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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온미라클 Sep 05. 2023

우리 집에만 있는 이상한 유전자

쉬는 날 놀아줘야 하는 병

  저희 집엔 이상한 유전자가 있는 것 같아요. 아니면 오랜 학습의 결과물인지도 모르겠어요. 결혼 후 아이들을 키우느라 직장을 다니지 않을 때, 남편은 쉬는 날만 되면   어딘가를 다녀오려고 무진 애를 썼어요. 건축업에 종사해 쉬는 날이 거의 없는 데도 그게 가족들에 대한 의무고 도리라고 생각하는 듯했어요. 어떤 땐 오전에 출근했다가 오후에 놀러 가기도 하고, 아이들과 주일예배를 마치고 찾아가기도 했지요. 그러다 보니 밤늦게 귀가하는 건 다반사고, 늦은 밤 숙소를 잡았다가 새벽에 들어오는 일도 허다했어요. 24시 편의점에서 아침으로 먹을 삼각김밥으로 완성되었던 치열한 외출이 저의 직장 생활과 함께 막을 내렸는 줄 알았어요. 아니었어요.


  퇴사 후 잠시 집에 있는 동안 ‘쉬는 날 놀아줘야 하는 병’이 다시 도진거에요. 아무래도 '불치병'인가 봐요. 지난 연말부터 제주도에서 근무를 하게 된 남편은요. 본인이 쉬는 날이면 무조건 비행기 표를 보내와요. 어떤 땐 다녀온 다음 날 올 때도 있어요. 그 마음이 고맙고 좋기도 하지만, 솔직히 힘도 들어요. 체력에 무리가 가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이 엉망이 돼 버려서요. 


  그런데, 그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아이들도 그런 의무감을 가지고 있는 듯해요. 제가 쉬는 동안 본인들 데이트 약속을 잡기 전에 저의 일정을 먼저 챙기는 거 있죠? 어떤 땐 이런 가족들의 관심과 배려가 불편하고 부담돼요. 초등학교 어린애도 아닌데 왜들 그러냐고 화내고 싶지만 서운해할까봐 그러지도 못했지요. 엄마랑 놀려고 남자친구와 약속을 안 했다며 가고 싶은 데 없냐고 물어 보는데, 컨디션이 안 좋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 큰아들이 해 준 볶음밥을 먹고 을지로에 갔어요. 결혼 전 가끔 갔던 곳인데 요즘 힙지로라 해서 인기가 많다네요. 간판도 제대로 달지 않고도 유명한 카페와 식당들이 제법 있는데, MZ 갬성은 공부로 아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거라고 으스대면서요. 이해할 수 없는 힙지와 MZ 갬성보다 맑은 공기를 더 그리워 하는 꼰대가 되어 여러 곳을 돌아다닌 것 같아요. 요즘 관심 갖고 있는 제로띵스 매장과, 허준이 환자들을 치료했다는 혜민서 자리의 카페, 만선 호프도 갔고요. 광장시장에서 먹부림도 했어요.

 

  신기한 건, 제가 다시 취업을 하고 나니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렸다는 거예요. 무지개처럼 쓱 하고 나타났다 사라지니 뭔 욕심인지 많이 서운하네요. 그래도, 마음속으로 맑은 미소가 배실 배실 스며드는 걸 보면 이 유전자는 분명 좋은 기운을 갖고 있나 봐요. 아빠를 꼭 닮은 모습이 얼마 전에 본 쌍무지개 같아 ‘아름다운 유전자’라고 이름 붙여 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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