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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선미 May 27. 2016

연못에 신발을 빠뜨렸는데요

[2] 신발 이야기

식인마 렉터 박사는 스탈링 요원을 보고 말한다. “값비싼 가방에 싸구려 신발. 내겐 촌뜨기 같아 보여. 때 빼고 광냈어도 품위가 없어.” 고2 때 읽었던 잡지에는 데이트할 때 피해야할 차림이며 행동 등이 적혀 있었는데, (햄버거 메뉴는 괜찮다고 적혀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왜 하필 그게 기억나는지는 햄버거 앞에서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신발이었다. 신발은 반드시 깨끗한 것으로 신고 갈 것. 



지구 신발

함민복



너 지구 신발 신어 봤니?


맨발로 뻘에 한번 들어가 봐  

말랑말랑한 뻘이 간질간질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어

금방 발에 딱 맞는

신발 한 켤레가 된다


그게 지구 신발이야


지구 신발은

까칠까칠 칠게 발에도

낭창낭창 도요새 발에도

보들보들 아이들 발에도

우락부락 어른들 발에도

다 딱 맞아


지구 신발 한번 꼭 신어 보렴


— <바닷물 에고 짜다> (비룡소, 2009)



이 신발은 커플 슈즈로도 맞춤하겠다. 발가락 사이를 간질간질, 칠게랑 도요새랑도 커플이 될 수 있는 지구 신발. 이 시를 보면 이상하게도 나는, 갓난쟁이 아가 발바닥을 제 발바닥에 맞추어 대고 찍어둔 엄마 아빠들의 사진 한 컷도 생각이 나는 것인데...... 그런데 간지러움은 왜 필요할까?




장화 신은 고양이      

주미경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내리막길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올라오고 있지 뭐야

도톰한 수염자리에 아침 햇살을 묻히고

나긋한 걸음으로 올라오다

나를 보고 야웅 하지 뭐야


저 녀석 뭘 주차하고 오는 걸까?


삼거리 떡집 앞

편의점 뒷골목

라일락 꽃나무 밑을 밤새 돌아다녔을

장화


고소하고

쿰쿰하고

향기로운

빨간 장화를 주차하고 오는 걸까.


— <어린이와 문학> 2015년 10월



아침 출근길,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올라오는 고양이를 만났다. 나는 출근길인데 고양이는 퇴근길. 너의 밤샘 근무처는 어디어디였던 거니? 그곳에 꽃잎처럼 남겨져 있을 너의 발자국들. 아니, 아니라구? 나는 그냥 고양이가 아니야. 카라바 공작을 모시고 다니는 장화 신은 고양이라구. 고소하고 쿰쿰하고 향기로운 그 신이 닿은 곳곳에 무슨 무슨 이야기들이 피어나는 것 같다.




숨은 그림 찾기  

김륭



새 한 마리 나뭇가지 위에 앉아 갸웃갸웃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한순간 땅으로 내려 앉아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는 듯 제 그림자 꿰찬 다음


푸드덕, 다시 하늘가로 매달려요


새는 그림자가 신발이래요


날개가 옷걸이래요


—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 고양이>(문동 09)



이번에는 새의 신발이야. 신발을 갖춰 신고서야 날아오르는 새의 차림은 분명 잘 빠진 슈트일 것. 김해경이 아닌 이상이기를 원했던 식민치하 이상의 삶이나 전후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도 덴디 코트를 입고 다녔다는 박인환의 포즈가 생각이 나는 것은, 이상의, 박인환의, 새의 그것이, 살아가는 데에는 도대체 쓸모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겠다. 동시라는 것도 어쩌면 오스카 와일드의 단춧구멍에 꽂힌 데이지꽃 한 송이일지도 모르겠다, 살아가는 일에는 도무지 쓸모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래서 날아오르게 하는, 신발.




연못  

송찬호

    


연못에

신발을 

빠뜨렸는데요


오리가 돌아올 때까지

연못가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연못 주인인 오리가

연못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 <저녁별> (문동 11)



<구두>의 시인이 연못에서 '신발'을 빠뜨렸다. 그래서 연못 주인인 오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연못 주인인 오리가 연못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시인은, 빠뜨린 신발을 찾기 위해, 오리가 건네준 열쇠로 연못문을 따고 (또는 오리가 따준 문을 열고) 들어가 신발을 꺼내와야 한단 말인가? 신발을 꺼내 줄 오리가 아니라, 연못 열쇠를 가지고 있는 오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 한 마디 말이 이 시를 처음으로 다시 올라가 곰곰 생각에 잠기게 한다. 잠깐만, 무얼 빠뜨렸다고 했지? 그런데 왜 하필 신발이지? (그의 최근 신작 시집 제목이 <분홍 나막신>이라는 것도 아무래도 나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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