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트로.
비가 오면 시골동네 앞 개울물은 뿌연 흙탕물로 변했다. 비가 그치고 흙탕물이 살짝 걷힐 때, 아이들은 그 속으로 뛰어들어 붕어를 잡아 올렸다. 황금빛 비늘이 반짝이는 어른 손바닥만한 참붕어가 아이들의 조막만한 두 손에 잡혀 언덕 위로 던저져 흙바닥 위에서 힘차게 팔딱거렸다. 언덕 위에서는 같은 또래의 여자애들이 던져진 붕어를 커다란 양동이에 주어 담았다. 깨끗한 물과 깨끗한 흙이 섞인 물을 아이들은 전혀 '더러운 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울로 전학 온 소년은 버스가 다니는 큰 길가 옆 하수구와 세 들어 사는 집 앞 길가 하수구 밑으로 '검은 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모든 물이 검었고 검은 물에서는 역한 냄새가 났다.
-물이 이렇게 '더러울' 수 있을까.
비가 오고 잠시 개인 어느 날, 소년과 아이들이 덜 마른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중, 공이 운동장 옆 물 웅덩이에 빠졌다. 비로 인해 잠시 생겨난 흙탕물 웅덩이. 아무도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소년이 첨벙첨벙 웅덩이로 들어가 공을 꺼냈고, 이를 본 서울 아이들은 경악했다.
-더러운 물이야. 조심해.
-아냐. 이건 더러운 물이 아냐. 깨끗한 물과 깨끗한 흙이 잠시 섞여 있는거야. 더러운 물은 검은 물이야.
출근 길, 어른이 된 소년은 한강을 넘어가는 지하철 안에서 전날 쏟아진 비때문에 뿌옇게 변한 강물을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저건 어떤 물일까. 소년은 어른이 되어서도 시골생활을 잊지 못한다/않는다. 통상적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도의 '못잊음'이 아닌, 적극적으로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무침이 배어 있었다. 좋아했던 것으로부터 강제로 이격당한 상처가 남들보다 더 깊고 아프게 남았기 때문일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시골에서 계속 커온 시골 친구놈들에겐 아쉬움이 없었고, 소년에겐 떠나온 시간에 비례하여 커진 아쉬움이 짙게 남아 있었다.
부모님의 결정에 따라 국민학교 1학년, 그리고 다시 5학년부터 줄곧 서울생활을 해왔지만, 소년은 한번도 자신이 서울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엔, 항상 할아버지가 계신 시골집, 마루와 앞마당, 대문과 대문 밖 바깥마당, 모든 종류의 채소가 자라나던 텃밭, 비탈길을 내려가다 만나는 맑은 샘물, 물이 흘러 고이고 만나는 곳에 미나리 밭, 미나리 밭을 늘 서늘하게 만들던 미루나무 숲,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솟아오른 미루나무들이 넓게 만들어내는 시원한 그림자들, 뜨거운 여름 한날에도 그 그늘 아래에서 온 동네 아이들이 다 모여서 재잘거리고 놀던 잔디밭, 토끼풀꽃을 엮어 만든 꽃반지와 꽃팔찌, 새초롬하게 자신의 허벅지를 소년이 밸 수 있도록 내어준 동네 누나, 이 모든 것이 각각 구체적이고 또렷한 이미지로, 뭉뚱그려진 하나의 어떤 정체로 소년의 마음속에서 항상 숨 쉬며 살아있었다.
소년의 외지에서의 삶은 준거하지 않는 공간에서의 삶이었다. 그곳에 있으나 다른 곳을 바라보는, 그곳에 있으나 그곳에 있지 않은, 그러면서도 그곳에서의 삶을 유지해야 하는 그런 삶을, 그때 이후로 지속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