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수업(1)
"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은 일인칭 시점의 실화를 읽을 때마다 언젠가 나도 자라나 엉망진창인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키워갔다. 절망적인 가정 생활의 혼란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루에 몇 시간씩 책을 읽으며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현실도피에 열중하던 나날이었다. "
<인생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 메리 카>
더운 날들의 연속이었던 1993년의 여름. 상록수를 읽으라는 숙제를 내 준 국어선생님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고 한 듯 지희는 자신만의 숲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책의 숲. 여름의 짙은 무더위 속에서 지희는 엄마의 허름한 미용실에 앉아 책을 읽고 읽으며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글자, 문장, 그리고 글. 글 속의 주인공들의 서사, 그 맥락에 기대어.
여름방학이 지난 8월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갑작스러운 발표를 했다.
“이번 10월 말에 1학년 모든 반이 다 연극을 할 거에요. 여러분 모두가 참여하는 연극이에요. 교과서에 나온 희곡 별주부전을 각 반별로 각색해서 발표를 할 거에요. 연극 발표하는 날은 여러분반에 들어오시는 선생님들도 초청할거에요.”
"와~"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국어선생님 덕에 문학소녀가 된 아이들은 연극을 할 수 있다는 말에 생기가 돌았다. 지희도 마치 지희가 좋아하는 <빨강머리앤>에서의 연극수업처럼 자신이 앤이 된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국어선생님은 스테이시 선생님처럼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주고 싶어했다.
아이들은 각자 친한 친구와 이야기꽃을 피웠다. 서로 무슨 팀을 하고 싶은 지를 이야기했다. 학급회의 시간에 각 팀을 나누고 서로 친한 친구들끼리 자연스럽게 팀이 되었다. 수줍음이 많은 지희는 당연히 연기팀은 아니고 무엇을 해야하나 고민하다가 음향팀을 하기로 했다. 음향팀은 지희와 다영이, 그리고 선희 셋이 한 팀이 되었다. 지희와 선희, 다영이는 서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팀이 되었다. 선희는 워낙 서글서글한 성격이라 친구가 많았고 지희는 조용한 성격이라보니 영미 외에는 크게 친한 친구가 별로 없었다.
지희는 선희가 걱정되지는 않았는데 문제는 다영이었다. 지희는 다영이와 같은 팀이 된 것이 싫었다. 바짝 마른 몸에 차가운 인상을 가진 아이었다. 눈매가 무섭고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국어선생님은 다음 국어시간에 음향팀을 불렀다.
“대본에 맞게 장면마다 어울리는 음향을 녹음해와야 해. 30분이 넘는 공연이라 장면 전환이 꽤 있어. 우선 대본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교과서 지문을 보고 어떤 부분에 음향을 넣을지 셋이 정하기로 해 봐."라고 하셨다.
어색한 셋, 그 때 침묵을 깬 건 다영이.
"우리 같은 팀이 됐네, 잘해보자. 내가 학교 끝나고 학원에 가느라고 좀 바쁜데 우선 대본 나오는대로 우리집에서 녹음하자. 아직 대본 안 나왔으니까 대본 나오는대로 정해보도록 하자. “
그 말로 끝이었다. 자기 자리에 앉아서 문제집을 꺼낸 뒤 문제집을 풀었다.
선희와 지희는 서로를 마주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선희는 지희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그래, 쟤 말대로 대본이 나오고 나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 우리는 좀 기다려보자구. 야, 저쪽 소품팀 애들한테 가보자."하고 지희를 잡아당겨 소품팀 아이들에게로 갔다.
국어 시간마다 각 팀의 역할이 분주하게 돌아갔다. 연극을 준비하는 것인지 수다타임인지 알 수 없을 만큼의 아이들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여기저기서 웃느라 바빴다. 소품팀, 분장팀, 홍보팀이 각자의 할 일을 했다. 문제는 대본팀에서 대본이 잘 완성이 안된다는 소식이었다.
아이들이 쉬는 시간마다 국어부장 소진이를 보고 수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대본이 나와야 다음 단계를 거치는데 9월 중순이 되어가는 대도 대본이 완성이 되질 않는 터였다. 옆의 반도 거의 완성이 되어간다는 소문이 들려가는데 아이들이 수근거리는 대도 이유는 있었다.
시장에 사는 아이들과 달리 학교 옆 관교동쪽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다들 학원 시간에 바빠 방과후에 남지를 못하는 모양이었다. 국어 선생님이 계속 체크는 하고 있지만 각 반 마다 속도가 다르고 일정이 다 달라서, 아이들은 속을 태우고 있었다.
선희가 갑자기 지희를 불러냈다.
“소진이 있잖아. 국어부장이 사실 글을 잘 못 쓴대. 거기에 있는 아이들도 그렇고. 애들이 자기 바쁘다면서 다 가버려서 걔만 힘든가봐. 우리가 도와줄까, 대본팀?”
“우리가?”
"너는 책도 많이 읽잖아. 글도 잘 쓰는 거 아니야?“
“아니, 글을 잘 못쓰는데."
“너랑 나랑은 학원 안 가니까. 시간도 되잖아."
"그건 그렇지만.”
지희는 국어 부장 소진이랑은 친한 사이도 아닌데 대뜸 도와주겠다고 하면 좋아할까를 고민했다. 지희가 생각에 잡여있는 차에 특유의 적극성과 긍정이 돋보이는 선희는 이미 소진이에게 말해버렸다.
다음날 선희는 지희에게 말했다.
"나 소진이한테 말했어. 우리가 도와준다고."
지희는 놀라서 물었다.
"어? 나는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선희는 대뜸 말했다.
"소진이가 고맙대. 너 할거지? 하자, 하자. 끝나고 소진이가 떡볶이도 사준대. 응? 하자~"
지희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으응.알았어."
지희는 엄마에게 며칠 동안 학교에 남아서 대본을 쓰느라고 늦게갈 거라고 말했다.
엄마는 "너무 늦게 다니지는 말고."라고 했다.
다음날 7교시가 끝나고, 지희와 선희, 예슬이 그리고 소진이가 모였다.
선희가 물었다.
"어디까지 한 거야?"
"우리끼리 대충 하기는 했는데 뭔가 재미가 없어. 대사를 좀 바꾸기는 했는데 뭔가 흥겹지가 않아. 열 다섯 반이 모두 다 별주부전을 하는데 겹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선희가 말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우리 우리반에 들어오는 선생님 두 분을 여기에서 등장시켜 보는 게 어때? 여기 여기서 말이야. 별주부가 토끼를 만나기 직전에 길을 안내해주는 걸로 해보자. "
선희의 아이디어에 갑자기 불현듯 생각났는지 지희가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사회선생님 특유의 진중함이 묻어나는 대사와 동작을 지희는 어느새 글로 쓰고 있었다. "여기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특유의 목소리로) 어디 가세요, 제가 안내해드릴까요? 저도 잘 모르지만, 확실하지는 않지만요.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저기 같아요.' 라고 하면 어떨까?"
지희가 신이 난 듯 또다시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 영어선생님이 등장하는 거야. (톤이 높은 목소리로) 여러분 안녕, 오늘도 좋은 하루."
선희는 지희를 껴안았다.
“야, 넌 천재야."
선희와 지희, 예슬이, 소진이는 낄낄낄대고 웃으며 영어선생님, 사회 선생님의 말투와 동작을 집어넣어서 등장인물을 완성했다. 별주부와 토끼, 용왕의 캐릭터에도 담임선생님과 한문 선생님 그리고 반장 정미의 캐릭터를 집어넣어서 그야말로 1학년 3반만의 별주부전을 일주일만에 완성했다.
일주일동안 밤 늦게 집에 들어가면서 지희는 꽤 피곤했지만 너무 재미있었다. 친구들과 작품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지희의 손끝에서 만들어낸 인물이 대사를 하고 무대에 오른다는 것이 무척 뿌듯했다. 시장 속 자기만의 방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오던 지희. 지희의 머릿속에서 나온 말들이 글이 되고 글이 친구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인물이 되는 이 신기한 사건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연극 수업은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던 지희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시간, 그런 시간이었다.
<인생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는 대학에서 창의적 글쓰기를 강의하는 교수 메리 카가 자신의 강의의 요점과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접목시킨 책이다.
작년 여름, 아이 학교 옆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해서 읽고 감동받았던 그 때가 생생하다.
자전적인 글쓰기로도 충분히 좋은 글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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