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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amoi Jun 23. 2021

다시 서울로 1

바람같았던 아이

시골학교에  등교를 하던 날부터 아이는 학교 전체에서 화젯거리였다. // 6개월 동안 서울물을 먹고 왔기 때문에 자신들과는 뭐가 달라도 달라 보인 것이다. 6개월 서울물 먹은 아이는 얼굴이 하앳고, 머리도 박박머리가 아닌 이발소에서  다듬은 상고머리를 하고 있었다.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검정 고무신을 신었고,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책가방이 아닌 책보따리를 메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남자아이들은 오른쪽 어깨와 왼편 겨드랑이 사이를 가로질러 매었고, 여자아이들은 허리에 둘러 매었다. 걸음걸음마다 필통에서 연필 부딪히는 소리가 장단을 맞췄다.


남편과 친구사이인 1반 선생님이 강력하게 주장하여 아이는 1반에 배정되었다. 그녀는 담임선생님께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드리고, 1교시가 시작되고 끝나는 것을 복도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교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이는 6개월 동안 금호동 골짜기 작고 어두운 방에서 묵묵히 혼자 지내던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제야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아온 듯 평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그곳에서 아이는 그저 참고 있었던 것이다.


시골에서 자랄 때부터 모든 사람들이 무서워하던 할아버지의 사랑을 혼자 받고 자랐고, 두 딸 이후로 갖게 된 사내아이여서 부모들의 관심과 애정이 알게 모르게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이가 짧게나마 서울생활을 하고 내려왔으니, 아이는 일절 구김살이 없었고 또래들 사이에서 항상 중심이었고 어른들 사이에서는 항상 최우선 순위이었다.


아이의 학교생활은 성적이나 활동면에서 많이 도드라졌다.  국민학교가 생긴 이래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학교가  경시대회에서 일등을 배출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이의 이런 성과는   해에 머물지 않고 국민학교 생활 내내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아이가 학교 공부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재빨리 숙제를 마치고 여느 아이들처럼 들로 산으로 시냇가로 하루 종일 온몸이 지치도록 뛰어다니는 아이 었다. 어떻게 저렇게 지치지 않고 뛰어다닐까 신기할 정도였다. 하루 종일 뛰어다닌 아이는 저녁을 먹자마자 잠이 든다. 아이는 학교 시험문제가 너무 쉽다고 했다. 선생님들이 말씀해주신 대로 답안을 선택하면 되는데 뭐가 어려운지 이해가  된다는 투였다.


아이가 그렇게 커나가는 걸 보며 그녀의 마음속에서 다시 새로운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가 더 큰 곳에서 공부하게 하려는 마음, 혹은 좀 더 문명화된 곳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보고 싶은 그녀 자신의 욕망이 아이를 통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욕구가 더 크고 본질적인 것인지 그녀는 잘 구분하지 못했다. 아이를 하루빨리 이 낙후된 곳에서 데리고 나가, 교육환경이 제대로 갖춰지고 좋은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곳에서 아이를 가르치고 싶었다. 그러면 그녀도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했다.


지난 6개월간의 서울생활로 인해 그런 마음은 헛된 것으로 치부되어 가슴속에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것은 잠시 침묵하고 있었을 뿐, 마음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더 크게 부화하고 있었다. 6개월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엄청난 양의 노동으로 짓눌려 있었던 것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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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집안 마루에 앉아 한가롭게 수선질을 하며 귀가하는 아이를 맞이 할 수 있었던 어느 날, 3학년이었던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온 오후 3시부터 그녀 곁에 머문 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동네 또래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마당으로 뛰쳐나가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순간, 그녀는 마침내 새로 시작하려는 마음이 지난날 실패의 두려움보다 커졌다는 것을 느끼고 작게 몸서리를 쳤다. 대문 밖에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작아질 때 그녀의 심장 고동소리는 점점 크게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아마 품앗이 일정이 잠시 흐트러졌던가 아니면 우연히 들에 있지 않아도 될 그런 날이었을 것이다. 햇빛은 마루 밑 토방까지 닿아, 마루 위는 햇볕이 들지 않으면서도 따사로웠다. 아이는 엄마 다리를 베고 누워 그날 학교에 갖고 갔던 책들을 꺼내 두루두루 눈으로 훑어 내렸다. 아이 나름의 복습 방식이었다. 그날따라 글자 하나하나가 눈에 쏙쏙 박힌다고 생각되었다.


풋사과 냄새 나는 바람이 마을 중턱 미루나무 숲을 지나 마을에서 제일 높은 집의 담벼락을 넘어 아이가 보고 있는 책과 옆에 놓인 책을 가볍게 건드리고, 아이의 얼굴 위를 스치듯 지나 뒤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아이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걸 보고, 이마 위에 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그녀의 손끝이 아이의 이마를 지나는 바람의 끝자락과 만났을 때, 아이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잠시 하늘거렸다.


아들은 그게 공부하는 건가? 그녀는 신기한 듯 아이에게 물었다.

'공부? 음..그냥 읽어보는 건데..'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데? 아이에게서 무슨 대답이 나올까 궁금하였다.

'응, 이렇게 읽고 있으면 오늘 학교에서 이거 배울 때 선생님이 했던 말, 애들이 떠들었던 말, 누가 질문했었는지 기억이 나. 그래서 그냥 한번 주욱 보는 거야.'

그러면? 무슨 대답이 나올까 궁금하여 재차 물었다.

'그러면?.. 그냥 안 잊어지는 거 같아. 음.. 여기 배울 때는 선생님이 굉장히 화를 내셨어 왜냐면 팔지에 사는 규자가 계속 책상을 달그락달그락했거든. 규자는 변소에 가고 싶었나 봐. 그리고 여기 배울 때는 경복이가 선생님한테 까불다가 혼났지. 하하'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이어가는 아이가 그녀는 신기했다. 아이에 대한 애정이 북 바쳐 오르는 걸 간신히 눌러내야 했다. '아들 뭐 좀 먹을까?'

'아냐. 오다가 석규가 누룽지 나눠줘서 먹고 왔어. 학교에서 먹는 걸 까먹어서 오다가 먹는 거래. 석규.. 웃기지?' 아이가 그날 배웠던 책들을 모두 훑어 내리는 데는 아주 짧은 시간만 필요했다.


아이가 읽기를 마치고 내일 시간표에 맞는 책으로 가방을 챙길 즈음, 밖에서 동네 또래들이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랫동네 아이들인 듯했다. 아이는 재빨리 책가방을 구석에 던져놓고, 토방으로 뛰어내려 마당을 지나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잘 훈련된 강아지 같았다. 한동안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속에서도 아이의 말소리와 웃음소리는 뚜렷했다.


저 아이를 어쩐다…저 아이를.


그녀 마음속에 새로운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덮쳐왔다. 일종의 조바심이었고, 아이와는 상관없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움튼, 그녀의 운명 같은 것이었다. 여느 집이었다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을, 도저히 그렇게, 목에 걸린 가시처럼, 넘기지 못하는 것은 오롯이 그녀의 삶, 그녀의 성격, 그녀의 조바심, 그녀의 욕심이었다. 근방에 혹은 좀 더 먼 근방에 자신의 아이만큼 재주 있는 애들은 없지 않았을 것이나, 그것을 조바심으로, 혹은 운명으로 마음 한편에 챙겨둔 것은 그녀가 유일했다. 그리고 조바심은 비 온 뒤에 초록으로 피어 올라오는 밭작물처럼 그녀의 마음을 순식간에, 강력하게, 일관되게 지배했다. 초록 같은 희망 외에 다른 이물질은 없었다.


다만 그녀는 원인을 알기 어려운 약간의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이미 6개월의 서울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게 어떤 질감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시골 농사에 비하면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조금 더 일하면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낯선 환경이나 사람들을 가리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곳에 가야 할 이유, 그들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다면 거침이 없는 스타일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그녀를 망설이게 한 두려움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그녀는 그 막연한 두려움의 정체와 원인을 스스로 정의하지 못하였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그녀는 그때 느꼈던 두려움이 땅과 농사를 떠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고,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녀가 경험한 6개월간의 서울살이(벌고 먹고사는 문제)는 그전까지 행해 온 것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땅은 그녀가 더 일한 만큼, 더 많이 확보한 만큼, 더 많이 심고 더 많이 가꾸고 보살피는 만큼, 숨김없이 속임없이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희열이었다. 한번 더 들에 나가 잡초를 뽑고, 물을 대주고, 한번 더 나가 거름을 주면, 가을걷이의 무게는 정직하게 달라졌다. 그녀는 초여름 논과 밭의 상태를 보고, 어느 것이 부지런한 자의 것인지 정확히 분별할 수 있었다. 그녀의 논과 밭에는 틈이 없어 여름은 일관되게 초록이 깊었고 가을은 강건하고 묵직했다. 근방에서 누가 봐도 그녀의 논과 밭은 구분이 가능했다. 그녀의 논과 밭에는 빈틈이 없었다.


그녀의 농사짓는 재주가 남달라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번 더 나가 손길과 눈길을 주면, 땅과 작물은 솔직하게 되갚아준다는 것을 철저히 믿고 따랐을 뿐이다. 그녀는 자식 키우듯 농사를 지었다. 그것이 그녀가 일한다는 것의 의미였다.


서울에서는 노력의 크기나 진정성에 상관없이 돌려받을 수 있는 대가가 미리 정해져 있었는데, 그녀는 그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좀 일찍 나가건 좀 늦게 나가건, 식당에서 어느 정도 일을 신속히 처리하건 안하건.. 대가는 늘 일정했다. 그런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막상 그 구조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보니, 그것은 그녀가 수긍할 만한 어떤 합리적인 체계이거나 구조가 아니었다. 그녀를 고용한 사장은 항상 어느 정도 수준보다 더 열심히 일해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그가 지급하기로 한 대가와 추가하는 주문이 어느 정도 형평 한지는 잘 고민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그녀가 지급받을 댓가와 수행해야 일의 양을 가늠할 수 있었으나, 사장이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할 때 그것을 거부할 만한 이유도 딱히 찾기 어려웠다. 한두 번의 주문을 거부한다고 해서 고정된 대가를 위해 하루 14시간, 1년 360일 꼬박 근무해야 하는 상황이 크게 나아질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30년 동안 그녀가 봐오고 그녀가 살아온 삶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가 살아온 삶은 내가 바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다해 땅을 가꾸면 땅은 정직한 크기의 대가를 돌려준다는 것이었다. 넉넉하진 않더라도, 그런대로 먹고 살만하며 해마다 조금씩 그 터를 넓혀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가 봐 온 아버지가 그런 삶을 살아왔고, 시집을 온 이후 그녀도 아버지의 삶에서 한 치의 벗어남도 없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살랑이는 바람처럼 자신 곁에 머물다 간 아이를 생각한다. 아이를 위해 어떤 것을 해야한다는 의지(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가 두려움과 맞서고 있었으나, 조만간 자신의 의지가 두려움을 이겨낼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대전에서 부임해온 담임선생은 아이의 4학년 학기말고사 시험지 채점을 마치고, 교무실을 나와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시골학교 운동장을 천천히 걸었다. 짧은 가을 해가 팔지마을 뒷산으로 넘어갈 때 가을햇빛 색깔을 닮은 플라타너스 나뭇잎들이 얼기설기 학교 운동장에 내려 앉았다. 담임선생은 발로 나뭇잎을 밟기도 하고 치우기도 하면서 천천히 운동장 끄트머리를 따라 걸었다. 운동장 너머, 제법 넓게, 지산리 사람들의 터전이 눈에 들어왔다. 가을걷이가 마무리된 들판은 휑하니 비어 있어서 어둠은 그곳으로 더 빠르게 접근하였다.


아이가 제출한 모든 과목의 시험지에서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지난 중간고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이는 2학기 모든 시험에서 단 하나도 틀린 답을 내어놓지 않았다. 자신이 맡은 과목뿐 아니라 다른 선생님이 출제한 과목의 시험지들을 훑어봤지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대부분 도 단위에서 출제하고 관리하는 문제들을 이용하는 것이어서 난이도 측면에서 큰 문제는 없었다. 아이의 부모가 어떤 사람들인지 대략은 알고 있었다. 1학년 때 잠시 서울생활을 한 것 빼고는 일반 농사꾼들이었다. 


담임선생은 이 아이가 서울 아이들과 공부하더라도 뒤지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아이가 더 많은 아이들과 경쟁하면서 좀 더 열심히 할 수 있다면 서울의 좋은 대학교에 진학해서 (말하자면) 보다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으나, 자신의 생각을 부모에게 전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모른 척 지나칠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의 전언대로 부모가 아이의 서울행을 선택한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순탄치 않은 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엄마, 이거 통지표' 


며칠 후 그녀는 아이로부터 기말고사 성적표를 전달받았다. 엄마 손에 통지표를 건넨 아이는 여느 날처럼,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대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통지표는 옆으로 긴 종이가 반으로 접힌 형태였고, 접힌 것을 펴면 왼쪽엔 과목별 성적이, 오른쪽엔 선생님들의 평가의견이나 기타 활동들이, 적혀있었다. 하나의 숫자로 일관되게 채워진 성적란은 약간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담임 선생님을 한번 만나봐야겠네. 대전에서 오신 분이라고 하는데...' 그녀와 남편은 정확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많은 학생들 만나고 가르쳤으니까, 아이의 수준이나 진로에 대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담임에겐 남편이 연락하여 인사를 드리고 약속을 잡았다.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부모가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 차라리 잘 되었다는 심정으로, 아이를 서울에서 공부시켜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단순한 제안을 넘어서, 자신의 의지를 담아 격정적으로 토로하였다. '이런 애는 못 봤다, 대전에서도 충분히 일등 한다, 지금부터 잘하는 아이들하고 같이 공부하기 시작해야 한다. 중학교 때 가면 늦다. 여기서 그냥 보내기는 아깝다.'  등등... 자신에게 어떤 미션이 주어진 듯, 아이로 인해 대전에서 이곳으로 밀려나듯 부임하여 우울하게 보냈던 지난 몇 개월을 정리하고 이제부터 열과 성을 다하여 이 시골학교에서 살아볼 결심을 한 것처럼, 시골 사는 젊은 부부에게 다른 생각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것 처럼.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이번에는 기본적인 준비를 하였다. 아이가 4학년을 마치던 해, 가을걷이가 끝나자마자, 그동안 모아둔 것과 그해 수매한 돈을 합쳐서 그녀가 먼저 서울로 향했다. 아이와 함께 머물 셋방과 살림살이를 준비해두고, 겨우내 그래도 작은 월급이라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담임선생의 격정적인 제안이 있기 전에 이미 부부는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날의 미팅은 기폭제로서 성공적이었다. 교감실에서 진행된 미팅은 한 시간 정도 이어졌는데, 대부분 담임선생이 말하고 설명하였고, 부부는 조용히 듣고 확인하고 결심하는 시간이었다. 부부의 조바심에 담임선생의 의지가 더해져, 부부에게 남아있던 일말의 두려움을 넘어서게 했다. 어느 정도 허영심도 자극했을 것이다. 조금 지나면 늦는다는 선생의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 효과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시부모님들은 그녀의 결정을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이들이 서울에서 어떤 삶을 살 거라는 걸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자신을 빼닮은 손자를 그 삶으로 보내는 건, 60 평생을 올곧은 노동만으로 이 정도 살림을 축적해온 시아버지로서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열심히 자기 노동을 하면 세상은 성과를 돌려준다는 법칙을 삶을 통해 확인한 그였으므로, 도시 삶인가 농촌 삶인가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닮은 피붙이를 가능한 긴 시간 동안 곁에 두고 자신이 거두어 먹일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이었다. 


“무엇을 위해 떠나는 것이냐? 굳이 떠나야 하냐? 외지에 나가면 고생이다…” 시아버지는 부탁하듯이 그녀에게 말하였다.


“세상이 벼농사 말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쟤들이 컷을 때는 더 그럴 것입니다. 아이가 재주가 있다고 소문도 자자하고… 아이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작지만 단호하게 의지를 전달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편히 등을 붙일 방 한 칸도 변변하지 않지 않느냐, 너희들은 돈 벌 일이 바쁠 터이니, 객지에서 아이는 누가 건사를 하느냐?”시아버지의 많은 걱정은 아이에 대한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서울에 이미 제 형제들이 살고 있고, 고모도 있고, 그동안 모은 것으로 괜찮은 방도 구했습니다.”


“너희들 둘이 여기서 더 열심히 일하면 그럭저럭 먹기 살기는 부족하지 않을 텐데… 서울 가서 시간 보내고 자리 못 잡으면 너희에겐 다시 일어설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 자리를 잡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많이 흔들렸다. 다른 무엇보다 그녀가 남겨두고 가야 할 일거리들, 들판의 곡식들, 뒷산의 밤나무, 밭의 채소들이 마음속에 가득했다. 그렇지만 남편을 믿고 맡겨두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잔손 부지런함이 없는 남편이어서 걱정은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여길 떠나지 않으면 아이는 영원히 이곳을 떠날 수 없게 됩니다.” 


"…" 


서울 길로 나서는 이유가 아이에 이르자 시아버지의 언성에도 힘이 빠졌다. 그도 아이의 재주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그때마다 주막에 있는 사람들한테 막걸리 한 통씩 돌리곤 했었다.


동네 근방에서 목소리깨나 높이는 아줌마들의 심경도 복잡했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아이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 과감히 시골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간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부러움과 회의가 섞여, 한동안 두 사람이 모이면 그녀의 서울살이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들이 오갔다. 분명한 건 이들이 약간은 소외 혹은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사계절 대부분 시간 동안 땅 위에서 흙과 함께 같이 살아오고 살아갈 같은 운명이 아닌 것이다. 이제 그녀는 흙이 없는 곳으로 떠나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산다고 하니 그 용기가 부럽고, 남아있는 것이 좀 뒤처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수를 소외시키는 현상 비슷한 게 발생했다. 


모든 걸 뒤로하고 그녀는 홀로 서울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첫 서울 생활을 시작하고 내려온 지 4년 만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아이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겠다는 생각에만 집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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