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선미 Nov 23. 2018

퍼내도 퍼내도 남는

유강희, <열대야>

열대야

유강희



한대야

두대야

세대야

네대야

다섯대야

여섯대야

일곱대야

여덟대야

아홉대야

열대야

선풍기가

덜덜덜덜

퍼내도

퍼내도

남는

열대야


『지렁이 일기예보』 (비룡소 2013)



한반도에서 인명피해를 가장 많이 낸 자연재해가 폭염이라고 한다. 폭염과 열대야만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폭염연구센터(Heatwave Research Center)’가 올해 처음 문을 열었다는데, 센터도 무시무시한 열대야를 어떻게 해주지는 못할 것 같다. 시인은 ‘열대(熱帶)+야(夜)’를 ‘한대(寒帶)+야(夜)’로 바꾸어 한대(寒帶)의 시원함을 부르는 주문을 외워 본다. 의도적인 붙여 쓰기(‘한 대야’가 아니라 “한대야”이다)도 이를 위해서이다. 마법이 주술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 단계도 빠뜨리지 않는다. “한대야/ 두대야/ 세대야/ 네대야/ 다섯대야/ 여섯대야/ 일곱대야/ 여덟대야/ 아홉대야/ 열대야”.


‘열[十]+대야’의 ‘대야’는 물을 담아 퍼내는 그릇이 될 수도 있고, ‘열[十]∨대(臺)+야(‘이다’의 활용형)’의 선풍기 대수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면 “덜덜덜덜”은 더위를 대야로 퍼내느라 후덜덜 기운이 빠져버린 누군가의 모습이 되기도 하고, 밤새도록 후덥지근한 바람만 힘겹게 보태는 선풍기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더위가 퍼 담아 버릴 수 있는 무엇이라면 어떻게 퍼다 버릴 수라도 있겠지만, 선풍기 열 대의 동원령을 내려도 더위는 오늘밤 우리와 우리의 잠을 점령할 것이다. 해가 지기 전부터 “덜덜덜덜” 밤이 두려운 까닭이다. 



[도서관이야기] 2017년 07+08월

매거진의 이전글 아빠, 뻐꾸기가 울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