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마지막으로 집을 나선 날, 그날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불현듯 찾아왔다. 가슴 부근에 통증을 호소하는 남편을 데리고 집을 나선 지 2주 만에, 그녀는 홀로 돌아왔다. 아이들과 친척들이 아직 납골공원에서 행사를 치르고 있어서... 홀로 도착한 집은 휑하였다. 넓은 집. 텅 빈 채. 지난 20여 년간 남편이 누었던 침대는 주인이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던 날 이부자리 그대로였고, TV 볼 때 앉았던 흔들의자는 거실로 들어와 부엌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남편의 심장은 한 달 전부터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했다. 말하는 게 불편했던 남편은 이주 동안 혼자 앓다가 겨우 아프다는 소리를 밖으로 내었고, 그때는 수술을 해도 회복할 가능성이 낮은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녀와 그녀의 자식들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했고, 미국에 있는 큰아들에게도 동의를 구하였다. 수술을 할 것이며, 수술 후 자연 회복이 어려우므로 인공 기계로 심장을 뛰게 할 것이며, 인공 기계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2주 동안이며, 이 기간 내에 심장으로 스스로 뛰지 못하면 인공 기계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동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수술 후 1주일 경과할 때 어느 정도 회복되는 조짐이 있었으나, 잠깐의 회복기를 지나면서 환자는 거의 기력을 상실하였다. 인공 기계만 남편의 가슴 안에서 웅웅거렸다. 2주가 되었을 때, 남편의 몸이 더 이상 인공 기계를 버티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의사는 모든 가족이 보는 앞에서 기계의 작동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에는 남편이 그저 잠든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잘 들던 거실, 흔들의자에 기대어 잠든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많은 날들이 겹겹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사라졌다. 잠든 남편에 대해 짠한 정이 솟아올라 깊게 울먹였다. 고생했소, 고생했소, 고생했소…
힘들고 어렵게 살아온 지난 모든 날에 대한 것이었는지
반신불구가 되어 버텨온 지난 20년에 대한 것이었는지
마지막 2 주에 대한 것이었는지
자신 같은 억척스러운 사람과 살아준 것에 대한 것인지
그 남자가 남기고 간 모든 노동에 대한 것이었는지... 그녀는 고생했소라는 말만 수십 번 반복하였다.
남편은 한창일 나이였던 57세에 중풍을 맞았다. 아이들이 모두 성장한 터였고, 그들도 더 이상 예전 같은 극한의 책임감을 감내할 노동에 인생 전부를 녹여내지 않아도 되었던 시절이 이제 서너 해 지나고 있을 즈음, 몹쓸 병은 무심코 찾아왔다. 남편은 젊었을 때 면단위 씨름판에서 최종까지 살아남았던 강골이었다. 중풍이 오기 바로 전 날까지 지게에 쌀 두 가마를 거뜬히 짊어지고 들녘 방앗간에서 집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들여왔었다. 중풍이 왔을 때, 세 시간이 지나서 병원에 도착한 것은 치명적이었다. 원광대학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마치고, 미세한 후속치료는 서울에 있는 병원이 더 나을 수 있다고 하여, 그날로 서울 아산병원으로 이동하였다.
큰아들은 아산병원에 먼저 도착하여 그의 아버지를 맞이 했다. 몸의 근육이 스스로 긴장하지 못한 채, 남편은 휠체어에서 물먹은 종이처럼 풀어지고 하염없이 접혔다. 큰아들이 휠체어를 미는 동안 양옆에서 다른 자식들이 접히는 몸뚱이를 위로 잡아 올렸다.
병원에서 이 주정도 미세치료를 받고 나서, 남편은 전신불구는 면했다. 뇌의 절반은 작동하지 않는 상태 - 그래서 신체의 반쪽(왼쪽)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로, 중풍은 진정되었다.
이 주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그의 것인 양 호방하였고 거칠 것이 없었던 남편은, 휠체어에 실려, 반쪽밖에 작동하지 않아 일반적인 타인은 알아듣기 힘든 언어를 구사하는 상태로, 가방엔 육 개월 치 치료약을 잔뜩 담은 채, 퇴원하였다. 남편은 큰아들에게 사달라고 부탁한 중절모를 푹 눌러쓰고 시골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집으로 내려오는 차 안, 그녀와 남편, 자식 둘이 동행해서 내려오는 동안, 차 안은 줄곧 침묵했다. 남편은 시종일관 눈을 감은 채였다. 물이 다 말라버려서 간신히 바위 위를 적시듯 흐르는 계곡물처럼, 까칠해진 피부 위로 마른 눈물이 흘렀다.
남편은 이후에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녀 말에 의하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퇴원 후 1년여 동안 찾아오는 친구들 지인들을 모두 물리쳤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모든 것을 해보았다. 먹는 것, 움직이는 것.. 1년 정도 지나서 모든 것은 명확해졌다. 어눌한 발음이 조금 개선된 것 외에 그의 상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임은 명확했다.
그런 남편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명확히 이중적이었다. 평생 손에 잡히지 않던 남편이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 나갈 곳을 모른 채 그녀의 돌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녀는 이제 하루 종일 남은 인생의 모든 시간을 남편 곁에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젊은 날 주막과 주막을 넘나들며 그녀의 속을 곪아 터지게 만든 것에 대해 죗값을 받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이제 꼼짝도 못 하고, 집에만 있으려니 얼마나 답답할까? 그녀가 가끔 남편을 쳐다보며 알아듣을 듯 못할 듯한 목소리로 물을 때마다, 남편은 못 들었다는 듯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이후로, 남편은 거의 완벽하다시피 하게 그녀의 보살핌을 받았고, 그의 건강을 괴롭히던 술을 단절할 수 있었고, 정기적인 건강체크와 작지만 규칙적인 신체활동으로 인해, 외형적으로는 점차 예전의 모습을 찾아갔다. 비록 반쪽은 굳어있는 상태가 지속되었으나, 부부는 서로에게 유일하게 말을 알아듣고 이해하는 존재가 되었다. 같이 소담 거리다 잠이 들고, 같은 시간에 눈을 뜨는 삶을 부부는 비로소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에겐 오십 평생을 동고동락하여 온 그녀가 그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고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반쪽이 마비인 것은 신체를 수직으로 나누어 정확히 반쪽이 마비인 것을 의미했다. 말이 어눌한 것은 반쪽은 제대로인데 나머지 반쪽이 뇌의 통제를 받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복합 결과물이었다. 국물이 있는 음식은 가끔 통제되지 않는 쪽으로 흘러내렸고, 그녀는 그제야 서양인들이 왜 수건을 앞에 두고 식사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남편의 식사는 그녀 앞에서만 온전히 편안했고, 속도가 빨랐다. 남편은 그녀 앞에서만 많은 음식을 제대로 씹어서 삼킬 수 있었다. 20년 동안 모든 식사시간에 그녀는 남편 곁에 있었다.
남편과 그녀는 항상 그곳을 벗어나려고 했다. 자식들이 도회지로 나가 문명을 누리고 문명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살도록 하는 것이, 그들이 같이 사는 이유였다. 다른 집들이 작은 추수, 작은 결실, 소박한 진학을 감사히 여기며, 차곡차곡 여물어 갈 때, 부부는 눈 비비는 아이를 이끌고 바다와 도시를 방황했다. 기를 쓰고 서울로 나갔지만 실패하고 돌아들어 왔다. 그리고 남은 억척을 다해 아이들을 서울의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시켰다. 집안은 더 어려워졌으나, 자식들이 잘살면 된다는 잘못된 계산을 하였다. 자식들은 안으로 영글기 전에, 도회지 삶에 던져졌다. 사는 방법을 모른 채 부침했다. 그나마 자식들이 자리를 잡아갈 즈음.. 아버지에게 중풍이 찾아왔다. 중풍으로 반신불구가 된 남편을, 그녀는 20년 동안 건사하였다. 그건 흡사 부상당한 동지를 버리지 못하는 그것과 닮아있었다.
그때 그곳에서 외지를 향해 눈을 돌렸던 유일한 젊은 남녀. 처절히 실패하고 돌아와 터를 다잡기 위해 엄청난 양의 노동을 감수했던 동지. 사는 방식은 정반대였으나, 같은 꿈으로 묶여있던 존재. 그녀는, 50여 년을 같이 살아온 동지를 보냈고, 자식은 헐겁게 그 상실의 크기를 가늠했다.
남편을 보낸 다음 날, 그녀는 큰아들과 고향마을과 서천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천방산에 올랐다.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아들 손을 꼭 잡고 올라야 했다.
오랜만이구나. 아들 손을 잡아본 게... 자식 또한 철이 들기 시작하고서 기억이 없다. 의지하기 위해 손을 잡는 행위를 그들은 서로 거부하면서 살아왔다. 걷고 일 하는 것에 관한 한 그녀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자식은 너무도 잘 알았다.
경미한 뇌출혈 이후 그녀는 많이 약해졌다.
"엄마 혼자 힘으로 올라가 봐. 작년처럼" 손을 내미는 그녀에게 아들은 말했다.
"왜. 엄니 손잡고 올라가기 힘든 감" 그녀는 웃으면서 다시 아들의 손을 찾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데 오를 때 손잡자고 안 했는데.’ 자식의 가슴 한 구석이 내려앉았다.
"약간 어질 한 게 아들 손잡고 오르는 게 더 편하네. 이제 나도 그럴 때가 되었지" 자식은 그녀가 살가워진 게 기쁘지 않았다.
천방산 정상에서 그녀는 한참 동안 고향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자란 조 실 마을 동쪽으로 20리 정도를 돌아보면 그녀가 남편을 만나 지금까지 살아온 들녘과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두 마을 사이로 커다란 저수지가 서천읍을 향해 벌려있고, 저수지 주변으로 산과 들과 논과 마을이 적당히 뿌려져 있었다.
정자에 앉은 그녀 뒤로 따가운 여름 햇살이 비췄고, 가을을 부르는 산들바람이 머물렀다 지나갔다. 그녀는 긴 호흡으로, 충분히 시간을 들여 조실마을에서 시골마을로 시선을 옮겼고, 다시 같은 시간을 들여 시골마을에서 조실마을로 시선을 옮겼다. 긴 세월이라고 생각했고, 모질게 한 평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했고, 잊을 수 없던 시절과 경험들이 켜켜이 쌓인 인생이라고 생각했지만.. 기실 그녀 인생의 8할 이상이 일어난 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넉넉히 10초 정도에 걸쳐 둘러볼 공간 안에 있었다는 게 한편으로 신기했고, 한편으로 어이가 없었다. 여름 햇살과 가을바람은 그녀의 왼쪽 뺨에 머물다 오른쪽 뺨을 스쳐 하늘 속으로 빠져나가기를 반복하였다.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면서 머리카락을 들어 올릴 때, 세 자매 중 철부지 막내둥이, 망해버린 채 자존심만 강했던 아버지의 딸, 양아들 며느리한테 구박받는 엄마를 끌고 고향마을을 뛰쳐나오던 기센 아낙네의 삶이 비쳤다. 여름 햇살이 가을바람보다 먼저 그녀의 얼굴에 머무를 때, 자식은 그녀의 얼굴에 담긴 깊고 깊은 주름 하나하나를 또렷이 인식할 수 있었다.
어미를 바라보던 자식은 눈을 돌려, 자신의 어미가 자라왔던 조실마을과 마을 앞 너른 논밭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여름 햇살이 눈부신 날이어서 잠시 눈을 감았다. 가을 산들바람이 귓가로 스칠 때, 천천히 눈을 떴다. 그때, 멀리 내려다 보이는 조실마을 회관 앞 너른 공터 근처에서 갑자기 성별 구분이 되지 않는 맹랑해 보이는 작은 꼬마가 폴짝거리면서 팔방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는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걸까? 꼬마 아이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듯 뜀박질을 시작하더니 빠른 속도로 마을 앞을 벗어나 산모퉁이 뒤로 사라졌다. 잠시 후, 사라진 꼬마는 조실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제법 경사진 뒷산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다. 꼬마의 작은 다리와 종아리는 찰진 옥수수가 차 있는 듯 단단하고 질겼다. 짧은 다리가 쉬지 않고 움직여 고갯길을 오르는 힘을 만들어 냈다. 한 마리 날다람쥐가 나무를 오르는 듯했다. 큰아들은 온 마음을 집중하여 꼬마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았다. 왜 꼬마는 저 고갯길을 오르는 것일까? 꼬마는 삽시간에 뒷산 오르막길을 오른 후 이내 뒤쪽 내리막길로 사라졌다. 한동안 사라졌던 꼬마는 시야의 왼쪽 끝에서(지형적으로는 동쪽 끝, 시골마을 뒤편) 불쑥 등장하였다. 시골마을 뒷산. 젊었던 부부가 제 살을 깎아내듯 웃자란 사과나무를 잘라낸 자리. 그곳에서 꼬마는 뭔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일정한 방향성 없이 그저 분주히 움직였다.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꼬마는 결국 과수원 터 꼭대기까지 거슬러 올라갔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내려올 때는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 힘이 너무 거세어 넘어질 듯 위태롭게 달음질을 쳤지만 꼬마는 용케도 넘어지지 않고 과수원 맨 아래쪽에 도착하였다. 거기엔 잘려나간 사과나무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꼬마는 한동안 북쪽으로 난 하늘을 바라본 채 잘린 사과나무 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이제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사과나무 밭은 시골마을 뒷산의 북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해가 더 빨리 졌다. 꼬마는 아직도 꼼짝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이제 해가지면 바로 어두워지고 고갯길을 오르려면 무서울 텐데.. (큰 아들은 조바심이 났다. 어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야 해.) 해가 서산 너머로 사라지고 잘린 사과나무 더미 주위로 어둠이 짙게 깔렸을 때 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골마을 반대편으로 난 숲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제 되었다. 그만 내려가자' 그녀의 말이 한동안 자식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 또한 그 말을 하고서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왠지 모르지만 이곳에 오르는 게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제 되었다. 그만 내려가자' 그녀가 두 번째 말했을 때, 그제야 큰아들은 먼 곳에 있던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점심은 아버지 좋아하셨던 판교 냉면 먹으러 가요'
'이제 그 냉면도 못 드시는구나. 어째 그리 면과 국수를 좋아했을까.....'
산에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체중이 무릎에 걸릴 때마다 그녀는 조금씩 비틀거렸다.
'어머니, 근데 예전 사과나무 터에 혹시 아직 살아있을 사과나무가 있을까요?' 남편이 좋아했던 판교 냉면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큰아들이 그녀에게 물었다.
'.. 글쎄. 아마도 없을 거야. 사과나무는 아주 민감하고 약한 나무여서, 야생에서는 잘 견디지 못해. 다른 나무나 풀들이 무성하면 스스로 고사하고 말지. 이제 40년도 더 지났는데 살아 있을 수 없을 거야.'
큰아들은 꼬마가 찾아 헤매던 게 무엇이었을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혹시라도 살아있을 사과나무 한그루. 꼬마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반대편으로 난 숲길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다. 후회가 많이 남더냐
지금도 자식 걱정에 손녀 걱정이냐.
그만두어라 해도 그만두어지지 않더냐
그리 살다가 돌아보니 지금 여기까지 와 있는 걸, 뭘 그리 욕심내고 채근하며 살았더냐.
아이들은 행복하다고 하더냐
먼저 보낸 남편은 그리우냐
아버지가 아직도 원망스러워냐
남은 인생은 어떻게 살 것이냐
반대편 숲 속으로 사라진 그녀가, 온 힘을 다해 들판을 헤쳐 나와 산에 오른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