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인생 21화-선배란
며칠 전 차장님과 단 둘이 밥을 먹었습니다. 입사한 지 반년이 지나가는데 처음 같이 밥을 먹는다니… 직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퇴사를 해 회사가 위기에 처한 지금, 용기를 내어 “차장님은 멘탈 괜찮으세요?”라고 물어봤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나도 멘탈 털려.” 그렇습니다. 선배님도 사람이었습니다.
직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거짓말이 늘어납니다. 슬프게도 후배들은 그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거짓말해야 하는 그 씁쓰레한 마음을 100% 깨닫진 못할 것입니다. 다들 본인이 안고 있는 문제가 가장 중대한 문제이며, 선배들은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노련함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선배들은 탈곡기에 탈탈 털리는 기분이 들어도 본인을 보고 있을 후배들을 위해 그렇지 않은 척해야 하고, 좋은 본보기가 되기 위해선 하기 싫은 티도, 긴장한 티도 내면 안 됩니다. 고민이 있어도 선배는 항상 고민을 들어주는 쪽이며 해결책을 제시하는 쪽입니다. 물론 선배들에게도 선배의 선배는 있습니다. 힘들면 그분들께 의지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면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첫인상이 끝까지 간다고, 우리가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을 대할 때 처음 만났을 때의 거리감으로 대하곤 합니다. 아무리 친해졌다고는 해도 그 벽을 허무는 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거, 다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냈을 때 거절당하면 선배도 상처를 받곤 합니다.
우리는 출근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상사 욕을 합니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팀장님은 전 회사 대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표님, 그 자리는 어찌 됐든 간에 욕먹는 자리예요.”라고.
상사가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그건 선배도 사람인데 후배들은 선배들이 뭔 슈퍼 히어로라도 되는 양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 또한 신입 시절, 선배들은 나보다 연봉도 높고 일한 시간도 더 긴데 당연히 어떤 문제든 척척박사처럼 해결해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선배가 실수하면 ‘내가 왜 저런 사람에게 업무 지시를 받아야 하지?’라는 앙큼 불여시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짧은 사회생활 기간 동안 이간질하는 선배, 무능력한 선배, 성희롱하는 선배, 책임 떠넘기는 선배, 지 잘난 맛에 취한 선배 등 별의별 별꼴 상사들을 만나온 사람으로서, 욕먹을 짓 하는 상사는 욕먹어도 싸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 특수한 케이스를 제외하면 선배들도 사람인지라 모르는 것도 많고 실수할 수도 있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본인도 지금 박봉이라 서러워 죽겠는데 나보다 돈 못 받으면서 심부름까지 도맡아 하는 후배에게 본인들 고민이 얼마나 티끌 같고 추상적으로 느껴질지 알기 때문에, 굳이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입니다.
티를 안 낸다고 노력했는데,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여 힘듦이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약한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보인 능력부족의 제게 돌아오는 따뜻함 덕분에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동료 한 명이 술이 벌겋게 오른 제 손을 꼭 잡고, 멀거니 바라보더니 “혼자 책임지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말이 참 따뜻해서 울었던 것 같은데 취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무지개가 떴으니 소원 빌라고 말해주는 또 다른 누군가의 말에 순두부 멘탈의 소유자인 전 힘을 내봅니다.
회사는 사람들끼리 부딪히는 곳이기 전, 업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해내야 하는 곳입니다. 과업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컨펌 라인’을 거쳐야 하고요. 컨펌 라인이 한 단계씩 올라가기 위해서는 피드백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저는 연차가 낮을수록 상사의 피드백을 기다리는 게 얼마나 피 말리는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상사에게도 피드백 시간은 고역입니다. 상사가 ‘컨펌’을 한다는 것은 그 일에 관한 책임권이 상사에게 넘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뭐라도 고치고 싶어 하는 게 컨펌해주는 사람의 심리입니다. 또 상사들도 신이 아니기 때문에 매번 단박에 깔끔한 피드백을 줄 순 없습니다. 네, 툭 까놓고 말해서 상사들도 이걸 어떻게 하면 모르기 때문에 피드백이 늦어지기도, 모호해지기도 합니다. 가끔 이걸 뜯어고칠 바에 본인이 야근을 해서 새로 일을 하는 쪽을 선택하는 상사들도 있고요. 후자의 경우 후배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방법임을 알기에 그리 추천하진 않지만… 진짜 급한 일이면 다들 퇴근하고 집중 빡해서 내 손으로 하는 게 낫습니다. 그래서 중간 관리자들이 가장 일 많이 한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 고요.
중간 관리자들도 야근하며 그날의 똥을 치우다 보면 현타가 옵니다. 이걸 이따위로 해서 던지고 퇴근한 후배들이 죽일 듯이 미워서 비어 있는 옆자리를 노려보지만 그런다고 뭔 일이 해결되겠습니까. 그럴 시간에 최소한의 공수로 최대 아웃풋을 낼 수 있는 방법을 계산해 일이나 합니다.
상사들이 후배를 바라보며 하는 고민은 두 가지입니다. 일에 관해서는 ‘이걸 어디까지 떠먹여 줘야 하나’, 관계에 관해서는 ‘내가 어디까지 잘해줘야 하나’라는 고민을 안고 출근합니다. 가끔 중간 관리자로서 회사 분위기도 잘 챙겨달라는 말을 들으면 보육원 선생님이 된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후배들 멘탈 관리도 선배들의 역할 중 하나 인걸요.
어디선가 읽은 글인데 상사가 후배들에게 해야 할 질문은 1. 밥은 먹었냐? 2. 문제가 있냐, 있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뭐냐? 이 두 가지라고 합니다. 과연 참된 선배의 모습을 압축한 질문이지만 저런 말을 해준 선배가 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지나가는 얼굴은 극소수입니다. 저라도 저런 질문을 많이 해주는 선배가 되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