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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amoi Sep 24. 2021

소년. 그녀를 보는 또 다른 창 1

소년의 기억.첫 번째 상경

소년은 동네 친구들과 봉선지 저수지에서 그물을 이용한 물고기 잡기를 하기로 한 날, 서울로 떠나왔다. 7살 된 꼬마 아이들은 보통 마을 앞 개울에서, 아니면 아랫마을까지 이어지는 제법 넓은 개울을 따라 붕어와 피라미를 잡았다. 아랫마을은 봉선지와 닿아 있었는데, 이 저수지는 서천군에서는 가장 큰 저수지여서 꼬맹이 아이들이 놀기에는 깊이가 제법 되고 동네를 벗어나는 일이라 감행하기 쉽지 않았다. 시골 아이들 나름대로는 대단한 결심과 준비가 필요한 이벤트였다. 


소년에게는 같은 또래의 7명의 동네 친구들이 있었다. 다른 동네를 보나 동네의 위아래로 보나 7명의 또래집단은 상당히 큰 규모였다. 4월 생인 소년은 그들 중 대장 노릇을 하였다. 7명의 또래집단은 유례없이 큰 집단이어서 아래로는 물론 한 두 살 위로도 이 또래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이 또래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아이들끼리 뭔가를 하기 위해 의사결정을 할 때 이 또래의 의견을 무시하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가령 방과 후에 축구를 할까? 전쟁놀이를 할까를 결정할 때, 참여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또래들의 의견은 굉장히 중요했고, 또래들은 은근히 소년의 말을 따랐다. 한 살 위로는 두 명의 형들이 있었고, 두 살 위로는 3명의 형들이 있었다. 한 살 아래로는 4명의 동생들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시골마을은 보통 20~30채의 가구로 이뤄진 밀도 있는 인구집단의 특성을 보였고, 공간도 제법 구조화되어 큰길과 골목길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들 노는 소리는 어느 동네이건 사계절 끊이지 않았다. 영화 '동막골 사람들'과 유사한 어떤 마을이었고, 이런 마을이 곳곳에 즐비했다. 이 또래들이 성장하고 외지로 빠져나가는 과정이 마을과 시골이 사그라져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이 마을, 옆 마을, 건너 마을, 옆 면, 군과 군에서 동시에 장시간에 걸쳐 꾸준히 지속되었다. 


이 또래들의 머리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예전의 또래들이 해왔던 놀이와 놀이터보다 더 다양해지고 넓어지고 멀어졌다. 이전의 또래들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이 또래들은 해보기 시작한 것이다. 동네 어른들은 이 또래들을 보며 '참 유난스럽다'며 모두들 혀를 찼다. 이 또래의 규모가 예외적으로 컸다는 것 외에 그 원인을 설명하기 쉽지 않다. 미디어의 영향이 높아지고, 책의 영향력이 높아지고, 뭔가 외부로부터의 인입과 영향이 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예전의 또래들은 국민학교를 들어가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글을 깨치기 시작했다면, 이 또래들은 왠지 3~4월이 지나기 전에 글을 읽히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학교에는 반마다 학급문고가 만들어져 아이들 손에 책이 쉽게 잡혔다. 또래들 중 누군가는 허클베리핀을 읽었을 것이고 톰 소여를 읽었던 것이다. 급기야 아이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놀던 방식과 터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또래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하는 녀석들이 많아졌고, 그 경험은 마을회관 앞터에서, 뒷산 바위 놀이터에서, 들녘을 지나는 개울가에서 서로 합쳐지고, 논의되고, 공유되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여느 때와 같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침 오전에 소나기가 내려서 돌아오는 논길 옆 개울가는 시원한 물로 넘쳐났다. 이런 날에는 개울 안쪽 풀섶으로 손만 넣었다 빼내어도 황금색 붕어가 걸려들었다. 개울에 들어가기에 아직 팔과 다리가 짧은 녀석들은 논 옆으로 난 도랑을 따라 맨발로 첨벙거려도 손바닥만한 참붕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6월 말 소나기가 지나간 오후, 비 때문에 멈췄던 매미가 목청껏 울기 시작할 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시원한 물이 넘치는 개울, 깨끗한 물이 넘치는 논도랑, 개울가 옆 제법 넓은 모래밭에 아이들의 가방은 모여있다. 


'이 개울이 저 아래로 흘러 어디로 닿는거지?’ 또래 중 항상 모든 것이 궁금했던 동근이가, 모래밭에 옹기종기 모여 가슬가슬한 모래에 손과 발을 묻고 있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것도 모르냐? 이리로 쭉 따라 내려가면 저기 보이는 윗샛터 앞을 지나서 곰당굴까지 가고 거기서 봉선지를 만나는 거지’ 또래 중에 세상 물정에 제일 밝은 석규가 핀잔을 주듯 답해주었다. 석규는 집에서 막내였는데, 나이 많은 형들이랑 누나가 많아서 누구보다 읍내, 면, 군에서 일어나는 일을 먼저 알았고, 사리 판단도 빨랐다. 동근이랑 석규네 집은 담벼락을 같이 쓰는 사이라 애들 중에서도 서로 사이가 각별했다. 

아이들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각자 머릿속으로 개울물이 윗샛터 앞을 지나, 절뜸마을을 지나, 곰당굴까지 흘러가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봉선지가 충남에서 두 번째로 큰 저수지라는데?’ 상규는 항상 제일 크고 높은 순위를 좋아했다. 상규 말에 의하면 오덕리에 있는 오래된 절 오덕사도 서천군에서 제일 오래된 귀한 절이라고 했다. 

‘그럼 이 개울을 따라 내려가면 곰당굴 버스 정류장에 닿을 수 있는건가?’ 소년이 아이들 전체에게 물었다. 한번 따라 내려가 볼까? 하는 제안이기도 했다. 다만 그렇게 곰당굴로 내려갔다가 집으로 가는 것은 그 이전에 어느 누구도 해보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소년의 말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당연히 맞는 얘기인데, 저 얘길 왜 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저래봬도 개울이 윗샛터 앞에서는 굉장히 넓고 깊어질걸?’ 약간 겁을 먹은 영민이가 중얼거리듯 그러지 말자고 제안했지만, 아이들 마음은 이미 동하기 시작했다. 


집에 일찍 가서 염소를 돌봐야 하는 동근이를 뺀 아이들 6명은 반바지를 더 걷어 올리고, 반팔을 좀 더 위로 동여 올렸다. 책가방 끈을 좀 더 짧게 동여매어 어깨 더 위쪽으로 올려 짊어졌다. 아이들은 천천히 개울물을 젖히면서 걸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개울은 좁아졌다, 넓어졌다를 반복하면서 깊어지기도 하고 얕아지기도 했다. 깊어지고 좁아진 곳에서는  흐르는 속도가 빨라 개헤엄 하듯 흐르는 물에 몸을 맡겨야 하기도 했다. 그것은 새로 발견한 즐거움이었다. 개울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들녘에서는 일하시는 어른들을 마주쳤지만, 어느 누구도 처음 나타난 꼬마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걷다가, 물을 타고 내려오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아이들은 개울물이 봉선지와 만나기 시작하는 곰당굴 개천가에 다다랐다. 봉선지와 만나는 곳에서 개울물은 개천이 되었고 깊어지고 넓어졌다. 그 넓이와 깊이는 여섯 아이들이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개헤엄에 능숙한 두세 명은 신나게 물장구를 쳤다. 잠수도 제법 그럴듯했다. 수량이 이렇게 많이, 넓게 잡힌 곳은 드물었다. 


아이들은 한참 동안 물놀이를 하고 나서, 개천 위로 새로 만들어진 다리 위로 올라와 휴식을 취했다. 잠시 앉아있는 사이 젖은 옷들은 금세 말라가기 시작했다. 다리 밑으로 개천이 흘러 멀리 보이는 봉선지 북단에 닿고 있었다. 


‘저수지 저쪽 너머에 가면 물이 얕아지는 데가 있어. 거기는 물이 조금 빠지면 갈대밭이 되었다가 물이 들어오면 갈대들이 물에 잠기거든. 그때가 되면 붕어랑 잉어들이 갈대 사이에 끼어서 오도 가도 못한대. 걸어 다니기만 해도 팔뚝만한 붕어를 무지하게 잡을 수가 있어’ 역시 형들이 많았던 석규가 아는 체를 하면서 저수지 너머를 가리켰다. 

‘거짓말, 어떻게 저 물속을 걸어 다닐 수가 있다는 거야?’ 석규랑 친한 동근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핀잔을 주었다. 

‘진짜라고, 이 자식아, 며칠 전에도 우리 둘째 형이 함지박에 한 가득 고기를 잡아왔는데, 형 말로 거의 줍다시피 하는 거래’ 석규의 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동근이도 석규네 엄마가 붕어 한 바가지를 먹어보라고 가져왔던 기억이 났다. 

‘저쪽은 어떻게 넘어가는 건데?’ 소년이 물었다.

‘큰 형들은 여기서 걸어 들어가도 될 거야. 이만치 밖에 물이 안 올라와.’ 석규는 손으로 자기 가슴 쪽을 가리켰다.

‘그럼 우리들은?’ 

‘저기 후암리 앞으로 돌아서 저수지 저쪽 편으로 가면 되지’

인철이와 석규가 얘기하는 것은 다른 녀석들은 듣고 있었다. 


곰당굴만 해도 같은 면에, 아이들이 같은 국민학교에 다니는 이웃마을 느낌이 많았다면, 후암리는 문산면에 속하고, 아이들도 문산 국민학교에 다녀서 동네나 사람들 모두 ‘아주’ 낯선 곳이었다. 그 낯선 마을을 지나야 저수지 저쪽에 다다를 수 있다는 건, 전통적으로 이 마을 사람들이 잘 닿지 않는 아주 생경한 곳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이들은 멀리 보이는 저수지 저쪽을 바라보았다. 갈대밭이 어렴풋했고, 물은 갈대 몸통까지 차 있었다. 아이들은 그 갈대 몸통 사이로 은빛 피라미, 금빛 참붕어, 황갈색 빠가사리가 헤엄쳐 다니는 것을 상상했다.


‘그럼 방학하면 저쪽까지 한번 가볼까? 후암리 사람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 거야.’ 언제나처럼 소년이 아이들 마음을 읽고 제안했다. 

‘붕어들이 엄청 커서 들고 올 바케스도 큰 것을  가져와야 혀’ 석규가 맞장구를 쳤다. 

‘저쪽은 물이 깊어서 목까지 넘칠지도 몰라’ 영민이가 약간 겁먹은 듯했다.

‘그니까, 지게 작대기 같은 것도 갖고 와야 혀. 비료 푸대도 필요하고...' 아이들은 헤엄치며 놀았던 시간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저수지 저쪽을 공략할 방법과 준비물에 관해  떠들었다.


6명의 아이들은 평소보다 서너 시간 늦게 해질 녘이 다 되어서야 동네 앞 어귀에 나타났다. 일찍 돌아온 동근이는 제 몸처럼 여기는 염소 5마리를 끌고 들녘에서 풀을 뜯기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뒷산이 아닌 동네 어귀에서 나타난 6명을 발견하고 ‘어디들 들렀다 오는 게냐?’ 하시면서 껄껄거리셨다. 석규엄마는 막내아들이 해질 녘에야 나타나자 버럭 혼을 내시면서 한 손을 잡아끌며 집으로 향하셨다. 아이들은 2주 후 저수지 저쪽 원정을 하기로 한 약속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자기 집으로 흩어졌다.


방학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 소년의 엄마는 아이들이 등교하고 수업을 시작했을 때를 계산해서 되도록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학교를 방문하여 소년의 전학신고를 마쳤다. ‘잘 생각하셨어요’ 대전에 터를 두고 있는 교감선생님이 그녀의 결정에 용기를 실어주었다. ‘이제부터는 뭐가 되었건 도시로 나가서 배우고 힘을 써야 해요. 아이가 똘똘하니까, 시작할 때 잘 적응하게 도와주면 잘할 겁니다’ 


그날 저녁에 소년은 엄마로부터 일주일 후에 서울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 채 그저 막연했다. 이 마을을 떠난다는 것, 할아버지를 떠난다는 것, 동네 아이들을 떠난다는 것.. 모든 것이 막연하였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싶었다. 여기를 떠난다는 막연함보다 서울이라는 곳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컸던 것 같기도 했다. 작년에 엄마 손을 잡고 구경했던 서천역과 기차가 떠올랐다. 서천역을 떠나 기차가 멀리 북쪽 산너머로 사라지던 기억. 그렇게 먼 길을 떠나는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방학식 할 때까지 일주일간 소년의 학교생활은 굉장히 분주해졌다. 교실에 앉아 있으면 육학년 형, 누나들까지 찾아와서 창문 너머로 소년의 모습을 확인하였다. 


'쟤가 곧 서울로 전학 가는 애래..’


마지막 날엔 서울 가서도 기죽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담임선생님의 당부와 아이들의 어설픈 작별인사가 진행되었다. 




빨간 줄무늬의 고속/시외버스는 5시간을 달려, 용산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5시간을 달려오는 동안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매캐한 매연냄새와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속이 울렁거리는 것이었다. 오래된 시외버스는 틈새가 견고하지 않았거나 벌어졌는지 차가 속력을 내면 낼수록 속을 엉키게 하는 기름 냄새가 차 안으로 강하게 전달되었다. 두 모자만 느끼는 것은 아니었는지,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 안에서 사람들은 창쪽으로 창쪽으로 몸과 마음을 기울였다. 이 냄새는 상규네가 동네에서 처음으로 경운기를 샀을 때, 경운기가 내뿜은 검은 연기 냄새와 비슷했다. 시골마을의 경운기 냄새는 이내 공기 중으로 사라졌지만, 버스 안의 냄새는 버스 구석구석, 공기 사이에 켜켜이 쌓여서 사람들이 숨 쉬는 것을 힘겹게 만들었다. 


소년의 엄마는 버스터미널 앞에서 76번 버스를 타고 금호동 금남시장 앞에서 내려야 한다고 소년에게 일러두듯 중얼거렸다. 모든 버스는 거칠게 도착해서 거칠게 출발하였다. 시골버스와 달리 서울버스는 좌석 의자가 둘이 아닌 한 개로 만들어져서, 소년과 엄마는 앞뒤로 앉은 채 지나가는 서울을 바라보며 금호동으로 향했다. 엄마는 소년에게 산 위로 높이 솟은 것을 가리키며 남산타워라고 일러 주었다. 흐린 여름날 오후 서울, 용산에서 금호동으로 가는 동안, 소년은 어제까지 뛰놀던 들과 산이 그리웠다.


오래된 형광등 하나가 비추는 방은 어두웠다. 소년은 약간 피곤한 듯 상기된 채로 어두운 형광등이 비치는 작은 방을 가만히 응시했다. 밝지 않은 형광등 불빛 속으로 방안의 몇 가지 것들이 확인되었다. 방 윗 구석에 자리 잡은 작고 좁은 공부 책상, 좁은 책상을 반 이상 차지하고 올라선 책상보다 커 보이는 위태로운 책꽂이, 방 왼쪽 구석에 놓인 비키니 옷장,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옷장과 그 위의 이불… 확인되는 모든 것은 낯설었다. 낯설었으므로 비교가 불가했다. 낯선 것들이 아무런 의미맥락없이 소년에게 전해졌다. 그건 생경함, 그저 낯설음이었다. 공포는 아니었다. 올 곳이 아니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엄마가 있기 때문에 크게 두렵거나 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어떤 것 때문에 주눅 든 적 없었기 때문에, 그냥 시골에서 처럼 살면 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소년은 엄마가 저녁상 차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엄마가 평소보다 상기되어 있다고 느꼈다. 약간 미소가 보였고, 자주 부르시는 찬송가를 낮게 흥얼거리셨다. 엄마가 두어 번 시장을 보고 나자, 부족한 게 많았던 부엌이 금세 어엿한 부엌으로 바뀌었다. 막 사온 양철 밥상에 된장찌개, 김치, 생선구이, 계란말이, 주인아주머니가 빌려준 밥 세공기가 올려졌다. 소년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없는 밥상에서 저녁밥을 먹는 것이 어색했다. 밥상은 작았고 밥상 위의 차림은 소박했고, 둘러앉아 같이 밥을 먹는 구성원도 처음이었다. 낯선 밥을 넘기면서 아침까지 머물렀던 시골집을 떠올렸다. 어둑한 저녁 무렵, 모깃불에서 피어난 연기가 가득한 마루, 옆집 영민네 집 저녁 차리는 소리, 마당 한가운데 놓인 평상, 평상 위에 놓인 커다란 밥상... 소년은 자신이 지금 마주하고 있는 작고 낮은 양철 밥상과 머릿속에 떠오른 시골 저녁 평상 위의 밥상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착각에 잠시 빠졌다. 소년의 몸과 마음은 시골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소년의 집은 시골동네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시골에서는 있는 집에 속하는 남으로 난 디귿자 집 구조였다. 뒤꼍으로 40개 이상 장독대가 놓였고, 그 뒤로 감나무와 대나무 숲이 포근히 집을 감쌌다. 본채는 부엌과 붙은 안방과 골방, 가운데 위치한 건넌방과 뒷방, 왼쪽 끝으로 사랑방과 뒷광이 자리했다. 동쪽채는 쌀과 배를 보관하는 광, 대문, 아랫방으로 만들어졌고, 서쪽채는 독립채로 화장실, 물품 광, 외양간, 나뭇 강녕으로 만들어졌다. 너른 안마당을 지나 대문을 열고 나가면 다시 널찍한 바깥 마당이 펼쳐졌다. 바깥마당 끝으로 머슴 아저씨가 주무시던 방, 쟁기 같은 농기구가 놓여있던 가운데 공간, 그리고 바깥 외양간으로 구성된 바깥채가 있다. 바깥채 옆, 뒤쪽으로 돼지우리는 별채처럼 만들어졌다. 바깥채 바깥으로 좁지 않은 텃밭에서 사시사철 제각각 다른 채소와 과일들이 풍성했다. 바깥마당에서 뒷 산 쪽으로 커다란 살구나무 두 그루가 봄마다 꽃을 피웠다. 살구나무를 기둥 삼아 차곡히 쌓아 놓은 볏짚단을 아이는 한 채의 집 같다고 항상 생각했다. 시골에서는 지대가 높은 곳은 집터로 적합하지 않았다. 물도 귀하고 날마다 들에 나가는 데 시간이 걸리고, 추수하여 모아 올리는데도 힘이 들기 때문이다. 두말할 것 없이 좋은 터는 동네 가운데 평지 터이다. 할아버지가 제일 높은 이곳을 집터로 삼으신 것은, 본채 바로 옆에서 땅속 깊숙한 곳에서 솓아오르는 우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네의 물줄기는 할아버지 집에서 시작한 것이다. 이 우물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거나 양이 줄지 않았다. 본채 마루에 앉으면 아랫동네를 거쳐 저 멀리 건너편 골짜기 논밭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여름에 문을 열어두면 바람이 본채를 남에서 북으로 관통하였다. 


할아버지의 토방은 다른 집의 그것과 달리 단단하여 부스러지지 않았다. 비가 오면 본채의 처마는 토방 바로 30cm 정도 바깥까지 덮고 있어서, 빗물이나 눈은 토방 안으로 침범하지 못했다. 토방 위에 위치한 마루에 앉으면, 비가 와도 아늑했다. 여름 한철 마루에 앉으면 뜨거운 햇빛은 막아졌고, 시원한 바람은 마루 위를 자유롭게 왕래했다. 마루 밑에는 대부분 부지런해 보이지 않는 누렁이가 들어있었고, 가끔 집에 들어와 살기로 작정한 들고양이도 그 옆에 부족하지 않게 들어 살았었다. 마루 아래 신발들은 언제나 가지런했다. 


바깥에서 동네 아이들의 부름이 있거나, 얼추 약속된 시간이 되면 꼬마는 건넌방 문을 박차고서 담장 너머 아래로 펼쳐진 풍경을 한번 주시하고 마루로 잽싸게 튀어나가 토방 위에 놓인 신발을 후다닥 신는 듯 마는 듯하고서, 토방에서 마당 위로 점프하듯 내달았다. 항상 열려있는 대문을 통과하여 좌우로 잘 다듬어 놓은 담장길을 지나면 아랫동네로 내려가는 비탈길이 펼쳐져있었다. 꼬마의 무릎에 난 상처 몇 개는 이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다 오르다 생긴 것들이다.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에 소년은 평소처럼 냅다 대문 밖으로 내달렸다. 뒤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천천히 가그라, 다친다'외치시는 목소리가 들렸다. 엇? 소년은 평소답지 않게 살짝 미끄러져 비탈길 위로 엎어졌다. 내달리는 힘으로 흙바닥 위에 넘어져 손바닥과 무릎에 생채기가 났다. 몹시 고통스러웠다. 고통스러움에 눈이 떠졌다. 


낮은 천정이 어슴푸레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제 도착한 작은 방, 새벽에 눈을 뜬 소년은 이곳이 시골이 아님을 인식하였다.. 어둠이 깊었고, 좁게 난 창문으로 희미한 불빛이 스며들어왔다. 저녁을 먹자마자 잠이 들었던 것이다. 먼 곳에서 생경한 소음이 전해졌다. 무엇보다 공기 중에서 비릿한 기름 냄새가 난다고 느꼈다. 소년은 생전 처음 까닭 없는 메스꺼움을 느꼈다. 그건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엄마 품으로 파고들었다. 쇠 냄새를 엄마 냄새로 막아보려는 듯.. 메쓰꺼움을 엄마 냄새로 걷어내려는 듯..


여름방학이 끝나고 7월 말부터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소년은 70명의 서울 아이들로 꽉 찬 교실로 안내되었다. 담임선생님은 못된 할머니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얼핏 봐도 고급스러운 하얀색 투피스 양장, 옷에 맞춘 귀걸이와 목걸이가 사치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소년은 그중에서 금테 돋보기 안경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 금테 안경 너머로 담임선생님은 소년과 소년의 엄마를 응시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복장으로 소년은 첫날 아이들 앞에 섰다. 아이들이 신고 있던 뽀얀 실내화, 가방 후면을 충분히 덮는 덮개가 달린 책가방, 여러 자루의 연필과 큼지막한 지우개가 층층이 들어서 있는 필통, 가지런하게 올려 신은 깨끗하고 긴 흰 양말.. 소년은 이런 것들이 자기에겐 없다는 것을 첫날 알게 되었다. 


그 해, 8월부터 시작하여 12월에 끝난 국민학교 1학년생의 2학기는, 소년에겐 일생을 통틀어 가장 잔혹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생활은 복잡하지 않다.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고,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집에 오면 동네 친구들과 해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저녁 먹고 잠이 드는 것이다. 그동안 소년은 이 복잡하지 않은 삶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살아왔으나, 전학 온 첫날부터 이 모든 상식적인 생활이 붕괴되었다. 아이들은 이미 상당히 어려운 수준의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시골아이들은 ㄱ자도 모르는 까막눈 상태로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상당수 아이들은 아직도 한글을 깨치지 못하는 게 당연하였지만, 서울 아이들 대부분은 술술 국어책을 읽을 수 있었다. 두 자릿수 더하기는 시골에서 소년이 유일하게 해낼 수 있는 계산이었는데, 서울 아이들은 세 자릿수에 도전하는 애들도 있었다. 학급 문고에는 한 페이지에 100글자 이상이 들어가는 제법 빼곡한 동화책이 즐비했다. 소년이 크게 못 따라갈 것은 없었으나, 저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모르는 상태.. 자기가 선두를 점령하고 다른 아이들이 따라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리는 상태가 아닌, 쫓아가야 하는 상태… 이 두 가지 상태는 소년이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었다. 


집에 오면 방은 항상 텅 비어 있었다. 소년의 엄마는 어떤 식으로든 돈벌이를 하기 위해 저녁 늦게까지 어디선가 일하고 들어왔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국민학교 1학년생이 편하게 놀만한 친구와 공간이 그 후 5개월 동안 주어지지 않았다. 골목은 좁았고 이상하게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방과 후에 아이들은 어딘가에 숨어, 소년이 모르는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듯했다. 가끔 좁은 골목에 한두 명 혹은 서너 명의 아이들이 보였으나 대부분 소년보다 윗선들이었고, 서울 아이들의 놀이를 잘 모르는 꼬마를 그들 사이에 붙여주지 않았다. 골목은 그 자체로 아이가 익숙하게 놀만한 공간이 되지 못했다. 좁았고 평평하지 않았고, 옥수동 비탈을 따라 경사가 심했다. 여자아이들이 간신히 2~3미터 공간을 만들어 고무줄 놀이를 했다. 방과 후 학교 운동장에 몇몇 그룹이 나뉘어 축구와 놀이터 놀이와 숨바꼭질 비슷한 놀이를 하고 있었으나, 그 역시 1학년짜리가 낄만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4학년 이상 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마디로 그 해 소년은 운이 없었다. 서울의 1학년 아이들은 밖에서 놀지 않았다. 최소한 소년의 골목에 같이 놀만한 1학년이 없었다. 아마 그들은 다른 언덕, 다른 마을에서 소년 몰래 모래놀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학교 수업시간에 예상치 않게 주눅이 들기 시작한 소년은, 방과 후에 같이 놀 친구마저 상실한 상태가 되어, 생전 처음 겪는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건, 골목의 담벼락에 기댄 채 한참 동안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자, 혼자 잘 부서지는 자갈돌을 손에 쥐고, 울퉁불퉁한 골목길 바닥에 어설프게 흰 선을 만들어보고, 그 흰 선이 배 모양이나 비행기 모양이 될 수 있을까 하여 그어보기를 반복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일과 같은 것이다. 소년이 남긴 배와 비행기는 며칠 동안 그 자리에 남아 있었고, 소년은 계속해서 이어 그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지치면 소년은 엄마가 있는 금남시장 앞에 갔다. 


소년의 엄마는 몇 가지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금호 아케이드 이층에 있던 가죽제품 봉제공장에 다녔다. 서천 출신의 아저씨가 생산관리를 하는 공장이었는데, 친분이 있던 고모 소개로 취업을 할 수 있었다. 할 일이 없는 소년은 엄마를 찾아 금호 아케이드 이층에 있는 가죽 공장을 가보았는데, 공장이래야 서너 평 되는 공간에 탁자와 의자와 다리미와 이름 모를 화학제품들이 놓여있었고, 특히 공간의 가운데에 놓인 탁자 위에는 산처럼 높은 가족 조각이 쌓여있어서 가끔 엄마를 찾아 눈을 마주치기도 쉽지 않았다. 소년은 가죽 무덤 뒤에서 부지런히 가죽을 펴고 손질해서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엄마를 찾았고, 한동안 엄마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으면 엄마도 이내 소년을 발견하고 웃는 눈짓을 전하였다. 그리고 소년은 집으로 돌아선다.


 (성인이 된 소년은 아직도 그 방공장에서 나던 가죽 냄새를 잊지 못한다. 코를 찌르고 단 몇 초 만에 속을 뒤집어 놓을 강력한 화학약품 냄새, 혹은 화학약품 때문에 늘어지고 부드러워진 채 속의 냄새를 뿜어내는 진짜 가죽 냄새.. 엄마는 2개월 정도 다니고 그만두었다. 급여가 너무 작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 냄새와 탁한 공기 때문에 머리가 부서질 듯 아팠기 때문이다. 거기 가죽공장은 다들 그렇게 일하고 그만두는 곳이라고들 했다.)


가죽공장을 그만둔 소년의 엄마는 시장 앞에서 노점상을 시작하였다. 엄마는 새벽 일찍 한강변 배추밭에서 붉은 고무대야 두 개에 빼곡히 ‘얼갈이배추’를 떼어 와 팔았다. 그해는 늦가을부터 추워지고 있었다. 소년이 찾아갈 때마다 엄마는 두툼한 목도리를 한 채 발을 동동 구르며 좌판을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이 왜 엄마한테 배추를 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저녁 5시~6시 사이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엄마의 좌판에서 배추를 사 갔다. 운이 좋으면 7시 전에 그날 떼어온 것을 모두 팔고 같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날은 어두워진 후에도 배추는 대야에 소복이 남아 있었다. 엄마는 버티면서 기어이 빈 대야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집 근처에 오게 되면 나즈막하게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는 단지 소년에게 닿을 정도로 낮고 약하였으나, 소년은 그 소리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재빨리 방문을 열어 엄마를 맞이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의 마지막을 알리는 그 소리는 아무리 작아도 소년에게는 다다를 수 있었다. 시골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소년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집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셨고, 대문 밖엔 항상 동네 아이들이 팔방 치기를 하거나 미루나무밭에 모여 있거나, 일규네 집 대나무 숲에서 참새를 쫒거나 하고 있었다. 




딱 한번 소년은 혼자 있다는 두려움에 훌쩍거린 적이 있었다. 매미소리가 한창인 여름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시원하게 바람이 통하는 건넌방에 잠시 누워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어쩐 일인지 그날은 깊이 오래 낮잠을 잤고, 깨어보니 해가 옆산을 넘어서려 했고, 미루나무 그림자가 길게 들판을 덮고 있었다. 문득 눈을 뜬 소년이 느낀 것은 생경함이었다.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소년은 멍하니 방문 너머 햇살이 뉘였뉘였하는 바깥 세상 풍경을 응시했다. 더위가 사그러들고 여름바람은 서늘했다. 소년의 얼굴에는 방바닥 장판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햇빛이 뜨거운 점심때였는데..

왜 갑자기 어둑어둑해진 거지? 

왜 나만 남겨진 거지?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도 없었다)

벌써 저녁인가? 그러면 그 시간 동안 나 혼자 남겨진 거였나?

아무것도 못한 채 벌써 저녁이 된 건가?

아이들은 왜 나를 찾지 않았지? 다들 어디 있지?

왜 시간이 이렇게 흐른 것이지?


소년은 까닭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조금씩 훌쩍였다. 어떤 이유였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 경험 자체가 너무 생경한 것이어서 일종의 두려움과 공포를 주었던 것 같다.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하루해가 저문 것이 서글펐던 것일까? 잠시 후, 소년의 엄마가 소년을 찾았다. 우는 아이를 보며 소년의 엄마는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아이가 긴 낮잠을 자고 깨어나서 왜 훌쩍이는지 알겠다는 듯이.


소년은 이내 엄마의 품 속에 안겼고 비로소 안심했다.


소년에게 혼자 있다는 경험은 딱 한번 있었던, 그만큼 강렬한 것이었는데, 그해 여름, 가을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혼자 지냈다. 그 기간 동안 소년은 조금은 내성적이 되는 법을 배운 듯하다. 밖에서 친구들과 같이 있지 않아도,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어/떤/ 생활은 가능해진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이해하는 것. 운동을 하거나 친구들과 놀 때는 누구보다 과격하고 활달하다가도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지극히 신중해지고 말을 삼가는 식의 태도를 갖게 된 것은 아마 이때 이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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