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희, <누군가는 불고 있다>
누군가는 불고 있다
유강희
호두나무가 호두를 불고 있다
호두는 작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다
매실나무가 매실을 불고 있다
매실이 작은 럭비공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다
호떡집 아가씨가 호떡을 불고 있다
호떡이 노란 달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다
나는 죽은 친구들 이름을 불고 있다
친구 얼굴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다
나는 별을 쳐다보고 있다
별은 캄캄 밤하늘 무엇을 불고 있나
무엇을 불고 있기에 저리 깜박깜박 빛나나
⟪뒤로 가는 개미⟫ (문학동네 2015)
"불고 있다"는 '불다; 입김이나 바람을 일으키다'에서 '붇다: 물에 젖어 부피가 커지다', '붓다: 살가죽이나 어떤 기관이 부풀어 오르다'로 옮아 가면서 죽은 친구를 호명하게 합니다('부르다'). 그리움은 부르게 하고, 당신과 나를 부풀어 오르게 하고- 퉁퉁 부은 눈으로 젖어 있는 친구들을 부르게 합니다. 오늘 아침 김개미 시인의 <눈 오는 날>을 울면서 읽다가 유강희 시인의 <누군가는 불고 있다>가 생각났어요. 끝나지 못하는 애도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엄숙한 시간
루이너 마리아 릴케
이제 이 세상 어디선가 우는,
까닭 없이 우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슬퍼 우는 사람.
이제 이 밤 어디선가 웃는,
까닭 없이 웃는 그 사람은
나를 비웃는 사람.
이 세상 어디선가 이제 걷고 있는,
까닭 없이 걷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찾아올 사람.
이제 이 세상 어디에서 죽어 가는,
까닭 없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사람,
그 사람은 나를 응시하는 사람.
손재준 역, ⟪두이노의 비가⟫ (열린책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