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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선미 Nov 23. 2018

두 무심한 나름의 일이 만나 이루어내는 아름다움

이안, <말뚝>

이안



오리가

날아와

앉았다

꼭 한 번 이 그림을 그려 보려고

말뚝은 뻘흙 속에서 꼿꼿하였다


꼭 한 번 이 그림을 그려 보려고

오리는 아주 멀리서부터 날아왔다

그림자

오리가

앉아 있다


⟪동시마중⟫ (2018. 7·8월호)ᅠ



동시로도 적지 않은 구체시가 제출되어 있습니다. 선풍기, 민들레, 동부콩, 나팔꽃, 뭉게구름, 논과 밭……. 그런데 구체시를 잘 쓰기란 참 어렵습니다. 회화성에 치우치기 쉬운 탓입니다. 시각성의 외피에 치중된 결과, 내용과 따로 노는 시가 되거나 시각적 형식을 위해 내용이 어설프게 조작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구체시를 위한 구체시가 아니라, 바로 그 형식이어야만 하는 내용이고, 그 바로 내용이 요구한 형식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구체시가 이상의 오감도 시제4호라는 점은 <말뚝>을 살피는 데 있어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말뚝>은 말뚝 위에 앉은 오리의 형상과 그 형상이 수면에 비친 수직 거울상의 모습인데, 이상의 시제4호 역시 거울상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거울은 자아의 분열과 성찰을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 수단입니다. 이상의 시제4호 역시 자아 분열의 양상을 담고 있습니다. <말뚝>도 거울상이기에 상하수직 데칼코마니의 대칭으로 분열됩니다. <말뚝>에서 거울 밖에 해당하는 수면 위 세계와 거울 속에 해당하는 수면의 세계는 오리를 ‘오리’와 ‘그림자 오리’로 나눕니다. 그런데 보통의 거울상에서 분열되는 주체는 응시하는 주체인데 반해 <말뚝>에서는 이 둘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1연의 주체는 말뚝입니다. 말뚝은 자신 위에 오리를 앉혀보려고 뻘흙 속에서 꼿꼿한 의지적 존재입니다. 2연의 주체는 오리입니다. 오리는 수면 위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워보려고 아주 멀리서부터 수고스럽게 날아온 존재입니다. 말뚝은 자신의 일을 합니다. 오리는 자신의 일을 합니다. 두 무심한 나름의 일이 만나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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