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를 갖다
서울에 도착해서 일주일은 언니 집에서 기거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곳은 서울이 아니고 과천 어디쯤이었다. 언니는 예전 통이 컸던 계가 파산할 때 같이 파산한 상태가 되었고, 이후 시골살이에 진절머리가 난 언니를 위해 남편은 온갖 궁리를 다하여 안양 근처 학교로 전근할 수 있었다. 깡시골에서 안양정도 되는 도회지로 전근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집요하게 신청하고 알음알음 부탁한 결과였다.
막내동생을 맞는 언니의 심경은 복잡했다. 자신 때문에 젊은 날 큰 돈을 잃게 된 것에 대한 엄청난 부채감과 미안함, 막내에 대한 한없는 애정이 한쪽이었고, 그녀 스스로 풍족하지 않은 살림에 직접적이진 않지만 가까운 곳에 혈혈단신 상경한 동생을 두고 살아야 하는 부담감이 작지 않았다. 국민학교 교사의 월급으로 6남매를 키우고 나이 드신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상황에선 더욱 그러했다.
그녀는 언니의 그 심경과 사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너무나 명확히 짐작하고 이해한 것이어서 마치 움직임이 없는 바위같이 굳건한 사실처럼 인지되었다. 언니의 상황에 대한 바위같은 이해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최대한 빨리 독립하여 나갈 수 있는 방을 확/정/하기 위하여, 일주일 동안 발이 부르트도록 과천 주변, 남태령 고개를 넘어 사당동까지 부지런히 방을 보러 다녔다. 과천은 집값이 싸고 깨끗한 방들이 한두 개 있었으나, 언니 집에서 너무 가까워 애초에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세째날부터 남태령을 넘어가는 버스를 타고 사당동 근처를 더듬고 다녔다. 예산에 여유가 있으면 좀 더 쉽게 끝날 수 있는 것을, 작은 예산으로 조금이라도 나은 방을 구하기 위해 처절하게 걷고 또 걸었다. 4년 전 6개월 동안 살았던 그 방은 그녀의 머리와 가슴속에 아직도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골목길 밑으로난 하수구를 흘러내리는 물 냄새, 물소리, 건물들 사이에 막혀 사람 냄새와 연탄가스 냄새 비슷한 게 혼합된 채 텁텁하게 눌러앉은 공기, 늘 일정량의 습기를 머금은 바람, 문 없이 어둡고 습한 방,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그 방 안에서 혼자 자고 있던 아이, 간이식식 벽으로 지어진 부엌, 누우면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한 골목길을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 조금이라도 그 기억과는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이 단순하고도 명확한 목표였다.
사당동 근처의 한 부동산에서 9번째 방을 보러 나가자 했을 때, 안내하는 사람이 바뀌었다.
'아줌마, 그 예산으로는 다 거기서 거기에요.'
'예. 알고 있습니다. 한 군데만 더 가보죠'
'다리 아프지도 않소?'
'저는 괜찮습니다. 너무 많이 부탁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짜증을 내거나 혀를 찰 수는 없었는지, 바뀐 안내하는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녀 앞에서 걸으며 9번째 방으로 향했다.
'어디서 오는 거래요?'
'충남이에요. 서천'
'시골에서 오시는구만. 이번에 가는 데가 다른 곳에 비해 조금 비싼 편인데, 언덕길 위에 있어서 햇볕도 잘 들고 바람도 잘 통하고 괜찮을 거예요'
'네, 고맙습니다.'
9번째 방은 순서가 9번째 답게 부동산 사무실이 위치한 곳에서 상당히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그녀와 직원은 한참을 걸어야 했다. 사거리에 위치한 부동산에서 출발하여, 낮에도 아가씨들이 가게 앞에 나와 담배를 피워 물고 호객을 하는 좁다란 골목을 지나쳐 넓어진 대로로 나오니, 거기가 남성시장 입구라고 직원이 알려주었다. 남성시장 입구는 4년 전 그녀가 잠시 머물렀던 금호동 그 시장과 전체적으로 비슷했는데, 가게와 노점들이 들어선 도로의 폭이 더 넓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파라솔을 펼칠 정도로 규모가 있는 노점상들이 대로를 따라 길게 이어졌고, 파라솔과 파라솔을 따라 좁아진 도로 가운데로 사람들은 어깨를 부딪히며 걸었는데, 시선들은 거리와 노점의 물건들로 가 있어서 서로가 개의치 않는 듯 가볍게 걷는 게 익숙한 듯했다. 시장 입구 방향으로 좀 걸어 나가자 오른쪽으로 벗어나는 넓은 길을 만나 한참을 걸어올라 가자, 시장통의 분주하고 번잡한 기운이 점차 사라진 곳에 넓은 사거리가 나타났다. 사거리 한 귀퉁이를 정원이 넓은 집의 커다란 대문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지역 국회의원의 집이라고 직원이 귀띔을 해주었다. 집주인의 마음씨가 좋았던가... 엄청나게 넓은 대문 입구는 잘 다듬어진 콘크리트로 덮여 있어서, 아이들이 팽이치기를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는지, 그날따라 그 동네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나와 팽이를 치는 듯했다.
사거리에서 서쪽으로 사당동 고개를 넘어가는 오르막길로 접어들자, 사거리에서 본 아이들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오르막길에서 놀고 있었다. 9번째 방을 갖고 있던 집은 오르막길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집이었다. 길에서 왼쪽 비탈길을 따라 놓인 계단을 10개 정도 오른 곳에, 마당이 넓었고 담장 너머 한참 밑으로 올라온 길이 있어서 저 건너편 이수마을에서부터 바람이 쉼 없이 불어왔다 나가는 집이었다. 비록 부엌이 방과 떨어져 마당 건너편에 간이로 만든 것이 아쉬웠지만, 계단을 올라 대문으로 들어서자 담너머 저 편에서 살짝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를 살짝 지나쳤을때, 그녀는 마음의 결정을 하고 있었다. 어딘가 약해 보이는 고운 얼굴을 한 주인아주머니는 분주하게 부엌과 방과 마당과 마당 너머를 샅샅이 살피는 그녀가 왠지 갓 잡아 올린 생선 같다고 생각했다. 몸이 가볍고 에너지가 넘치는, 새로운 물은 만난 더 팔팔해진,.. 생경했지만, 생경한 것이 주는 그 에너지가 맘에 들었다.
집(방)을 구하고, 다음 날 바로 짐을 옮기고 나서 그녀는 식당 일자리를 알아보고 다녔다. 남편과 상의한대로 선술집, 포장마차 형태의 식당 위주로 주방일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녔고,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신림동 근처에서 적당한 자리를 발견하고, 곧바로 방문하고 만날 일정을 잡았다. 선술집 해볼 요량을 댄 것은 그녀와 남편이 협의한 결과였다. (여러가지 지독한 실패를 거치면서 부부는 비로소 서로 상의하여 서로 동의하는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일반식당과는 달리 크게 주인/주방의 손맛에 좌우되지 않아, 쉽게 시작할 수 있다고 여겼다. 특히 많은 날들을 근방의 선술집을 떠돌아 다녔기 때문일까? 남편은 나름 스스로 선술집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잘 알고 있다고 느꼈다.
식당은 사거리 모퉁이 뒷골목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아담하고 장식이 소박하여 인상이 나쁘지 않은 집이었다. 좌우로 밀고 당기는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소담한 크기의 내부를 은은한 회색 벽이 감싸고 있었고, 사람의 허리 높이로 오래된 소나무 목재가 박혀있듯 자리하고 있었다. 홀 한가운데는 약간 높아서 천정 높이 매달린 백열등이 제법 운치를 더할 수준으로 매달려 있었고, 미닫이 문 반대쪽으로 적당한 크기의 소나무 창틀이 나 있었다. (환기를 고려한 창문 배치도 그럴듯하였다.) 일본식 미닫이 문이 붙어있을 정도로 오래된 집이지만 그 낡음이 썩 어울렸다.
구인광고를 보고 무작정 찾아갔을 때는 바쁜 점심시간이어서 사장을 볼 수 없다가,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빈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을 수 있었다. 인터뷰는 간단했다. 사장은 말투로는 고향을 구분하기 어려워 서울 사람이 아닌가 싶었으나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이 가게가 맘에 쏙 들어버렸다. 3일 전에 주방에서 일하던 아줌마가 갑자기 병이 나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다음 날부터 그녀는 출근하기 시작하여 선술집과 관련된 모든 것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 사장이 나오라고 한 시각보다 두 시간 일찍 나가 홀 청소부터 하기 시작했다. 홀에 떨어진 모든 것을 깨끗이 치우고 마음에 들 때까지 테이블과 의자의 위치를 정돈한 후, 부엌으로 들어가 그날 사용될 그릇들이 제대로 자리 잡고 있는지 꼼꼼히 체크했다. 음식을 만들고, 계산하는 일은 사장의 역할이었고, 그녀는 주로 홀에 음식을 나르고 거두고 닦고 다시 차리고 나르는 일을 했다. 주방이 급해지면 주방일도 서슴지 않았다. 좁은 홀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면 제법 많은 양의 그릇들이 나가고 정리되고 치워지곤 하였다. 육체적으로 고단할 것은 없었다. 사람들이 들어오고 한 테이블이 채워지고 비워지는 모든 과정을 꼼꼼히 눈과 몸으로 기억해 나갔다.
홀에 관한 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사장이자 주방장이 만드는 요리를 스스로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선술집의 메뉴가 그리 특이할 것이 없었듯이 사장이 만드는 음식을 만드는 방법에도 그리 특이할 만한 것은 찾기 힘들었다. 조개류, 갑각류의 해산물을 데쳐서 달짝지근한 초고추장과 몇 가지 비린 맛을 잡아주는 야채와 함께 내는 것, 어묵 찌개/조개탕/된장찌개/김치찌개 같은 간단한 찌개류, 계란말이, 돼지고기 불고기, 소/돼지 특수부위 등을 잘 다듬어서 기름장이나 소금장과 함께 내놓는 것 등이 주종이었다. '특별한 레시피보다는 재료를 좀 더 싼 가격에 좀 더 신선한 것으로 준비하고 청결하게 내놓는 것' 정도는 자신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다.
따라서 이 가게가 손님을 유지하는 핵심은 안에서 준비한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가게가 놓인 위치였다. 4개의 버스 정거장 덕분에 가게에 근접한 거리에는 사람들이 항상 붐볐다. 뒷골목에 위치했지만 그리 깊이 숨지 않은 위치, 부담 없는 가격 덕분인지 저녁나절부터 새벽 한두 시까지 6개의 원 테이블을 두고 영업하는 식당은 거의 빈자리가 없었다. 규모는 작았고 단가는 높지 않았기 때문에 떼돈을 버는 곳은 아니었지만, 성실하게 꾸준히 영업하면 한 집 식구 앞가림하기에는 큰 부족함이 없었고, 생전 처음으로 장사해서 돈 벌어 보겠다는 부부에게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딱 적당한 규모였다.
2년 정도 선술집을 포함해서 음식점 일을 어느 정도 경험해보고 자신들의 가게를 운영하는 게 부부의 계획이었는데, 10개월 후 그런 뜻을 내비치자, 뜻밖에도 가게의 주인이, 이 가게를 맡아서 해볼 생각 없냐는 제안을 해왔다. 두 달 정도 같이 운영하는 기간을 거치고 잔금을 치르고 나서, 시골에서 올라온 부부는 본격적으로 도시에서 선술집이라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가게를 하는 동안 그나마 그들은 서울이라는 낯선 곳에서 방 두 칸, 부엌 한편 달린 초라한 살림이었지만 오붓한 한 가정을 이뤘다. 시골에서 그녀의 남편이 올라와 서울생활에 합류했다. 시골이 아닌 곳에서, 조부모가 없는 곳에서 온전히 그들만의 가정을 꾸리는 경험은 아주 첫 경험이자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독립된 삶을 살게 되었구나, 내가 내 새끼들을 데리고 사는구나, 내 노동이 시부모가 관리하는 전체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부족하더라도 내가 번 것으로 내 새끼들을 꾸려나가기 시작했구나… 하는 걸 느끼고 뿌듯했다. 그래 이런 게 사는 것이지 했다. 이제야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많은 게 부족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메꿔지면 괜찮아질 것들, 사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그들 손에 쥐어지기 시작했다. 가끔 과부들이 들락거리는 주막을 들락거리는 남편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에겐 사는 이유와 목적이 된 아이들이 건너편 방에 잠들어 있다. 숨 막히는 시부모들의 눈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공중에 흩어지는 노동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로서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지만, 언제든 내 노동을 마음껏 투입할 수 있는 삶의 터가 마련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하루아침에 언니들이 사라지고 낯선 사람들이 고향집을 차지한 후, 자신도 쫒기듯 시집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녀의 삶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궤도를 어긋난 채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삶이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길로 들어섰구나.' 그녀는 비로소 그렇게 느꼈다.
새벽 2시에 가게 문을 닫고, 정리하고 들어오면 새벽 3시였다. 아이들은 잠들어 있다. 아들의 머리맡에는 내일 학교에 갖고 갈 가방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학교 수업이나 공부에 관한 한 그녀가 신경 쓸 일은 없었다. 그거 하나만으로 그녀의 삶은 살아지는 것이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그 전날 가게에서 남은 것들로 아침과 도시락을 준비하는 걸로 다시 하루를 시작했다. 잠이 좀 부족하다고 느꼈지만 피곤한 건 없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안 정리를 마치고 나면, 그날 장사를 위한 장보기를 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했다. 이 생활이 안정적으로 길게 지속될 수 있다면,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지면, 좀 어엿한 전셋집으로 이사를 가고, 좀 더 나아지면 크진 않지만 작은 집이라고 구할 수 있겠다는 크지 않은 욕심이 부지불식간에 자리를 잡았다.
가게를 시작하고 나서 세 달째 접어들었을 때, 가족은 외식을 했다. 그것은 서울살이를 시작한 이들이 처음하는 외식이었다. 한 달에 한번 가게문을 닫기로 한 월요일, 저녁 즈음이 되었을 때 부부는 아이에게 외식하러 나간다고 했고, 아이는 어리둥절했다. 외식이라는 단어가 처음에 쉽게 귀로 들어오지 않아, ‘외식?’이라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외식이란 게 가난한 서민에게는 그리 간단치 않은 이벤트였다. 우선 가족 모두가 일하지 않아도 되는, 각자가 할 일을 잠시 멈추고 비어 있는 시간이 존재해야 하고, 그 특정 시간 동안은 정해진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 것으로 참여자 모두가 동의하여야 한다. 그다음으로는 불필요하게 비용을 지불하고 소비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했다. 집에서 아무 비용 없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식사인데, 비용을 들여 전문식당에서 해결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 일이었고, 여유가 부족할 땐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 그동안 일하지 않아도 마음 편한 시간 같은 것은 그들에겐 일절 없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노점상을 하면서도 돈 한 푼이 아까워 음료수 한 병 사 먹지 않았던 그녀였다. 점심값을 줄이기 위해 집에서 간단하게 주먹밥 비슷한 것을 준비해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했다. 초겨울에 그 주먹밥을 먹을 땐 이가 시렸다. 시골을 다녀갈 때, 왕복 10시간을 오가는 그 길에 그녀가 지출한 것은 오로지 차표 구입뿐이었다. 그녀의 밥상에서 남아서 버려지는 것은 그야말로 쌀 한 톨, 콩 한 톨도 없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넣어 비비서 먹었고, 누룽지는 숭늉으로 들이켰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가족을 위한 모든 식사에 관여하였다. 어떤 식사도 자신이 자신의 몸과 손을 놀려 만들지 않은 것은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건 가족을 위해서건 그녀는 하루 세끼를 자신의 몸을 이용해 음식과 밥을 만들어내었고 자신은 그 부산물을 먹었다.
외식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앉아 있고, 음식은 만들어져 제공된다. 스스로 아무런 노동을 투입하지 않았는데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그녀는 약간의 이질감 혹은 어색함을 느꼈다. 외식을 하기로 결심했을 때, 시간과 비용의 부담을 극복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심리적인 이질감을 모른 척하는 것도 힘들었다. 집에서 먹으면 될 일을, 그녀가 식당에서 일할 때 하루 일당으로 계산되었던 금액이 세 명이 식당에서 외식하기 위한 비용으로 지불되었다. 그녀는 그것을 도무지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집에서 먹으면 되는 것을, 자신의 하루 일당을 투입해서 그리 잘난 것도 없는 식당 식사를 용납하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80이 된 지금도 외식 나가기를 꺼려하고, 그것 때문에 자식들과 그녀는 항상 다투고 감정을 상한다.)
부부와 아이는 다른 이유가 아닌 외식을 위해 문을 나섰다. 아이는 벌써 신이 난 모습이었다. 혼자 저만큼 달려 나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엄마 아빠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뒤로 돌아와 엄마 아빠 사이에 서서 걷다가 다시 뛰쳐나가기를 반복하였다. 그녀는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다시 돌아가 저녁상을 차리고 싶은 심정을 억지로 눌러대며 걸었다. 그녀의 눈엔 오로지 저만치 뛰어나가는 아이의 뒷모습만 가득히 들어찼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보다 한 발 앞서서 걸음걸이를 옮겼다. 아이는 자신의 뒤에서 엄마와 아빠가 동시에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확인하면서 내달리기를 반복했다.
시장통에 다다랐을 때, 막상 어느 음식점을 들어가야 할지 부부는 잠시 망 설지만, 이내 시장통 출입구 옆에 위치한 오래된 중국집으로 정하고 발길을 옮겼다. 아이들한테 가격 대비 만족감을 주기에는 중국집 짜장면 만한 게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오래된 중국집은 근방에서 가격이나 맛이 좋기로 꽤나 알려진 집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집들은 한번 정도 들르는 음식점이었다.
자리를 잡자마자, 종업원이 따듯한 보리차 세 잔을 내오고 주문을 기다리듯 잠시 기다리다가 다른 볼 일을 보러 돌아갔다.
잠시 후 종업원이 다시 다가와 '뭐 드실래요?' 하고 물었을 때, 더 이상 종업원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쫓기듯 짬뽕과 짜장면 두 그릇과 중짜 탕수육 하나를 시켰다. 남편이 소주 한 병을 시키려고 했지만 그녀의 눈치에 그만두었다. 가게에서 사다가 집에서 먹으면 되는 것을 뭐하러 여기서 비싸게 주고 먹으려고 하느냐는 눈짓이 너무 거세었다.
음식을 시키고 나서 그들의 테이블은 침묵했다. 그녀는 괜스레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에 마음이 무거웠고, 남편은 그런 그녀가 못마땅했고, 아이는 그런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 간에 가장 진솔하고 편한 얘기가 오고 가는 시간, 나올 음식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설레는 시간이 주어졌으나, 그들은 그 시간을 온전한 용도로 활용하지 못했다.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이 음식과 술로 흥겹게 웃고 떠드는 사이에서, 그들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아이는 처음으로 엄마 아빠가 사주는 짜장면이 빨리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보이지 않게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그 가족을 보다 못했는지, 아니면 밀린 주문 때문에 음식을 내오는 시간이 늦어진 것이 좀 미안했던지, 식당 주인아주머니는 잘 튀겨진 군만두를 공짜로 내어왔다. 그녀는 형편과 속내를 들킨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각자가 엉겁결에 생긴 군만두를 먹는 동안 종업원이 주문한 음식을 날아왔다. 남편 앞에 푸짐한 짬뽕이 놓이고, 그녀와 아이 앞에 윤기 있는 소스가 가득한 짜장면이 놓였다. 테이블 가운데에 중짜로 보기 어려운 탕수육 접시와 간장을 나눠 담을 수 있는 작은 종지가 놓였다. 아이는 어느새인가 어른용 짜장면 한 그릇을 가뿐히 해치우고 탕수육에 집중하고 있었다. 평소에 그렇게 많이 먹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그녀는 물끄러미 아이를 쳐다보았고 아이도 잠시 먹는 걸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이가 흡족하게 먹는 모습을 보고 나서 그녀도 비로소 짜장면의 맛이 입과 목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아이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탕수육이 가득 든 입을 우물거리면서 엄마를 향해 되웃어주는 것을 보는 순간, 그녀는 머리와 어깨에서 묵직한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 뭔가 빠져나가 머리의 무게와 어깨의 높이가 덜컥 한 계단 내려앉는 느낌, 그래서 다시 주위를 둘러봤을 때 전등의 조명 빛이 좀 더 밝아지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한층 커져서 그녀 주위에서 메아리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당신도 소주 한 병 드세요. 여기요. 소주 한 병 주세요' 남편은 그녀의 그런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녀 안에 있을 것 같지 않은 목소리가 그녀로부터 흘러나올 때, 아이도 남편도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자이자 아내인 그녀가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을. (그러고 보면, '엄마'라는 것은 얼마나 중성적이고 강인한 이미지였단 말인가?)
그녀는 좀 떨어져 앉았던 의자를 살짝 들어 테이블 가까이, 남편과 아이에게 더 가까이 당겨 앉았다.
"우리 아들, 짜장면 오랜만이지?"
"그런 것 같아."
"어때, 어떤 느낌이야? 맛있어?" 음식이 맛이 있는지 묻는 것은 아이도 그녀도 처음이었다. 시골에서 음식은 맛이 있건 없건 항상 감사하게, 소리를 낮춰서 빨리 먹어치워야 하는 것이었다. 서울 생활에서 음식은 그들이 사는 것의 최소한이었다. 맛으로 먹는 게 아닌.
"음, 처음은 아냐. 옛날에 할아버지 따라서 홍산장에 갔을 때 할아버지가 사주셨어"
그녀는 사소한 질문에도 건성으로 대답을 내놓지 않고 자신이 가진 기억과 생각을 정리해서 내어놓는 아이를, 시골집 강아지 쓰다듬듯이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엄마는 몰랐네"
"그때, 아버지가 큰 손주라고 이 아이만 데리고 나갔었지. 나도 장에 가서야 아버지와 아이를 만났었어" 남편이 아이가 처음 짜장면 먹었던 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그녀에게 설명하며 거들었다.
"엄마 목소리가 낮아졌어요."
"음. 짜장면 탓인가 보다." 그녀의 마음이 더 비워졌다. 실없는 대답이 이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삶이 내일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그녀의 마음속에, 아까 아이가 자신을 보고 되웃어주는 순간, 찾아왔다. 스스로 머리와 가슴속 구석구석 필요한 곳에 최대한의 힘으로 조여놓은 나사들이 일거에 서너 바퀴씩 풀리고, 그 틈새로 현실속의 아이와 현실속의 짜장면과 현실속의 외식이 스며들었다.
"목소리가 듣기 좋네" 남편은 그녀를 쳐다보지 않은 채 술잔을 기울이며 중얼거리듯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게 내려놓고 살아도 돼, 라는 말은 목 안에서 멈추었다.
마지막 남은 음식은 건드리지 말라고 배운 아이가 마지막 탕수육 한 조각을 흘낏흘낏 쳐다보는 것을 보고, 그녀는 간장소스를 살짝 찍어 아이 입에 넣어주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남김없이 받아서 우물거리는 아이 모습이 시골집 마루 밑을 지키던 새끼 강아지를 닮았다고 느끼면서, 그녀는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티나지 않게 눌러 내렸다. 아이와의 만남에서 종종 그런 순간이 닥쳤을때 처럼.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그녀의 손을 잡고 걸었다. 그녀의 남편은 항상 그렇듯 한두 발 앞서서 걸었다. 아이는 갑자기 먼 발치에서 같은 반 아이를 확인이라도 한 것 처럼 그녀의 손을 놓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아이를 잡고 있는 손에 가을 바람이 스칠 때, '만약,' 하고 그녀는 뛰쳐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만약 이대로 10년정도 꾸준히 버틸 수 있다면...' 그것은 생각이 아니라 간절한 바램이었다. 그럴 수 있다면, 지난 삶이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한 채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이 궤도에 올랐으니 10년정도만 버티고 나아갈 수 있다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한 터가 잡히고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과 궤적이 남부럽지 않게 만들어 질 수 있겠다... 그녀는 한걸음 한걸음 다짐하듯 눌러 밟으면서 아이의 뒤를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