 돈이 되지 않았으니까. 때로는 매우 합리적이고 필연적인 결정들로 인해 나는 날카로운 선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나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조바심으로 흩어지는 에너지가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효율적이고 낭비 없는 삶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돈을 아끼듯 시간을 아끼듯 나를 아낄 수 있을까? 나도 쓰면 닳아 없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까? 최선이 아닌 최선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지금 가장 어려운 질문에 봉착해 있다. 나를 아낄 수 있겠니?”

 나에게 엄격한 사람은 당연히 타인에게 엄격해지기 쉽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사람”은 정말 어려운 것이니 경구처럼 내려오는 것인데, 나는 그것을 어른이라 믿고 내 삶을 전쟁터로 만들어왔다. 삶이 전쟁터일 때 타인은 적군 아니면 아군이다. 그렇게 관대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나를 몰아붙이고 다시금 나에게 실망하면서 스스로를 작게 만들어왔다. 서밤이의 이야기들은 ‘그건 힘드니까. 그만둬. 괜찮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주 자기 안의 꼬꼬마를 소환시킨다. 큰 서밤이가 작은 서밤이를 쓰다듬는 삽화는 퍽 울컥하곤 한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모험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길을 잃을 걱정을 하지 않고 페달을 밟았던 기억이 난다. 아무 데도 도착하지 않더라도 아무렇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나로부터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된 거지? 변명을 하자면, 나는 무서웠어. 발밑이 흔들리는 듯한 날들을 지나다 보니 나는 안전하고 싶었단다. 빨리 어른의 눈으로 보고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싶었어. 어른의 행동으로 인정받아먹고살 수 있었지만, 어른의 눈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들도 많아지더라. 지금 나는 그렇게 어른이 된 게 조금 속상하기도 해. 이만큼 크느라 참 쉽지 않았어. 예전에 무서웠던 것들이 더 이상 무섭지 않고, 조급하게 크느라 흘리고 온 것들을 다시 만나고 싶을 만큼. 사라지지는 않았겠지. 모든 게 예전과 같지는 않겠지만 우리 다시 만날래?”


 그녀가 자전거를 타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면, 나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대학교만 가면 문제집이 아닌 책을 읽을 수 있다고 믿었다. 어른의 세계에 입성만 하면. 그런데 더 이상 책이 전처럼 좋지 않다. 나이는 먹고 기회는 생겼는데, 열정만 사라졌다. 그 열정을 앗아간 것은 나였다. 교수님들이 내주신 주제에 맞춰 쓸 참고문헌을 수십 권 이고 지고 언덕을 왔다 갔다 몇 년을 지내다 보니 책을 읽는 행위는 노동이 되어버렸다. 참고문헌도 결국 다 대학교의 문제집이 되어버린 거다. 나만 그럴까.

 

 학교에서 만난 대부분의 후배들은 정말 열심히 산다. 전공수업에서 자주 마주쳐 익숙해진 그들은 알바며 공부며 놓치지 않기 위해 노오력한다. 나는 그 친구들을 보면 안쓰럽다. 내 자신은 방전시킬 때까지 소모한 것은 잊고서 그들에게 적당히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과각성 뒤에 오는 무기력과 우울함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서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너에게 좀 더 다정하라고. 그래서 다 같이 ‘자신에게 엄격하나 타인에게 관대한 사람’ 말고 ‘타인에게 관대한 만큼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이 되자고. 성에 안차도 어제 잘 자고 일어난 오늘의 나에게 좀 더 다정하시기를. 매일 밤 물어보자. 오늘의 나에게 몇 번이나 다정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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