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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온미라클 Apr 22. 2023

나의 베스트 프랜드는 누구일까?

절친 딸과의 추억 한 스푼


29살이 된 딸을 임신했을 때다.

둘째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바라는 시어머니와 달리 친정엄마는 꼭 딸을 낳아야 한다고 하셨다.

‘여자에게는 딸이 있어야 한다’는 게 이유의 전부다. 두 분 다 여자인데 입장차이라는 게 이렇게나 큰가 보다. 나도 꼭 딸을 낳고 싶었다. 아들에겐 미안하지만, 첫아이부터 딸이길 바랐다.


그렇게, 아홉 달을 보내고 딸을 맞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13개월이 된 아들을 업고 하루종일 볼일을 보러 다녔다. 각종 연체료를 내지 않기 위해선 아파트관리비와 공과금을 은행에 직접 납부해야 했다. 그땐 그런 시절이었다. 온몸이 녹초가 돼 집에 돌아오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남편과 아들 저녁을 챙겨줘야 하는데 꼼짝할 수가 없다.


자장면이나 시켜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누워 있는데, 함께 볼일을 보러 다닌 지인이 저녁을 먹잖다. ‘삼계탕 먹고 힘내서 순산하라’는 덕담을 덧붙였지만, 힘든 나를 위해 부랴부랴 낸 시간이란 걸 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사촌이 백번 낫다고 하나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은 일들을 그땐 당연하게 여겼으니 참 대단한 삶이었다. 덕분에, 삼계탕을 맛있게 먹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한참 자고 있는데 축축한 게 느껴진다. 출산일이 가까워 그런가 보다 하고 다시 잠을 자다 요가 흥건히 젖은 게 느껴져 소스라쳐 깼다. 너무 놀라 병원에 전화하니 양수가 터진 거라며 빨리 오란다. 처음 겪는 일에 정신없이 허둥대며 병원으로 가려는데 옆에서 자고 있는 아들이 보인다. 믿을 데라곤 또 같이 삼계탕을 먹은 지인뿐이다. 염치없는 줄 뻔히 알면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했다. 새벽 1시에...


다행히 병원은 10분 거리에 있었다. 놀란 남편은 신호등이 꺼진 도로를 비상깜빡이까지 켜고 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어이없는 장면인데 남편의 긴장과 조급함이 느껴져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양수가 너무 많이 흘러서 긴급 유도분만을 해야 한단다. 정신없이 진통을 하면서도 처음 이상을 느꼈을 때 왜 오지 않았는지 후회막급이었다. 긴박했던 초조의 시간이 흐르고 기다리던 딸이 드디어 우리 품에 안겼다. 하지만, 출산직후 태아를 씻기지 않는 병원규정 때문에 내가 상상했던 동화 속의 예쁜 공주가 아니었다. 허황된 기대치에 잠시 신생아용 침대를 슬그머니 밀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어이없어 너스레를 떨게 된다.


그렇게, 첫 만남부타 강렬했던 우린 멜로와 액션을 넘나들며 치열하게 영화를 찍었다. 극 I와 자유분방한 S는 아름다운 꽃노래와 폭풍우의 긴장감을 극적으로 연출해 내는 마술사들 같았다. 둘 다 장난 아닌 욕심에, 지고는 못 사는 성격들이라 한 번 휘몰아 치면 한 바탕 롤러코스트를 타기 일쑤였다. 그런 격동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자기 같은 딸을 어떻게 키웠냐?"라고 물어본다. "자긴 절대 못 키울 것 같은데, 대단한 엄마"라고도 했다. 그날부터 우린 절친이 되었다. 친정엄마가 왜 딸이 꼭 있어야 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은 날이었다. 서른 살이 넘었어도 손을 잡고 다니는 아들들과는 다른 맛이다. 가끔, 내가 필요로 하는 걸 슬며시 건네주기도 하고, 자기는 싼 옷을 사 입으면서 나에게는 브랜드만 고집한다. 엄만 좋은 것만 입어야 한다면서...



그 딸은 이젠 자기 일을 똑 부러지게 해내는 멋진 여성이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비자발적 실업이란 것도 격었다. 하지만, 실망과 포기보단 미래를 위해 한 발 후퇴할 줄도 아는 여성이 되었다. 미술교육회사를 만들겠다며 정말 신나게 일했었는데 그 꿈을 접고 공무원을 하겠다고 했을 땐 너무 미안했다. 더 이상 뒷바라지 해 줄 수 없는 경제력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가슴이 뛰지 않는다던 공무원의 길을 선택한 딸이 갑자기 집에 내려온다고 연락이 왔다. 늦은 밤이라 역까지 마중을 나갔는데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나타났다. 보자마자 혼내지 말라고 너스레부터 떤다. 명품쇼핑백이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진짜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정신 나갔냐고 혼을 내는 우리에게 공무원 월급으로는 좋은 선물을 해 줄 수 없을 것 같아 그동안 모아 놓은 적금을 깼다고 한다. 엄마아빠에게 꼭 비싼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는 딸의 마음에 더 이상 혼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원했던 꿈을 깨트리며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니 왈칵 눈물이 솟구친다. 남편의 지갑과 내 핸드백을 사고 남은 돈은 시험준비 하는데 써달라며 송금을 해주겠단다. 자신의 꿈을 가슴에 묻으며 쓸어 담지 못할 좌절을 겪었을 텐데도 의연한 척 웃으며 큰소리친다. 꼭 1년 만에 합격하겠다고... 그 속에 묻어나는 헛헛함에 내 속도 덩달아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다. 심장이 뛰는 일에 올인해도 부족할 때에 생계 걱정에 접어야 하는 마음이 오죽했을까?


'절대 포기한 게 아니라 잠시 미룬 거'라는 딸의 아픈 다짐이 오늘도 허공에 매달려 떨어질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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