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속 시지프 신화
나는 두려움을 직시하는 일에 젬병이다. 결과가 안 좋을 것을 뻔히 알면서 발표를 기다리는 시간도 두려운 것 중 하나인데, 불안, 초조, 신경과민이 나를 따라다닌다. 가끔은 발표날까지 잠이나 자다가 일어났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그 시간은 나에게 고문이다. 잠을 자는 행위 이외에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것이 산책이었다. 물론 생각을 비우기까지 어느 정도 연습이 필요했지만, 익숙해지니 자고 일어나는 것보다 건강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 있었다.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 때, 그 시간을 유효하게 쓰지 못하는 비관적인 태도가 나를 괴롭힌다. 회피하려고 애쓸 시간에 차라리 현실을 직시하고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했다면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피하는 게 상책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자꾸 나를 가두고 숨어버리게 된다.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아녜스 바르다, 1962)
누벨바그 작품 중 하나인 이 영화는 '클레오'가 건강 검진 결과를 기다리는 모습을 시간의 흐름대로 담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클레오 역시 비관적인 태도로 결과를 기다린다. 가수인 그녀는 ‘예술가의 프로토타입’을 몸으로 보여주며 아주 센티멘탈하고 예민하고 제멋대로다. 영화 속에는 삶과 죽음, 전쟁과 평화, 미와 추, 흑과 백 등 수많은 대조가 등장하는데, 그 사이에서 클레오가 선글라스를 낀 채 세상을 얼마나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보여준다.
클레오를 괴롭히는 것들은 미신과 징크스다. 가뜩이나 미신을 잘 믿으면서 클레오는 건강 검진을 결과가 나오는 당일, 타로 가게로 가서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점친다. 점쟁이가 당신은 미래에 큰 병에 걸릴 거라는 말을 하자 클레오는 그 말 한마디에 죽을병에 걸렸다는 최악을 상정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녀의 가정부는 ‘검은 모자는 불행을 가져온다’ ‘화요일엔 새로 산 물건을 들고 다니면 안 된다’ ‘재수가 없는 번호판을 단 택시를 타면 안 된다’는 등 떠들어대며 온갖 미신과 징크스로 클레오의 마음을 더 심란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사귀는 남자는 클레오의 근심 따위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하고, 같이 음악 하는 남자들은 아프다니까 병원 놀이를 하질 않나, 악보도 못 읽는다며 무안을 준다. 주위 사람들이 이 모양이면 건강 검진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화병으로 죽겠다.
이런 사람들과 상종하기 싫어진 클레오는 타 들어가는 추한 속내를 감추려고 아름다운 옷과 장신구로 몸을 치장하고 거리로 나선다. 비록 그 옷과 장신구가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색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개의치 않고 거울을 보며 자기 자신을 직시한다.
애써 ‘아름다운 것들’로 자신을 꾸미고 거리를 배회하지만, ‘추한 것들’이 자꾸만 그녀 눈에 들어오며 마음속에 있는 피해망상은 더 크게 부풀어 오른다. 라디오에서는 알제리와의 전쟁 뉴스가 흘러나오고, 개구리를 먹는 남자를 지나니 어떤 가게에서는 사고가 나서 누가 죽은 모양이다. 아름다움으로 살아있음을 느끼려는 클레오를 조롱이라도 하듯 파리의 거리에는 추와 죽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삶이란 부조리와 맞서 싸우는 것
클레오가 아무리 추한 것들로부터 도망치려고 발버둥 쳐도 어느새 그것들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있다. 운명이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바꿀 수 없는 모양인가 보다. 세상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부조리로 가득 차 있고 인간은 부조리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라는 알베르 카뮈의 글이 문득 떠오른다. 카뮈의 부조리 철학을 담은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그는 부조리를 회피하기보다는 직시하고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바로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에 꼭 매달려야 한다. 한 일생의 모든 귀결이 송두리째 그것으로부터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합리, 인간의 열망, 그리고 양자의 대면에서 솟아나는 부조리, 이것이 바로 드라마의 세 등장인물이다. 한 실존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논리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드라마지만 말이다.”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지음/김화영 옮김, 책세상, 1997, 47pp.
그 이유인즉슨 부조리를 인지하고 반항하는 행위만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해 봤자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는 생각으로 부조리를 회피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죽은 삶이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아도 반항하고 맞서 싸우는 태도가 일말의 희망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신들이 내린 형벌로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진 돌멩이를 다시 언덕 위로 들고 올라와 떨어뜨리는 시지프처럼 말이다.
“어떤 운명을 산다는 것은 그것을 남김없이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의식에 의하여 백일하에 드러난 부조리를 자신의 눈앞에 지탱시키려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운명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 그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부조리는 대립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그 대립의 항목들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부조리를 기피하는 것이 된다. 의식적인 반항을 폐기하는 것은 곧 문제 자체를 폐기하는 것과 같다.”
Ibid, 83pp.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클레오에게는 ‘병’이라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운명을 피하기 위해 억지로 죽음의 징크스와 추한 것들로부터 도망치는 클레오의 모습은 어딘가 신경질적이고 불안하고 위태롭다. 하지만 몽수리 공원에서 만난 휴가 나온 군인 ‘앙투안’과의 대화를 통해 그녀는 드디어 추한 것과 죽음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다. 클레오를 생각해 주는 척하며 그녀의 고민을 무시하던 가정부나 남자들과는 달리 전투에서 죽음을 목격한 앙투안은 클레오의 두려움을 이해한다. 마음을 알아주는 이에게 마음을 연 클레오는 앙투안에게만 자신의 본명 (플로렌스)을 알려주고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위에서 인용한 카뮈의 말대로 클레오의 드라마 = 인생은 병으로 인해 끝나는 허망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남자와의 대화를 계기로 그녀는 선글라스도 가짜 이름도 벗어던진 채 현실을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어떤 운명을 산다는 것은 그것을 남김없이 다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그녀는 전쟁, 병, 죽음, 추한 것들도 삶의 일부로 인정하고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클레오가 의사의 입을 통해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듣고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카뮈로 치환해서 이해하자면 부조리를 직시했기 때문이 아닐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지고 한결 편안해 보인다.
영화 중반, 클레오가 친구를 만나 관람한 단편 영화에도 비슷한 메시지가 들어 있다.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보는 풍경과 선글라스를 벗은 뒤 보는 풍경은 180도 다르다. 부조리를 피하려고 선글라스를 끼고 바라보는 세상은 진짜가 아닐 수 있다. 실체를 알게 되는 것이 무서워 외면하기보다는 당당하게 맞서 싸울 때 진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감독이 클레오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