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 없이 일하는 신입사원을 위한 안내서

시급 인생 20화-후배들에게

by 가람

우리의 일상은 그저 찌그러진 동그라미의 집합일 뿐


얼마 전 신입 한 명이 일을 너무 못 한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약 2달 전 다른 신입 한 명은 시간 외 수당 없이 야근을 강요당하는 부조리함에 못 이겨 장문의 메일을 남긴 뒤 잠수를 탄 사건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부푼 가슴을 안고 첫 출근을 한 날 신경질적으로 울리는 타자 소음 속에 앉아 있으며 어떤 기분이었을지, 항상 ASAP을 외치지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선배들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을지, 그리고 괴로움 끝에 몇 개월 못 버티고 퇴사하겠다고 말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사의를 받아들이는 선배들을 보고 얼마나 비참했을지 뼈저리게 공감합니다. 모두 2~3 년 전의 제 모습이기 때문이죠.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


지겹고 무섭던 공항을 떠나 광고대행사에 첫 발을 내딛던 날,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건네던 저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던 선배들의 싸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광고대행사가 날고 기는 쎈 언니들의 집합소라는 걸 몰랐던 저도 문제지만, 신입사원에게 붙여줄 사수 하나 없을 정도로 인력 부족에 허덕이던 첫 회사도 참 문제 많은 곳이었습니다.


업무에 어떤 사이트를 참고하면 좋을지, 기획안은 어떻게 쓰는 건지, 회의 준비는 왜 막내가 해야 하는 건지, 어째서 할 게 다 끝났는데도 팀장이 퇴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에 갈 수 없는 건지 그 누구도 알려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20명 남짓한 사람들 앞에서 매일같이 대차게 까일 때도 위로해주는 이 하나 없어 화장실로 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혼자 식히고 들어와야만 했습니다.


매일 이어지는 야근 회의 / 선배들이랑 밥 먹기 싫어서 따로 먹던 날도 많았습니다.


연봉 2,200 만원 밖에 못 받으면서 이렇게까지 일해야 하나 화딱지가 날 때도 있었고, 인센티브 자랑하며 애플 워치나 사대던 어린 팀장 언니가 눈꼴 시어 죽겠던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언니들도 이해가 가는 게, 3년 차 정도밖에 안 됐는데 팀장 직급 달고 모든 일을 책임지려니 얼마나 신물 날 정도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겠습니까.


제대로 된 사람이 들어와도 모자랄 판에 쌩 신입이 들어와 멍 때리고 앉아있는 것도 싫었을 거고 쌩 신입의 문서 작업이 그네들 성에 차지도 않았을 겁니다. 살인적인 업무량에 매일 이어지는 야근, 일을 하는 사람만 하는 파레토의 법칙, 그리고 신입들의 잦은 퇴사가 그들을 괴물로 만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악순환이 “태움” 문화를 만든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똑같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인자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주는 선배도 있겠지만 그건 그 선배가 선하게 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개인이 투쟁하지 않아도 되는, 개개인이 적당한 업무를 소화하며 사람에게 사람답게 굴 수 있는 업무 환경을 바라는 건 뜬 구름 잡는 환상일까요?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아라


애석하게도 능력제로의 신입사원에게 썩어빠진 시스템을 바꿀 힘은 없었습니다. 커피 머신을 닦지 않아서 단체 메신저로 저격을 당한 일이나, 스토리보드가 별로라는 이유로 회사 사람들 다 보는 데서 공개처형을 당한 일을 남들에게 얘기하면 그저 사회 경험 얼마 없는 신입의 신세한탄, 그 이상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았습니다. 첫 광고대행사에서 당한 태움이 잊히지가 않아 쓴 하이퍼 리얼리즘 소설 <롤모델>을 읽은 사람들도 ‘이런 정도는 누구나 다 겪는 일 아니야?’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꼭 사람들 앞에서 인격모독을 당하는 상처를 입어야만 성장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오히려 그런 기억들은 직급이 올라가도 상처로 남아서 이렇게 글로 생생하게 쓸 수 있을 정도인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바뀌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참여한 오디오 직무 OZIC 멘토 녹음. 04. JAN. 21


그래서 제가 바뀌기로 했습니다. 저도 독한 구석이 있는지 절대로 그 선배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4개월 동안 이빨이 닳아 없어지면 잇몸으로 살겠다는 깡으로 이 꽉 물고 개처럼 일한 결과 다음 회사에서는 일 잘하는 중고 신입으로 레벨 업 할 수 있었고, 다음 이직 때는 신입 시절을 벗어나 신입사원을 관리하는 사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처음 입사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는 게 얼마나 비참한 지, 전문 용어 섞어가며 업무 요청하는 선배들의 기대에 못 미치면 어떡하나 전전긍긍하는 시간이 얼마나 속 쓰린 지 알고 있기에, 제가 바로 그 일 못하고 싸바싸바 못하는 신입이었기 때문에 ‘다알랴줌’ 선배가 되고자 하는 중입니다.


다알랴줌 모드로 참여한 오디오 직무 OZIC 멘토 녹음.

궁금하신 신입 & 예비 카피라이터 분들을 위한 링크 https://bit.ly/3HxTWIh






사수가 최저임금 겨우 받는 신입에게 원하는 건 대단한 보고서나 일에 대한 책임이 아닙니다. 그런 건 짬 굵은 선배들의 몫입니다. 그렇다면 후배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아마 제일 중요한 건 스킬 보다도 일을 대하는 진심된 태도를 배우는 것일 겁니다. (적어도 전 제 후배들이 이것부터 몸에 익혔으면 합니다.) 레퍼런스를 하나 찾더라도 이게 어디에 쓰일 레퍼런스인지, 타겟은 누구인지, 문서로 어떻게 정리해야 설득력이 올라가는지, 그런 사소한 센스를 몸에 익히는 것. 그걸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도 사수는 만족할 겁니다.


마셰코에서 괜히 파채썰기 미션 같은 걸 시키는 게 아닙니다. 이미지 출처: <마스터 셰프 코리아 2> (Olive, 2013)


물론 이 모든 건 저 혼자만의 환상일 수 있습니다. 후배들은 저처럼 '일잘러'가 되는 데에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괜히 업무시간에 이것저것 알려주며 부담 주지 말고 내버려 두었으면 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제가 아니라 제 카드일 수도 있겠죠.


저 역시 시급 인생을 사는 사람인지라 후배들에게 매번 밥 사주고 웰컴 키트 만들어 줄 돈은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신입 시절이 제 신입 시절보다는 덜 고통스러웠으면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면 기꺼이 도울 의향이 있다는 거 하나만 기억해줬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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