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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온미라클 Sep 08. 2023

15.  득일까? 독일까?

자식이기는 부모없다.

  살면서 득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르는 많은 결정들을 해야 되는데요. 저도 몇 번의 어려운 결정들을 한 것 같아요. 모두가 약이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큰 풍파 없이 잘 넘어온 걸 보면 평타는 친 것 같아 다행이에요.

 

  그중에서도 가장 아프고 힘들었던 결정이었지만 잘했다고 토닥여 주는 게 하나 있어요. 바로 큰아들의 미대진학을 허락해 준 건데요. 그땐 땅이 꺼지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지나고 보니 정말 기특하고 대견해요. 저에게 주고 싶은 최고의 상을 줘도 부족한 결정의 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아들은 학업 성적이 안 좋으면 심각하게 상담을 해보라는 적성검사가 나올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었어요. 그런 아들이 미술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을 때 쉽게 허락을 할 수가 없었지요. 남편이나 저나 그림에 문외한 일뿐더러,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일면식도 관계가 없는 집안이었기에 더 겁나고 두려웠지요. 거기다 열심히 노력하면 모두가 좋다는 법대나 의대에 갈 수 있는 희망이 보이는데 그걸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욕심도 있었고요. 중학교 때부터 수학과 미술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종종 했는데요. 그걸 못 들은 척하고 저희의 뜻을 고집하며 밀어붙였으니 얼마나 공부가 하기 싫었을까요?

 

  고등학교 1학년 때 공부를 할 이유가 없어 수업 시간에 잠만 잔다던 아들의 모의고사 성적은 전교 10위권이고, 내신은 20등에서 35등을 오르내렸어요. 내신은 몰라도 수능으론 소위 SKY라고 하는 대학에 갈 수 있겠다 싶어 '수능형 인간'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아들의 꿈과 상관없는 대입 준비를 했어요. 피곤해서 수업 시간에 자는 줄 알았던 선생님들도 공부는 학교에서 시킬 테니 집에서는 잠만 재우라고 하며 안타까워하셨고요. 진짜 이유는 '꿈의 부재'였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전의조차 상실한 아들과 동상이몽을 꾸며 서로가 힘든 날을 보냈지요.

 

  그해, 겨울방학이 막 시작되려는 어느 날이었어요.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와서 전하는 말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지요. 아들의 재능과 간절함을 눈여겨보던 미술 선생님이 미대입시를 제안하고, 부모인 저희들과의 상담을 요청하셨던 거예요. 맘잡고 공부 잘하고 있는 애한테 바람 넣는다며 그 선생님을 얼마나 원망하고 또 원망했는지 몰라요. 죽여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저 밑바닥부터 끌어 오르는 걸 눌러 참느라 한참을 씩씩거려야 했을 정도예요.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들을 더 이상 모른척할 수 없었어요. . 어쩔 수 없이 홍대와 서울대 미대만을 보내주겠다는 조건을 걸어 허락했어요.  잘했다는 생각보다는 가슴속에서 모든 희망이 쑥 빠져나가고 텅 비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저와 달리 아들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어요. 학교에서 엎드려 잠만 자던 학생에서 너무 잠을 안자 걱정을 할 정도로 꿈을 향해 뛰기 시작한 거예요.

  

  하지만, 남보다 늦게 출발한 덕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신성적이 올라가지 않았어요. 지쳐서 포기할까 봐 조마조마하며 기다리고 있는 저와 달리 자신의 목표와 꿈이 확고한 아들은 포기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 같았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2학년을 그렇게 애쓴 덕에 반에서 1등을 하고, 전 과목을 1등급까지 끌어올렸어요. 그런 아들을 보며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건 또, 어쩔 수 없는 부모의 미련인가 봐요. 아들과 한 약속이기에 말 못하고 삭히느라 얼마나 속이 문드러지고 원망스럽던지요. 속으론 의대나 법대를 가지 않는 아들 안타까웠지만, 최선을 다하는 아들의 노력을 외면할 수  없었답니다.

 

  보장된 미래를 차버리는 것 같아 말려야 하는 시간만큼 멀어져 가던 가족관계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한 것도 그날부터였던 것 같아요. 가끔, 그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봐요. 지금처럼 서로 신뢰하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흔하게 할 수 있는 가족은 절대 아닐 것 같아요. 어쩜 남보다도 못한 관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언젠가 “끝까지 반대했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고민도 없이 자퇴를 하고 다시 미대를 갔을 거라고 하네요.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달래느라 얼마나 식겁했던지요.


  며칠 전에도 남편은 의대에 가지 못한 아들을 아쉬워했지만 전 아들의 그 대답이 생각나 서늘해졌어요. 아쉽긴 하지만 이젠 그때의 결정을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아니,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신 선생님께 너무 감사해요. 덕분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하고 아름다운 선물을 받았으니까요.

부족한 부모를 만나 어려운 시기를 보냈지만, 잘 이겨낸 아들에게도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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