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과수원
당시 그 곳에도 조금이라도 새로운 걸 해보려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대체로 가혹한 실패였다. 스스로 갖춰진 지식과 경험도 부족했고, 이들을 지원할 행정이나 기술지원 인프라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시절, 성공과 실패는 오롯이 개인의 능력과 성실에 좌우되었다.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해보려고 하지않는 것은 본능적으로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벼와 간단한 밭작물을 중심으로 한 기본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 상책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용기와 절실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녀와 아이가 서울살이를 하는 모습을 본 남편, 일단은 시골로 내려가서 사는게 나을 것이라는 남편의 말에 크게 반박하지 못한 채 끌려 내려온 그녀.. 트럭을 타고 내려오는 내내 두 사람은 침묵했으나, 마음은 단 한가지 심정으로 통하였을 것이다.
마을을 둘러싼 산의 절반은 남편의 일가들이 묘지터로 사용하려는 목적으로 공동으로 소유권을 갖고 있던 종종산이었다. 햇빛이 잘 드는 남쪽(마을을 감싼 면)은 묘지터로 나눠 사용하고, 해가 잘 들지 않는 재 너머 뒷편(마을에서 재를 넘어서야 볼 수 있는 북쪽면)은 말 그대로 노는 땅으로 놔두고 있었다. 북향의 땅이어서 햇빛이 드는 시간이 길지 않아 봄날 마지막까지 겨울눈이 남아있는 지역이었다. 재를 넘어서면서 산은 황토 흙산에서 검은 돌산으로 바뀌었다. 조그만 필지라도 가꾸어서 밭으로 만들려면 단단하게 웅크린 바위같은 돌덩이들을 하루 종일 치워내야 했다. 그런 땅이었기 때문에, 햇빛이 드는 농사터에서 땅을 장만하지 못하던 먼 당숙뻘 큰 아저씨네가 가까스로 열 평 남짓 터를 가꾸어 감자와 고구마를 겨우 심어 수확하는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이 햇빛이 따스한 들녘에서 일하는 동안 먼 당숙 큰 아저씨네는 홀로 재를 넘어 돌이 박힌 고구마와 감자를 캤다. 그런 땅이었기 때문에 젊은 부부가 그 곳에 과수를 심어보겠다고 했을 때 허락을 받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저 둘이서 또 쓸데없는 일을 벌인다고 수군대는 소리가 간혹 들리곤 했다. 그녀의 남편이 먼 당숙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허락을 구했을 때, 먼 당숙은 뭐하러 그 땅에 손을 대느냐고 말렸다.
‘느그 집 정도면 있는 논하고 밭 잘 가꾸어 먹으면 아무 문제없을 텐데, 뭐하러 재너머를 가꾸려 하느냐. 쉽지 않은 일이고 뼈가 다치는 일이다. 나야 햇빛 잘 드는 곳에는 지을 땅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재를 넘는다만, 니가 굳이 그럴 필요 있느냐?’ 먼 당숙은 탄식처럼 숨을 뱉으며 젊은 친척 동생을 말렸다.
‘햇빛이 드는 쪽은 집안에서 묘지터로 쓰셔야 하니 제가 함부로 지형을 바꾸거나 다른 것을 심을 수 없습니다. 논과 밭은 이미 논과 밭이어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가꾸고 있어서,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볼 수 없는 땅들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혹시나 허락을 받지 못할까 봐 최대한 예를 다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햇빛이 잘 드는 논과 밭을 잘 가꾸는 것만으로도 봄날, 여름날, 가을날 낮 길이는 짧을 것인데… 해도 잘 들지 않고 재를 넘어야 하는 곳에 터를 만들려면 얼마나 힘이 들 일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리 부부가 작심을 했다 하더라도, 자네 아버님이 농사일을 더 맡아 주셔야 가능한 일일 텐데, 너의 아버지도 이제 예전 같지 않아 보인다.’ 먼 당숙은 진심으로 이 젊은 부부와 젊은 부부의 시아버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특수작물을 하게 되면 나라에서 필요한 자금도 대출해준다고 하네요. 경운기, 트랙터 같은 기계를 장만하면 큰 일거리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과일을 거둬들일 때 손이 많이 필요할 텐데, 그때는 동네 분들 힘을 빌려야지요.’ 남편은 생각하고 있던 방안을 한두 가지 설명드렸고, 먼 당숙은 걱정스럽게 남편을 쳐다보았다.
남편은 군에서 진행하는 과수 관련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먼 동네 과수원을 찾아다니면서, 나름 견문을 쌓았다. 햇볕이 덜 비치는 북향 선산은 경운기가 오르락 내리기에는 상당히 가팔랐지만, 과수원을 해보기로 한 이상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남편은 한 겨울 내개 경운기를 온몸으로 끌다시피 하면서 북향 선산을 과수원터로 만들었다. 나무를 잘라내고 잡목들을 걷어냈다. 포크레인과 경운기에 달린 이앙기와 삽과 곡괭이로 층층 계단식 과수원 틀을 잡아나갔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동네 사람들이 평온한 겨울을 보내는 동안, 부부는 언 땅 위에서 흙과 나무뿌리와 바위 덩어리와 씨름했다. 사람들이 가을걷이 수확으로 살림을 키우는 동안, 부부는 그 수확에 농협 빚을 더해서 포크레인을 고용하고, 비료와 사과나무 종묘를 사들였다.
봄이 시작되기 전에 사과나무 접붙이기를 끝내야 했다. 2월이 막바지로 접어들 즈음, 500여 그루가 계단 식으로 자리 잡은 과수원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500여 개의 모수에 사과나무를 접목하는 날, 인근 마을에서 새로운 작물깨나 한다 하는 젊은 농사꾼들이 모여들었다. 제법 솜씨 있는 어떤 이는 접붙이기를 도왔고, 어떤 이는 과수터에 아직 남아 있는 돌덩이를 치워댔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산등성 위에 널찍한 터에 자리를 잡고 음식과 술을 차려냈다. 과수 농업은 4km 정도 떨어진 옆의 옆동네에서나 하는 것, 외지에서 공부깨나 하고 온 사람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은근히 부러움과 질투를 갖고 있었던 터라, 이 동네에서 비록 규모는 작지만 그럴싸한 과수원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 사람들은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면서, 대부분의 접붙이 나무에서 사과나무 줄기가 튼튼히 자리를 잡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모수는 검은 흙속으로 튼튼히 자리를 잡았고 모수 위의 사과나무가 모수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여름이 지나갔다. 초가을이 되고 과수에 앳된 사과 꽃이 필 무렵, 다시 과감하게 대부분의 잔가지를 쳐내고 꽃을 털어내어 더 과수를 튼튼히 하면서 내년을 준비해나갔다.
봄철 모내기가 끝나고서 남편은 대부분의 시간을 과수원에서 보냈다. 남겨진 들일, 여느 집 같으면 남자가 수행해야 하는 일들을 그녀는 군말 없이 해치웠다. 기술이 없고 지식이 없어서 과수원일을 직접 도울 방법은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남편이 들일 신경 안 쓰고 과수원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뿐이었다. 과수원이 잘될 수 있다면... 더한 노동도 견뎌낼 수 있었다.
모내기 이후 가장 중요하고 힘든 일은, 벼가 자리를 잡고 포기를 튼튼히 할 때까지 같이 자라는 잡초를 지속적으로 뽑아주는 일이었다. 잡초를 잘 뽑아야 벼가 튼실해지고 수확량이 온전할 수 있었다. 논의 잡초 상태를 보면 주인이 얼마나 성실한지, 농사를 잘 짓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어떤 논은 벼보다 피/잡초가 더 크고 많은 논도 있었는데, 그 논의 주인은 필시 주막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위인이곤 했다. 논의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끝없이 자라났다. 벼가 충분히 포기를 키우고, 볏 모가지가 자라 오르고 땅 아래로 휘어질 때까지 잡초뽑기는 계속되었다. 논의 잡초 뽑기야말로 시골 논농사의 본질과도 같았다. 이걸 할 수 있으면 논농사를 짓는 것이고 이걸 못하는 사람은 시골을 떠야 한다. 다른 농사일을 마치고 두 시간 정도 질퍽한 논을 헤집고 다녀야 두세 마지기 작업이 가능했다. 20번째 마지기를 마칠 때 즘이면 다시 첫 번째 마지기에서 잡초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른 집들은 부부가 둘이서 그나마 쉬엄쉬엄한 것을 그녀는 여름에서 가을 내내 혼자 진흙 논바닥을 기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벼 사이를 다람쥐 뛰어다니듯 한다고 했다.
처음 해보는 사람이 피하기 쉽지않은 몇 가지 실수가 겹쳐진 결과, 그들의 과수원은 실패하였다. 접붙이기 시작할 때는 근방의 과수원 전문가를 고용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나무가 커나가는 것을 확인하였으나 인건비가 만만치 않게 들었고 시간도 빠듯했다. 두 달이 지나서부터 남편은 자기가 가진 지식으로 나무를 가꾸고 매만져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나무가 잘못 자라는 과정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땅에 습기가 많았고, 거기에 비료를 많이 주어 나무는 웃자라기 시작했다. 땅이 적정하지 않았는데, 그 점을 간과한 것이 치명적이어서, 덜 영근 사과가 정상적인 시점보다 빨리 열렸다. 시장에 내다 팔 수 없는 것들이 열리고 땅에 떨어졌다. 사과나무 첫 4~5년은 느린 속도로 마른 땅에 뿌리를 굳게 내리고 주목이 튼튼해지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올 때 잔가지는 아/낌/없/이 쳐내어 기둥이 낮고 강하게 자라도록 해야 했다. 덜 성글게 자란 과실은 무조건 따서 버려야 했다.
웃 자란 사과나무에서 푸석한 사과가 열릴 때, 젊은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후로 2년 정도 접붙이기를 다시 해보고 아는 사람들의 조언도 따라보았지만, 애초에 잘못 길 든 과수에서 시장에 내다 팔만한 과실은 드물게 열렸다. 균질한 품질의 과실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야 중개상이나 도매상과 계약이 성사되는데, 수량과 품질 모두 불안정했다. 억울하고 분한 부부는 그런대로 괜찮은 과일을 직접 골라 오일장에 나가 팔아보기도 했다. 그러저럭 팔리기도 했으나, 그것으로 이미 크게 구멍 난 것을 메꾸기는 불가능하였다. 두 사람이 시장에 나가 있으면 과수원은 그 시간 동안 방치되어 더 망가졌다. 조그만 희망 하나라도 이어 나가기 위해, 햇빛이 드는 논밭과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과수원과 사람들이 떠들썩한 오일장 사이를 뛰다가 방황하다 주저앉았다.
...
사과나무 접붙이기를 한 지 5년째 되는 해, 가을 바슴이 끝난 다음 날, 부부는 톱과 낫을 들고 사과나무를 베어냈다. 서로 멀리 떨어져서 각자에게 주어진 나무를 베어나가는 중에, 남편은 가끔씩 작업을 멈췄다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남편의 눈물을 보았다고 느꼈다. 그리고, 한 그루라도 더 그녀의 손으로 정리해주려고 사력을 다했다. 5년 동안 키워 온 나무는 이틀 만에 땔감으로 변해 버리고, 천만 원 정도의 빚으로 남았다.
부부가 사과나무를 베어 나가는 모습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둘이서 아침일찍부터 시작해서 점심도 잊은 채 베어나갔다고,
지나는 사람들은 그 모습이 안타까워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잔가지를 묶어서 날라주었다고,
나무가 굵지않아 톱질 몇 번에 쉽게 넘어가더라고,
남자의 톱질보다 여자의 톱질이 더 빨랐다고,
500그루가 다 넘어질 때까지 부부는 한 번도 쉬지를 않았다고들 했다.
그녀가 시집 온 후 남편이 어떤 것에 집중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과수원 건이 처음이었다. 남편은 일반적인 농촌청년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매끈한 외모가 그의 방랑 기질, 논밭에 집중하지 못하는 기질을 부추겼다. 읍을 넘어 근방 부여, 군산까지 친구들이 닿아 있었다. 성격이 모질지 못하여 당장 이곳을 박차고 떠나거나, 집안일을 내팽개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머물러 서성거릴 뿐, 그는 항상 이 곳이 아닌 곳에 속해 있었다. 그런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민하고 준비하고 진행한 것이 사과나무 과수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완전하게 실패했다.
쓸데없는 짓을 하다가 빚만 잔뜩 진 상황인데.. 그녀는 그를 나무랄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게 이상했다. 오히려 그녀는 처음으로 그에 대한 믿음 혹은 같은 욕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동료애 비슷한 걸 느끼게 되었다. 사과나무를 심고 가꾸는 동안, 그는 놀라울 정도로 부지런했고, 즐겨하던 마실이나 술자리도 일절 하지 않았다. 사람이 독하게 변했다는 소문이 근방에 파다했다. 한 사람이 뒷산의 큰 모습을 바꿔나가는 걸, 그녀는 보았다. 3년간 그는 온전히 그의 일에 집중했고 그 모습은 그녀에겐 새로움이었고 미더움이었고 일종의 안타까움이었다.
그날 저녁, 주막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편을 업다시피 하여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사람들 말에 따르면 남편은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한 채, 그냥 쓰러진 것 같다고 했다. 부축하기 위해 잡은 남편의 손은 지난 5년 동안 거칠게 헤지고 단단해져 있었다. 엄지손톱은 닳고 닳아서 일반 사람 크기의 반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안보이던 주름이 보이고, 비교적 하얗던 피부는 누구보다 검게 그을렀다.
그 시절 시골마을은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 현재와 비교하면) 제법 흥청거렸다. 서천장이나 부여장에서는 TV에서나 볼 수 있는 도회지 의복을 갖춘 사람들이 적잖이 나타나 거리를 누볐고, 도시와 그 주변 공장으로 이전해서 삶의 터전을 이룬 자식들이 고향마을에 나타날 때는 좀 더 그럴듯하게 챙겨 입고 나타나 자신들이 풍요해지고 있음을 과하게 드러냈다. 얼굴에 바른 분이 두터워 여름날에는 땀과 섞여 흘러내렸다. 부여, 서천 정도 크기의 읍마을은 홀로 고립된 시골읍이 아닌, ‘성장하기 시작한’ 풍요로움이 모이는 끝자락의 역할을 '촌'스럽게 수행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와 공장으로 빠져나갔지만, 아직은 더 많은 사람들이 시골과 땅을 지키고 있었던 시절, 서천장과 부여장에는 3년 전 도회지로 떠난 점례와 아직 시골에 남아있는 순이가 만나 히히덕거렸다.
군 단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리 단위의 마을들은 고립된 ‘예전’의 그런 시골마을에 더 가까웠다. 사람들과 사람들의 생활을 전면적으로 바꾸기에는 TV를 포함한 미디어가 아직 영향력을 키우지 못하던 시기였다. 동네총각은 옆동네 처녀를 만나기 위해 더 먼 동네에 있는 비어있는 집을 수소문하여 밤마다 오토바이나 자전거로 내달리던 시절이었다.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는 것들은 넘치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것들이 자기가 그렇게 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삶이 바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축적된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이 지나자마자 마치 응축된 것이 폭발하듯 한꺼번에 모든 것은 변하기 시작했다.('모든' 것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기 시작한 것은 80년 중반부터였다.)
주막은 여전히 성인 남성들의 유일한 유흥의 장소였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주막은 주변의 논과 밭 일터로 막걸리를 배달하기에 바빴고, 추수가 끝나고 이듬해 이른 봄까지 그것은 일종의 사랑방이자, 살롱이자, 투전판으로 사람들이 끊길 새가 없었다. 보통 주막은 서너 개 테이블이 놓여있는 홀, 막걸리를 저장해놓은 커다란 술통, 간단히 요리를 내오는 부엌, 그리고 신을 벗고 들어서야 하는 폐쇄된 방으로 구성되고, 손님들은 홀에서 먹고 나오는 사람과 폐쇄된 방으로 들어가는 사람으로 구분되었다. 전자는 흔한 표현으로 건실하고 내실 있는 종자들이었고, 후자는 투전까지 곁들이는, 좀 논다 하는, 잘 나간다는, 내실없는 큰소리 에 익숙하고 말솜씨가 좋은 족속들이었다.
누가 방에서 나오는 걸 봤다더라.. 하는 것이 시골마을에 퍼지는 중요한 뉴스 중 하나였다. 평소에 성실하고 검소하고 자기 논바닥밖에 모를 줄 알았던 옆동네 뭐시기가 주막 방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소식은 한두 달 동안 마을을 건너 회자되었다. 그 뭐시기는 한동안 얼굴도 못 들고 다녔는데, 결국 섯다판 도박쟁이로 밝혀졌다.
마을(리)에는 수십 가구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마을(리)마다 제법 갖춰진 주막이 하나씩은 성업하였다. 동네 주막집을 어슬렁거리는 젊은 것들 중, 제일 문제가 되는 층은 자기 마을 주막을 벗어나 가끔씩 옆동네, 옆의 옆동네 주막까지 섭렵하는 층이었다. 유흥을 즐기는 측면에서, 자기 마을을 벗어나는 관계와 활동반경이 가장 넓은 측면에서 놀기도 잘 놀고 인맥도 두꺼운 층이었고, 어느 정도는 통제의 범위를 벗어나는 유흥의 행위까지 시도하는 층이었다.
사과나무를 베어내고 한동안 무기력하게 지내던 남편은 자연스럽게 이 부류에 합류하였다. 여전하던 그 부류들은 남편의 합류를 환영하였다. 예전에는 옆 마을 친구들이 끈덕지게 초대하면 가끔 마지못해 응하는 식이었는데, 이제는 적극적으로 서너 마을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과수원이 없어지고 나서 비어있는 시간과 상실감을 메꿀 방법이 딱히 없었을 것이다. 자정 넘어서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날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편이 그런 식으로 상실감 혹은 패배감을 달래는 동안, 그녀는 남편이 부재한 시간과 공간을 온몸으로 채워나갔다. 들녁에 채워야 할 노동과 주어진 시간은 지극히 불일치하여, 그녀는 시간 단위로 삶의 궤적을 메워 나갔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남자가 해야 할 일까지 포함하여 힘을 써야 하는 일들이 많았으므로 버거움은 배가되었다. 저녁에 들에서 집으로 들어올 때 소와 가축을 위해 지게 한 가득 싱싱한 들풀을 짊어지고 들어와야 하는 것은 응당 남자의 역할이었으나, 그녀가 (지게를) 지고 들어오는 일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차라리 가축을 내다 팔라고 했으나, 목표한 가격이 나올 때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들풀을 메고 들어올 때 아이는 남겨진 농기구를 질질 끌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여름날 논농사의 핵심은 비료 뿌려주기와 피(잡풀)뽑기와 농약치기이다. 20마지기 논에 비료 주기와 피뽑기와 농약치기를 3번 정도 하다 보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20번째 마지기에서 피를 뽑고 나면 다시 첫 번째 마지기 논에서 피는 무성해졌다. 피(잡풀)은 농부에게 한 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20kg들이 비료가방을 등에 멘 채 질퍽한 논바닥을 촘촘히 걸어 다녀야 하는 비료 뿌리기가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일이었다. 장정도 하루 중 반나절만 비료 뿌리기를 할 수 있었다. 농약 뿌리기는 작은 모터가 달린 농약통을 메고 농약을 분무하는 손잡이를 좌우로 휘저의며 논바닥을 걸어 다니는 행위이다.
보통 남자들이 비료와 농약을 뿌렸고, 여자들과 노인들이 피를 뽑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피뽑기와 비료뿌리기를 스스로 마무리 지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잡풀을 뽑으며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다람쥐 같다고 했고, 비료를 뿌리는 모습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농약은 뿌릴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꾼을 사용했는데, 시간만 맞았다면 농약 뿌리기까지 그녀 스스로 했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아침 설겆이를 마치면 간단히 새참거리를 준비하고 서둘러 들로 향했다. 그날 얻은 일꾼들에게 할 일을 알려주고, 자기 먼저 일에 돌입했다. 웬만한 장정 몫을 쉼 없이 해치우는 그녀 때문에 일꾼들도 쉼 없이 일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에서 일 나오면 두 배 이상을 해야한다며 사람들은 너스레를 떨었다. 새참 때에 맞춰 들로 나온 남편은, 해지기 전까지 그날 마쳐야 할 일을 간신히 끝내 놓고는 다시 주막으로 향했다. 이러한 날들이 2~3년 지속되었다.
남편은 그녀가 들판에서 모든 것을 건 것처럼 일하는 모습이 마땅치 않았다. 그것은 그가 벗어나고 싶었던 현실 자체였다. 그는 몇 번인가 당면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모든 실패의 과정에 그녀가 있었다.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이곳에 자신을 붙잡아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젊은 부부는 남들은 시도하지 않아서 해보지 못한 실패를 경험했고, 각자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경험과 상처는 두 사람을 더 가깝게 만들 수도 혹은 더 힘들게 만들 수도 있었는데, 불행히도 이들에겐 후자가 작동하였다. 남편은 그의 현실과 그녀를 등치하고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평생 자신과 가족만을 보고 살아온 그녀는 거기서 멈출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두 번 기대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흔들리고 상실감을 잔뜩 표출하는 상대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과수원 실패 후 2~3년 동안 젊은 부부는 그렇게 서로 구분된 삶을 살았다. 이 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었지만, 그 목표를 위해 뭔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