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생활에서 가장 열심히 한 일이 뭐죠?

교토, 산책 예찬

by 가람

갑작스러운 산책


저녁에 집에 머물겠다고 결심하고서 집에서 입는 옷을 입고, 저녁 식사 후에 등불이 비치는 책상에 앉아서 이런저런 일이나 게임을 시작하고, 그것이 끝난 후 습관적으로 자러 갈 때, 바깥의 날씨가 좋지 않아 집에 머무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껴질 때, 지금 이미 오랫동안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었기에 외출하는 것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 또한 이미 계단 집이 어두워지고 집 대문이 닫혀 있을 때, 이러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불쾌함에 일어서서, 즉시 외출하기에 적당한 옷을 입고, 나가 봐야 한다고 설명하고, 짧은 인사 후 집 문을 빠르게 닫다가 큰 소리가 나서, 다소 불만이 생기리라 여겨질 때, 골목길에 서 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이러한 자유를 온몸으로 느끼고 특별한 움직임이 절로 나올 때, 이러한 한 번의 결심을 통해서 내 모든 결정 능력이 예민해짐을 느낄 때, 가장 빠른 변화를 쉽게 실현하는 욕구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진다는 것을, 습관이라 치부하지 않고 더 크게 인식할 때, 그리고 그렇게 긴 골목길을 걸어갈 때-그다음에는 오늘 저녁만큼은 내 가족으로부터 멀어지는 반면에, 스스로는 아주 확고한 결심으로, 검은 실루엣의 형상을 하고는 그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위해서 일어선다. 이러한 늦은 저녁 시간에 한 친구를 찾아가 잘 지내고 있는지를 살필 때 모든 것이 좀 더 강해진다.

<갑작스러운 산책> ≪변신-카프카 단편선≫ 프란츠 카프카 지음/한영란 옮김, 더클래식, 2015, 129-130pp.


내가 산책을 하러 나가기까지의 과정은 카프카의 단편처럼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 단편은 한 페이지가 넘어가도록 한 문장이 끝나지 않는다. 나 역시 한 번 밖으로 나가기 위해선 그만큼의 시간과 수고가 필요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혹시 사람이 많으면 어쩌지, 괜히 나갔다가 기분 나쁜 일이 일어나면 어쩌지 걱정을 하는 한편 마음 한 구석에서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산책하며 들을 플레이리스트도 만든 뒤 가방에 지갑과 책을 넣었나 확인한 후 신발을 신는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문을 나선다. 암막 커튼 속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햇빛이 쨍쨍하다. 바깥공기가 낯설다.






내 멋대로 교토 뚜벅이 가이드


나의 칩거 기질은 취준생 시절 사회의 쓴맛을 맛 본 후 더 심각해졌다. 가벼운 마음의 감기를 앓았다고 할 수 있겠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귀찮았다기보다는 무서웠다. 하지만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어 봤자 기분만 더 꿀꿀해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또 바깥바람을 쐬러 나가는 용기 있는 행동을 했다는 나 자신이 뿌듯했기에 종종 산책을 나가곤 했다. 처음에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 시간대에, 그러다가 차츰 날이 밝을 때도 나가는 연습을 했다.


산책이란 백수에게 참 좋은 취미다. 돈을 들이지 않고도 밖에서 두세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리를 비우고 자갈 밟는 소리, 바람 소리, 자전거 지나가는 소리에 집중해본다. 속상했던 일들도 속으로 중얼거리며 잊어보려 애쓴다. 그렇게 한바탕 걷다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하고 풍경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고 어지러운 고민이 없어졌다. 이번에는 내가 걸었던 교토의 길을 의식의 흐름대로 소개해보려고 한다.






1. 집으로 가는 길

지하철 가라스마선(烏丸線) 이마데가와역(今出川駅) - 교토고쇼(京都御所) –마루타마치역(丸太町駅)


우리 집과 학교 사이는 지하철로 단 한 정거장, 편도 210엔이다. 왕복으로 하면 4000원이 넘는 돈이라 수업이 끝난 후 집으로 오는 길은 자주 걸어 다녔다. 이마데가와 캠퍼스에서 도서관 쪽으로 빠져나와 신호등을 하나 건너면 교토고쇼를 끼고 긴 길이 펼쳐진다. 방향 꺾을 것 없이 20분 정도 쭉 걸으면 내가 살던 마루타마치역이 나온다. 돌담 너머로 우거진 초록을 눈과 코로 느끼며 걸을 수 있는 코스다. 길이 매우 좁아 마주 오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피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4년 동안 걸어 다닌 길인 만큼 졸업 후에 걸어도 옛 생각이 파릇파릇 떠올랐다.


학교를 나와 우리 집에 도착하기까지.


moment: 봄 햇살을 받으며 걷다가 핸드폰에서 비투비의 '봄날의 기억'이 흘러나왔을 때가 아닐까. 이제는 분홍색 앨범 아트만 봐도 이 길을 걷던 날의 온도, 냄새, 분위기가 떠오른다.






2. 면접이고 나발이고 그냥 다 싫을 때

교토고쇼(京都御所)


교토고쇼는 일본 천황이 살았던 터를 보존해 놓은 곳이다. 지하철 이마데가와역(今出川駅)을 나오면 바로 보인다. 기간 한정으로 성 내부를 둘러볼 수 있는 관광 코스가 있긴 하지만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걸을 곳은 많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갈밭과 소나무를 지나면 거북이가 사는 연못도 있고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도 나온다. 노부부가 그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의 모습, 나처럼 혼자 걷는 사람들의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볼거리는 없지만 매우 넓기 때문에 사람들과 부딪힐 걱정은 없다. 그래서인지 취준생 시절 이 곳을 많이 찾았다. 면접 준비가 막힐 때도, 당장 내일이 마감일인데 사전 과제가 죽어라 하기 싫을 때도 이곳을 걸었다. 자갈 먼지에 운동화가 회색이 될 때까지 걷다가 소나무를 보고 연못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거북이 사진을 찍고 있다 보면 집으로 가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말로 설명 못하겠는데 이상하게 큰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서는 의욕이 생겼다.


교토고쇼를 걸으며 찍은 사진들.


moment: 광고 회사 2차 면접이 너무 가기 싫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하루 전에 면접 자료와 커피를 챙겨서 교토고쇼를 찾았다. 산책하다가 다리가 아파올 때쯤 벤치에 앉아 내가 쓴 자소서를 읽고 면접 준비를 했다. 그렇게 하기 싫던 일이 금방 끝났고 아무 생각 없이 본 면접도 통과했다.






3. 생일인데 장미는 보고 싶고 같이 걸을 남자는 없다

교토 부립 식물원(京都府立植物園)


이 곳에 가려면 아침부터 서둘러야 한다. 집에서 꽤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기타야마 역(北山駅)으로 이동한 뒤 산책을 시작한다. 키타야마는 교토의 부자 동네인데, 도쿄로 따지자면 지유가오카(自由ヶ丘) 같은 분위기다. 3번 출구로 나와 구석구석 숨어있는 작은 편집 숍, 골동품 가게를 구경하다 보면 교토 부립 식물원 입구가 나온다. 입장권은 단 돈 200엔. 여기도 교토고쇼 뺨치게 넓기 때문에 입구에 있는 자판기에서 물을 하나 산 뒤 본격적으로 돌아다닌다.


대학교 4학년 생일, 장미꽃이 보고 싶지만 같이 가자고 할 사람이 없어 그냥 혼자 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팬케이크를 먹으며 <어바웃 타임>을 보고 새로 산 청치마를 입고 나갔다. 날씨는 혼자인 게 억울할 정도로 좋았으며 유월의 식물원은 ‘봄철의 티파사’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꽃들의 여왕이라는 장미가 만발해있었고 수국원에는 수국이 잔뜩 피어있어 신화 속에 나올 법한 정원으로 홀려 들어간 것 같았다. 꽃에 취한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진 토닉이 마시고 싶어 졌고, 아는 사람에게 연락하니 저녁에 진 토닉을 같이 마셔주겠단다. 나는 집으로 와서 그 사람과 만나 같이 장을 본 뒤 저녁을 먹고 새벽까지 술 파티를 벌였다.


생일을 핑계로 꽃구경을 잔뜩 하고 진 토닉도 잔뜩 마셨다. 05.JUN.17


moment: 2017년 내 생일.






4. 윤동주 시인도 교토 유학생 시절 자주 걸었다는 곳

가모가와(鴨川) & 스타벅스 산죠오하시 지점(スターバックス三条大橋支店)


영화 <동주> (이준익, 2015)를 보면 윤동주 시인이 교토 유학생 시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압강(가모가와)을 걷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가모가와를 자주 걸었지만 윤동주 시인이 걸었던 길을 걷는다는 생각을 하니 새삼 가모가와 산책이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가모가와 역시 지하철로 이동해야 한다. 교토 지하철은 노선이 두 개 밖에 없어 웬만해선 환승하는 일이 없다. 하지만 가모가와에 가려면 환승을 해야 한다. 가라스마오이케역(烏丸御池駅)에서 도자이선(東西線)으로 갈아 탄 뒤, 산죠케이한역(三条京阪駅)에서 내린다. 7번 출구로 나가 우회전을 하면 스타벅스 산죠오하시 지점과 그 밑을 흐르는 가모가와가 보인다.


강가이기 때문에 날이 어두워지면 바람이 매서워 늦은 방문 시에는 외투가 필수다. 이 곳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걷는다기 보다는 분위기에 취해 걷는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가모가와를 산책하는 사람들을 내다볼 수 있는 산죠오하시 스타벅스 창가 자리에 앉아 문학도처럼 책을 읽는 것도 좋고, 저녁에 친구들과 호로요이 한 캔씩 들고 강가에 앉아 이야기하는 것도 좋다. 버스킹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여전한지는 잘 모르겠다. 스타벅스를 기준으로 조금만 위쪽으로 걸어가면 교토 최고의 핫플레이스 시죠 거리(四条通)가 이어지기에 젊고 세련된 분위기를 느끼기에 딱이다.


어쩐지 밤에 찍은 사진이 많다.


moment: 대학 신입생 시절 시험 끝나고 막차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시고 가모가와를 걸었다. 걷다가 발이 아파서 자전거를 끌고 온 친구가 나를 뒤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준 적이 있는데, 술이 깰락 말락 몽롱한 정신에 얼굴을 스치던 바람을 잊을 수가 없다.

*일본에서 자전거 뒤에 사람을 태우는 행위 및 음주 시 자전거 조작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5. 관광객 속에 섞여 사색에 잠기고 싶을 때

철학의 길(哲学の道) 


철학의 길의 사계절은 뚜렷하다. 봄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초록이 우거지고 가을에는 낙엽이, 겨울에는 눈이 바닥에 쌓인다. 보통 관광객들은 은각사(銀閣寺)와 세트로 보지만, 여유가 있다면 반나절 정도 시간을 내어 철학의 길만 오롯이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철학의 길. 이름 그대로 사색에 빠지기 좋은 장소이며 북적거리는 관광객 틈에서 관광객인 척하며 사진을 찍고 길가에 늘어선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기에도 좋다. 교토의 아기자기함의 끝판왕을 볼 수 있는 곳이기에 인생 사진 찍기에도 제격이다.


철학의 길에 가면 꼭 들르게 되는 가게가 하나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사과 주스, 사과 디저트 가게이다. 가격이 착하지는 않지만 테이크 아웃 사과 주스 한 잔 들고 걷는 게 습관이 되었다. 두 분이서 오순도순 장사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다. 이왕 관광지에 온 거, 녹차 맛 소프트 아이스크림도 먹어 주고 경치 좋은 카페에서 라떼도 마셔준다. 한참 현지인이 아닌 관광객의 기분으로 돌아다니면 신기하게도 마음의 짐이 사라지고 생각이 맑아진다.



철학의 길의 봄, 여름, 가을, 겨울?


moment: 대학교 1학년, 한국에 사는 친구가 놀러 왔다. 전날 둘이서 모히토 한 병, 진 반 병을 비우는 바람에 오후 4시가 다 돼서야 도착했고, 자판기 아이스크림으로 해장을 하며 어두운 철학의 길을 걸었다.






6. 예술에 빠지고 싶을 때

교토시 미술관(京都市美術館), 교토 국립 근대 미술관(京都国立近代美術館)과 오카자키 공원(岡崎公園)


교토 내에서 예술가적 감성이 흘러넘치는 곳이다. 버스에서 내려 이정표를 따라 8분 정도 걸으면 수로(水路)가 보이고, 길을 따라 오카자키 공원을 지나면 미술관이 나온다. 교토시 미술관은 신입생 시절부터 애용하던 곳인데, 2016년인가 재정비를 위해 문을 닫았다. 아쉬웠지만 교토 국립 근대 미술관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후자는 근대 미술관인만큼 회화(絵画) 이외에도 포스터, 사진 등 다양한 전시가 많이 열린다. 기념품 가게에 Y교수님이 쓰신 책이 있어 새삼 놀랐던 기억이 난다.


전시를 다 봤으면 공원을 거닐어도 좋다.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 속에 섞여 조용히 사색에 빠지거나, 잔디에 앉아 전시회 책자를 다시 읽어보는 것도 좋다. 공원 내부에 츠타야 서점(蔦屋書店)과 스타벅스가 합쳐진 가게가 있다. 아침부터 전시 보고 공부하느라 지친 머리에 카페인을 충전하기에 딱이다. 졸업 논문이 막힐 때마다 영감을 얻겠다는 구실로 자주 가서 놀다가 초고를 쓰다 오기도 했었다.


노트 한 권 들고 가면 영감이 자주 찾아왔던 미술관 산책.


moment: 교토를 떠나기 전, 씁쓸했던 마지막 방문. 여러모로 외로웠지만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열심히 고흐의 그림에 집중했다.






대학 시절 가장 열심히 한 게 고작 산책이냐고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다. 사실인걸. 그래도 4년 동안 내 발걸음 안 닿는 곳이 없게 많이 걸어 다녔다. 오늘 언급한 길 말고도 교토 곳곳을 누비며 내가 사는 도시를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했기에 후회는 없다.


가끔은 이렇게 뇌를 비우고 의식을 흐름대로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오사카에 살 때는 치안이 흉흉해서 마음 놓고 걸어 다닐 수가 없었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은 가끔 덕풍천을 걸으며 갈대 구경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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