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규, <넘어 선, 안 될 선>
신민규
넘어오지 마 이 선
넘어오면 다 내 꺼
샤프 볼펜 지우개 수첩
하나라도 넘어오면 다 내 꺼
왜 이렇게 야박해
뭣 땜에 날 미워해
화난 게 있으면 얘기해 내게
꼬인 우리 사이 다 풀어 줄게
다 필요 없고 알 거 없고
너란 애는 지겨워 제발 저리 고고
어? 샤프가 넘어왔네 내 꺼
지우개가 넘어왔네 내 꺼
잠깐만 아니 잠깐만
샤프 볼펜 수첩 다 줄게
부탁이야 돌려줘 지우개
우리 사이 가른 선 지우게
넘어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모든 걸 다 잊고
즐거웠던 때로
넘어가고 있어
돌아가고 있어
눈부신 오후 햇살
행복했던 때로
⟪Z교시⟫(문학동네 2017)
"언어의 혁신은 인식의 혁신이다"(폴 리쾨르). "우물들은 모두 자웅동체(雌雄同體)/ 장마를 산란하기도 한다"(려원)는 표현 하나는 장마를 지상에 기원을 둔 쏟아지는 수정체로 상상할 수 있게 합니다. 물활론이 자주 물질 속에 내재한 생명성을 깨운다면, 그 역인 생명의 물질화는 다양한 변종의 생명계를 단순하고 건조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이 무미건조함과 가벼움이 신민규 동시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또한 최근 시인들의 시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동음이의의 말놀이는 소리은유의 인식의 확장까지 가져옵니다. 소리은유에 의한 인식의 확장은 깊은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에 가볍고 발랄합니다. (가령ᅠ"그녀가 느끼기 시작했다"는 표현은, 두 부류의 목적어군을 가질 수 있는 구문인데,ᅠ'느끼다'라는 표현이 가지는 목적어들이 가볍지 않음에도 불구하고ᅠ'느끼다'라는 동음이의의 단어는 서로를 상쇄시키면서, 가볍고 발랄하게 의미망을 형성해냅니다.) <넘어 선, 안 될 선>에서 제목으로 사용된ᅠ"넘어 선"은 도치된 명령문입니다. '넘다'의 활용형 '넘어선'이 이미 이 시의 결말을 담고 있는 셈입니다. 이 메인의 줄기에ᅠ"꺼",ᅠ" -게",ᅠ" -고"의 종결 어미를 거쳐ᅠ'go'에 닿는데, 이ᅠ'고'는ᅠ" 넘어 선"과 마찬가지로 '넘어오지 마'의ᅠ'go'와ᅠ'넘어가고 싶어',ᅠ' 돌아가고 싶어'의ᅠ' go'의 양가적 의미로 풀어집니다. 이ᅠ'ㄱ' 자음들은ᅠ"지우개"와ᅠ"지우게"의 소리은유에 닿으면서 상황을 전환시키는데요, 4연의 종결어미가 이전과는 다르게 " -어"로 반복되며 모음의 부드러움(유성음)이 내용까지를 담아내는 식입니다.ᅠ'책상에 줄을 그어 놨던 짝꿍이 선을 지우고 사이 좋게 되었다'라고 말했다면 얼마나 유치하였을까요. <넘어 선, 안 될 선>은 내용만 본다면 새롭지도 않고 교훈적이기까지 합니다(사이좋게 지내자). 그러나 새로운 형식을 입자, 인식은 새로워집니다. 동시는 랩이라는 일정의 형식성을 입고 독자와 거리를 가지게 됩니다. 이 거리는 활유의 가능성, 공유의 가능성을 내는 공간이 됩니다.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