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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온미라클 Sep 07. 2023

I엄마와 E딸의 액션멜로드라마

엄마에겐 딸이 있어야 한다

  28살이 된 딸을 임신했을 때예요. 둘째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바라는 시어머니와 달리 친정엄마는 꼭 딸을 낳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이유는 딱하나,  ‘엄마에게는 딸이 있어야 한다’는 거였지요. 두 분 다 여자인데 입장 차이라는 게 이렇게나 큰가 봐요. 저도 꼭 딸을 낳고 싶었어요. 큰아들에겐 미안하지만, 첫아이부터 딸이길 바랐거든요.

 

  그렇게, 아홉 달을 보내고 딸을 맞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어요. 이제 막 13개월이 된 아들을 업고 하루 종일 볼일을 보러 다녔지요. 연체료를 내지 않기 위해선 아파트 관리비와 공과금을 은행에 직접 납부해야 했거든요. 그땐 그런 시절이었어요. 온몸이 녹초가 돼 집에 돌아오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어요.

 

 힘든 저를 위해 지인이 사준 삼계탕을 맛있게 먹고 한참 자고 있는데 축축한 게 느껴졌어요. 출산일이 가까워 그런가 보다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침대가 흥건히 젖은 게 느껴져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당황한 남편은 신호등이 꺼진 도로를 비상 깜빡이까지 켜고 달렸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어이없는 장면인데 남편의 긴장과 조급함이 느껴져 슬그머니 웃음이 나요.


  급하게 도착한 병원에선 양수가 너무 많이 흘러 긴급 유도 분만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긴박했던 초조의 시간이 흐르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딸과 드디어 만났는데요. 제가 상상했던 동화 속의 예쁜 공주가 아니었어요. 허황된 기대에 실망해 신생아용 침대를 슬그머니 밀어버렸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미안해 너스레를 떨게 되네요.


  첫 만남부터 강렬했던 딸과 멜로와 액션을 넘나들며 치열하게 영화를 찍었어요. 극 I(Introvertion 내향형)와 자유분방한 E(Extravertion 외향형)는 아름다운 꽃노래와 폭풍우의 긴장감을 극적으로 연출해 내는 마술사들 같았지요. 둘 다 장난 아닌 욕심에, 지고는 못 사는 성격들이라 한 번 휘몰아치면 한바탕 롤러코스터를 타야 했어요. 그런 격동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자기 같은 딸을 어떻게 키웠냐?"고 물어보네요. "자긴 절대 못 키울 것 같은데, 대단한 엄마"라고 하면서요. 그날부터 저흰 절친이 됐어요. 친정엄마가 왜 딸이 꼭 있어야 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은 날이었지요. 가끔, 제가 필요로 하는 걸 슬며시 건네주기도 하고, 자기는 싼 옷을 입으면서 저에게는 브랜드만 고집해요. 엄만 비싸고, 좋은 것만 입어야 한다면서...

 

  그 딸은 이제 자기 일을 똑 부러지게 해내는 멋진 여성이 되었어요. 코로나로 인해 비자발적 실업이란 것도 겪었지요. 미술교육 회사를 만들겠다며 정말 신나게 일했었는데 그 꿈을 접고 공무원을 하겠다고 했을 땐 너무 미안했어요. 더 이상 뒷바라지해줄 수 없는 경제력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거든요.

 

  어느 날, 가슴이 뛰지 않는다던 길을 선택한 딸이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나타났어요. 늦은 밤이라 역까지 마중을 나갔는데 보자마자 혼내지 말라고 너스레부터 떠네요. 명품 쇼핑백이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진짜를 들고 온  거였어요. 엄마 아빠에게 꼭 비싼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공무원 월급으로는 해 줄 수 없을 것 같아 적금을 깼다고 했어요. 정신 나갔냐고 혼을 냈지만 기특한 마음이 얼마나 고맙던지요.

 

  그렇게 원했던 꿈을 깨트리며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니 왈칵 눈물이 솟구쳤어요. 자신의 꿈을 가슴에 묻으며 쓸어 담지 못할 좌절을 겪었을 텐데도 의연한 척 웃으며 큰소리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꼭 1년 만에 합격하겠다"던 말 속에 묻어나는 헛헛함에 덩달아 까맣게 탔지요. 심장이 뛰는 일에 올인해도 부족할 때에 생계 걱정에 접어야 하는 마음이 오죽했을까요. 본인의 장담대로 1년 만에 합격한 지금도 '절대 포기한 게 아니라 잠시 미룬 거'라는 소리가 아프게 매달려 있는 건, 그 간절함을 알기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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