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규, <등의 신비>
신민규
등은 참 신비롭습니다.
평소에는 얌전하다가
옷을 여러 겹 껴입으면
한가운데가 가려워집니다.
손이 안 닿아 기둥 같은 데에
등을 대고 위아래로 몸을 흔들어 긁어도
안 시원합니다.
효자손이 없을 때는
효자인 동생 손으로라도
긁어야만 시원해집니다.
누군가가 등에 손가락 글씨를 쓰면
간지럽지 않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자기 이름만 쓰고
맞혀 보라는 애들이 있는데
전교생 이름 다 맞히고 싶습니다.
등은 손이 잘 안 닿아서
사람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등은 정말 신비롭습니다.
⟪동시마중⟫(2018년 5, 6월호)
<등의 신비>는 여러 점에 함민복의 <간지러움은 왜 필요한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동시는 동심으로 본 시의 세상”, 오규원의 동시론입니다. “동심”이란 무엇일까요. 제가 짐작해 보는 “동심”은 아이들의 키높이입니다. 아이들의 키 높이로 바라 본 세상, 그래서 새로운 세상. 새롭다는 것은 낯설다는 것이고, 몰라서 궁금하다는 것, ‘당연함’이 아니라 ‘궁금함’으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신민규의 <등의 신비>와 함민복의 <간지러움은 왜 필요한가>는 동심이 아니었다면 어른인 시인이 떠올리기 힘들었을 감탄과 질문으로 느껴졌습니다. 특히 4연 “효자손이 없을 때는/ 효자인 동생 손으로라도/ 긁어야만 시원해집니다”나 6연 “자기 이름만 쓰고/ 맞혀 보라는 애들이 있는데/ 전교생 이름 다 맞히고 싶습니다.”에서는 포복절도하고 하였습니다. “효자”나 “전교생 (...) 다 맞히고 싶습니다”와 같은 교훈성(?)을 이런 극공손 합쇼체 아주높임 격식체 문장과 함께 웃음의 요소로 바꿔낼 수 있다니요. 가려운 등은 정말이지 어쩔 도리가 없는데(심지어는 안 가렵던 등도 가렵다고 생각하면 마구 가려워지는 신비로움이라니요), 여기에 보태 등에 글자를 쓰며 맞춰 보라며 아주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였던 옛날을 연상시키며 가려움의 촉각을 그리움의 촉각으로 천연덕스럽게 연결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