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의 실패
아이가 서울 학교에 등교하는 첫날, 그녀는 아이의 손을 잡고 옥수동 비탈길을 올랐다.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간다고 느껴질 정도로 경사가 가팔랐다. 아이는 미끄럼을 방지 하기 위해 가로로 그어진 줄을 따라 땅만 보며 걸었다. 가끔 1톤 트럭과 택시가 가끔 엄청난 소음과 매연을 뿜으로 사람들 사이를 거침없이 지나쳤다.
학교에 다다를수록 비탈길로 이어진 많은 골목길에서 무수한 아이들이 걸어나와 비탈길은 더 많은 아이들로 꽉 채워졌다. 아이들이 서로 부르는 소리, 인사하는 소리, 교통정리하는 호루라기 소리... 소리에 소리가 묻혔고 그 속에서 서로에게 닿기 위해서 아이들의 목소리는 한층 더 높은 톤으로 변해갔다. 그 총체적인 소리에 그녀와 아이는 급기야 주눅이 들었다. 이 많은 사람이, 이렇게 동시에, 이렇게 크게 소리치듯 말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엄청난 종류의 음파와 음성이 경쟁하듯 섞인 총체적 소음은 시골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았다. 제 아무리 많은 수의 아이들이 떠들어도 그 소리는 금새 너른 들 위로, 산으로 흩어졌다. 소리의 양은 열린 하늘에 어떤 흔적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아이들의 소리는 너른 들판과 나무들이 빨아들여서 하늘에 닿기 한참 전에 소멸돼버렸다. 시골은 하루종일 정적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이 곳, 이삼층 건물로 둘러싸인 비탈길에서, 사람들 소리와 트럭의 굉음은 서로 얽혀 거기에 머물렀다. 아이는 제비집에서 제비어미와 제비 새끼들이 동시에 우짖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학교 행정실에 들러 아이의 전학이 문제없이 진행되었음을 확인하였고, 곧바로 담임 선생을 만났다. 얼핏 보기에도 60을 넘긴 듯한 여자 선생이 돋보기안경 너머로 그녀와 아이를 응시했다. 친절함보다는 괜히 맡게 되었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굳이 서울로 오셨어요?’ 담임 선생은 단박에 그녀의 깊은 곳을 찔렀다. 그 목소리는 가뭄이 심하게 들어 모든 것이 말라 버린 여름날 진흙 논이 갈라지는 느낌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잠시 말을 잃었다.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요새는 서울에서 살아보는 게 다들 해보고 싶은 일이니까요..’ 그녀는 잠시 동안 주눅이 들었고, 답변은 궁색했다. ‘내가 용기를 내었고 아이를 잘 키워보려고 올라왔다’는 말이 어떤 이유인지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 부딪힌 아이들의 숫자와 그 숫자가 만들어내는 소음에 이미 압도당한 상태였던 탓에, 그 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아이를 잘 키워보려고 왔다는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이 삶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침 등굣길 비탈길의 높이만큼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충남 서천에서 무슨 일을 하시나요?’ 60의 담임선생님은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라는 듯, 정확하고 또렷하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하고 있는 일은 논농사가 전부인데, 왠지 그렇게 대답해서는 아이에게 피해가 갈 것 같은 생각이 본능처럼 그녀의 머리를 후려쳤다. ‘벼농사, 고추, 마늘, 생강 등 여러 가지 많이 하고 있습니다. 소나 닭 키우는 농장도 하고 있어요.’ 당신이 무시하지 못할 만큼 열심히 하고 있고, 당신에게 뭔가 드릴 수 있을 만큼 많이 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야 했다.
60의 담임선생 표정이 약간 상기되었다. ‘아 그래요. 그럼 사슴 같은 것도 하시나요? 녹용이 그렇게 좋다고 하던데..’
‘그런 건 하지 않습니다. 논농사나 밭농사를 하기에도 바쁘고, 그런 걸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경험과 기술이 필요하니까요’ 서른 조금 넘은, 한평생을 시골에서 살아온 그녀는 서울이라는 세상 물정에 많이 어두웠다.
그 이후로 6개월 동안 아이는 아이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힘들고 고단한 날들이 지속되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맨 몸으로 시작한 타지 생활이 쉽지 않을 것임은 여러 번 각오를 했지만, 하루하루는 예상보다 더 어렵게 굴러가고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순간들이 닥쳤다. 첫 3개월은 근방의 아케이드 빌딩 2층에 있는 피혁 봉제공장에서 일을 했다. 고향의 지인 소개로 들어간 것이었는데, 피혁을 가공하는 화약약품 냄새를 참아내기 힘들었다. 그러고 나서 음식점 주방일을 시작했다.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주방을 정리하고 그릇을 닦는 일이었다. 버스 다섯 정거장 거리의 음식점이었는데,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대부분 걸어 다녔다.
시골에서 쌀이나 부식물 몇 가지를 공수해오지 않으면 안 될 수준의 급여가 그녀 손에 쥐어졌다. 그 급여로 방값을 지불하고, 아이를 먹일 반찬거리를 조심스럽게 구매했다.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정도 노동은 시골 농사일에 비하면 오히려 수월한 편이었다. 그녀를 끊임없이 짓눌렀던 것은 이 일로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자본금이 없는 상태에서, 시골에서 농사만 짓던 그녀가 서울에서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한 것뿐이었다.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거리에서, 낯선 상점에서, 푼돈을 벌겠다고 집을 비우는 동안 아이는 방 안에서 홀로 고립되고 있었다. 집에서 가까운 골목길에 아이 또래가 그리 많지 않았던 까닭도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아이에게 모든 것이 낯설었다. 아이가 시무룩하게 하루하루 보내는 것을 그녀는 한동안 모른 척했다. 조금 더 지나면 익숙해질 것이고, 친구가 생길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 여겼다.
‘우리는 시골에서 쌀이랑 먹을 것을 많이 가져오니까, 엄마가 일 안 해도 되지 않아?’ 어느 날 아이는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이는 처음으로, '나는 서울생활이 행복하지 않아요, 시골로 돌아가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서울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약점이 노출되었다.
아이의 질문이 있던 다음 날, 그녀는 식당일을 그만두고 노점 장사를 시작했다. 마음 착한 주인아주머니의 알선과 배려였다. 당시에는 한강변 너른 구석을 밭으로 다져놓고 각종 채소를 경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로부터 알타리 무우나 배추 등을 도매금을 주고 뽑아다 함박에 올려놓고 이문을 붙여 팔았다. 조금 지나서 두부공장에서 두부를 떼어 와 같이 팔았다. 배추, 무, 시금치, 두부가 번갈아가며 그녀의 노점에 올랐다. 시장통, 버스 정류장 근처에는 그녀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고, 서로 처지를 잘 아는 듯 텃세 같은 건 없었다. 이 일은 식당 일보다 약간 여유가 있었다. 오전에 아이를 챙겨 학교 보내고, 집안 정리를 충분히 하고 나서, 아이가 학교에서 오는 걸 보고 집을 나서도 되었다. 노점상 단속을 피해 도망가다 넘어져 손바닥을 다치기도 했으나, 그만 둘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문제는 겨울이었다. 날씨가 추워 노점상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계절이다. 아무리 껴입고 둘러 써도 하루종일 찬바람에 서있다 보면 어느새 온몸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노점상 단속 경비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것도 훨씬 힘든 시절이 겨울이다. 어떤 이는 얼음판에 미끄러져 다치기도 하고, 하루치 팔 것들을 땅바닥에 처박아 이래저래 장사를 망치기도 했다. 추운 날씨엔 사람들의 왕복마저 뜸해서 어떤 때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보다 거리를 지키는 노점상인이 더 많았다.
아이는 시댁으로부터, 아버지로부터, 일절 금전적 지원이 없다는 것, 서울생활은 생각보다 많은 현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목돈이 나가야 하는 월세는 시골에서 갓 올라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그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었다. 애초에 그렇게 하기로 하고 시댁을 나선 것이기 때문에 시댁에 손을 벌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자존심상 용납되지도 않았다.
다시 시골로
그해 12월, 그녀 없이 가을걷이를 마치자마자, 남편은 쌀을 포함해서 이런저런 살림 거리를 잔뜩 짊어진 채 익숙지 않은 서울거리를 통과하여 그녀와 아이가 머물고 있는 금호동 셋방살이에 도착하였다. 살림은 예상한 대로 남루했고, 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시골에서는 그래도 마을에서 제일 큰 집에서 제일 많은 땅을 다스리는 집의 며느리이자 그들의 자식이었다. 계절 별로 다른 꽃들과 나무들이 집 안팎을 감싸 안았다. 계절별로 서로 다른 바람이 대문을 통해 마당에서 토방으로, 토방에서 마루와 방을 지나 집 뒤켵으로 언제든 지나다녔다.
시골집은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막지 않은 채 바람 길 위에 서 있었다.
지금 그들은 금호동 산동네, 골목길보다 낮은 마당을 가진 집, 마당 옆 간이로 만든 부엌, 어둑한 한 칸 셋방에 오밀조밀 앉아 있었다. 바람은 골목길 끝 어디에선가..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인 금남시장 빌딩들 사이 어딘가에 막혀 여기까지 다다르지 못하는 듯했다. 바람이 없는 골목, 바람이 닿지 않는 가옥에서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흔적은 흩어지지 못한 채 공기 중에 남았다.
좁은 골목, 낮은 가옥, 좁고 어두운 방에 그녀와 아이가 놓여있음을 보았다.
다음날, 남편은 그녀가 한다는 노점을 확인했다. 그건 장사라고 부를만한 것이 못되었다. 커다란 함지박 두 개에 채소 십 여단, 두 판 정도의 두부가 담겨 있었다. 그나마 좌우에 있는 좌판들은 한 평정도는 너끈히 차지한 채 장사를 하고 있었지만, 신참내기인 그녀가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함지박 두 개를 앞에 놓고 오후부터 늦은 저녁까지, 어둑해져서 저녁 준비하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 그녀는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남편에겐 낯선 솜옷 같은 것이었는데, 그 위로 마후라를 덧대고 있어서 그녀의 몸짓은 그녀 답지 않게 둔해 보였다. 시골사람들은 그녀를 날다람쥐라고 불렀었다. 두 함지박에 있는걸 전부 다 팔아도 3만 원이 안될 같았다. 물건을 떼어 온 값을 제외하면 하루 수입이 1만 원이 될까 싶었다. 한 달에 30만 원 안팎에 머무는 돈을 위해 그녀는 이렇게 서울생활과 씨름하고 있었다. 장사를 해본 적이 없는 터라 이를 어떻게 개선할 여지나 방도를 세우기도 어려웠다. 이럴 경우 어려움은 절망이 된다. 그녀는 그 절망과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려가기 전날 밤 남편과 그녀는 긴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남편이 말하였고, 그녀는 들었다.
이렇게 살 거면 내려가자.
시골에서 논을 좀 더 빌려서 부치는 게 낫다.
당신이 있을 때 비교하면 시골이 좀 엉망이다.
이렇게 이런데 살다가는 건강도 다친다.
부모님들도 이해하실 거다.
...
나중에 좀 더 준비되면 다시 올라오자.
...
몇 안 되는 빨래를 접으며 남편이 하는 말을 듣지 않는 척했으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의 귀에 박혔다. 남편이 뭔가를 집요하게 말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상당히 이채로운 모습이었다. 밖으로 돌기를 좋아하고 바깥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위주였던 사람, 안에서는 별 말없이 일하고 쉬는 게 주였던 사람, 가정살이를 아금박스럽고 주모있게 신경쓰고 관리하는 건 자기 몫이 아니라고 여겼던 사람이 주섬주섬 자기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다른 얘기보다 그녀의 귀에 들어온 것은, 논을 좀 더 붙이면(빌려서 농사짓는 논을 더 늘리면) 시골생활이 더 나을 거라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5개월을 살아봤지만 터전이 없고 가진 게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막노동, 식당, 노점판 등이 전부였다. 그것으로 조금씩 생활이 나아진다고 하면 버텨낼 수 있었겠으나, 그것으로는 생활 자체가 유지가 안된다는 것, 더욱이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불가능했다. 남편이 마지막에 말한 '나중에 좀 더 준비되면 올라오자'는 말은 거의 쐐기에 가까웠다. 남편은 일주일 동안 설득의 구조를 고민했던 것이다.
'논을 좀 더 붙이면 시골생활이 더 나을 것'이라는 남편의 말에, 그녀의 몸이 먼저 반응하였다. 내 땅을 내가 부리면서 내가 거두는 것이 주는 만족감은 농사를 짓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느샌가 뼛속에 인처럼 박힌 것을 그녀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산들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들녘에서 풍겨오던 땅 냄새
여름날 시원한 그늘에서 잠시 쉴 때 얼굴을 스치던 바람
가을날 앞마당에 10척 이상 높이로 쌓이던 볏단
자신이 거두었던 들판의 벼와 콩
겨우내 빚어낸 모시
햇콩으로 만든 그 해 첫 두부
시아버지로부터 허락을 받아 갈아 만든 재너머 밭에서 첫 수확한 들깨 냄새
순식간에 들녘으로 다시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의식적인 판단의 결과라기보다는, 여전히 그녀 안에 남아있던 것들이 (남편으로 인해) 한꺼번에 살아나 그녀의 몸을 깨웠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머릿속은 진흙 논, 푸른 밭, 산천과 그 터에서 일궈지는 푸른 것들, 가을에 걷어 들이는 많은 것들, 그것들이 그녀의 손에 의해 다듬어지고 수습되는 과정과 그 느낌들.. 그것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노점상은 지루하였다. 내가 무엇을 한들 내게 돌아오는 수익을 정해진 양에서 더 늘릴 방안은 없어 보였다. 줄곧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사람이 많으면 좋았고, 사람이 없으면 주머니는 비워졌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사람의 많고 적음을 바꿀 수 없었다. 시골 일은 다르다. 내가 내 몸을 움직인 만큼 가을날 성과는 정직하게 달라진다. 그 인과 법칙이 그녀의 피 속에 녹아있었다.
남편은 아이가 겨울방학을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시골 읍내 방앗간에서 빌린 1톤 봉고트럭을 끌고 다시 찾아왔다. 1톤 트럭에 얼마 안 되는 짐을 실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옷 보따리 두세 개, 간단한 부엌살림 2 상자, 그리고 주인집에서 헐값에 넘겨준 흑백 TV, 간이형 옷걸이, (비키니라고 불린) 비닐로 된 옷장 등이 전부였다.
6개월 만에 도망쳐 나온 곳으로 다시 들어가는 그녀의 심정은 복잡했다. 시부모는 예전과 그대로겠지. 말 많은 아낙네들은 얼마나 뒷말들을 할까? 이런저런 상념이 들었으나, 단 한 가지 생각으로 모든 상념을 밀어냈다. '죽을힘을 다해 일해서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다시 나간다.
6개월 서울생활은 피폐했다. 어느 곳 하나 정 둘 데도 없고 따듯한 곳도 없었다. 그녀의 억척스러움을 안쓰럽게 지켜본 주인아줌마가 유일하게 인간적인 관계를 맺은 서울 사람이었다. 식당 가게 주인은 한 푼이라도 덜 주려고 안달이거나, 하나라도 더 시키려고 안달이었다. 매연이 가득한 거리 위에서 노점상은 내일이 없는 버티기에 지나지 않았다. 단속이 철저해졌을 때, 주섬주섬 노점판을 싸들고 도망칠라치면 굴욕감에 뭔가 끓어오르는 걸 참아내야 했다. 모든 것이 준비되지 않은 상경의 결과였다.
그녀는 속으로 분을 참고 또 참았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서 다른 방도가 없어서 이렇게 붙들려 내려가듯 내려가지만, 이 곳은 다시 꼭 돌아와야 할 곳이다. 아이를 위해서 그렇고, 그녀의 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부지런히 차를 몰고 내려와 오후 3시경에 홍산에 도착하였다. 간단히 장을 보기 위해, 시댁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부부와 아이는 잠시 홍산에 머물렀다. 다행히 장날이 아니어서 장터는 고즈넉하였다. 겨울 햇빛이 잘 드는 읍내 공터에는 장날이 아니어도 늘 좌판이 열렸다. 그녀는 그 좌판에 들러 저녁밥상에 올릴 동태와 찬거리를 샀고, 연쇄점에 들러 시아버지에게 드릴 약주와 시어머니에게 드릴 간단한 주전부리를 담아 별도로 포장하였다.
'왔냐'
반가움인지 타박인지 구분이 어려운 인사가 시부모로부터 전해졌다.
'예'
그녀는 간단히 대답하고 별말씀이 이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면목이 없는 쪽에서는 뭐라 길게 인사드리거나 사죄할 상황이 되지 못했다.
시골에서 늘 입던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상 차릴 준비를 했다. 지난 6개월은 실재하지 않았던 꿈이었던 것처럼, 어제도 그제도 여기에 있었던 처럼, 그녀를 포함한 모든 것이 6개월 전과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