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다
72세를 넘기면서 그녀는 농사일을 하는 것 외에도, 다른 신체부위를 움직이는 것들을 시작하였다. 피리불기를 위해 초등학생용 악보집을 구입했고, 요가와 수영을 위해 본인이 직접 면사무소 무료 프로그램을 수강 신청하였다. 왜 그녀는 그런 것을 찾아 헤매는지...왜 평생 자신의 몸을 편히 쉬도록 놔두질 않는 것일까? 노동이 그녀의 몸에 맞았다고 봐야 할까? 과연 그런 사람이 있기나 한 것일까?
'지금도 남들 비해 무지 건강하신 편 아닌가? 뭔 욕심이 그리 많으셔?'라고 자식들이 물어왔을 때, 그녀는 이렇게 답하였다. ‘내가 혹시나 치매 걸려서 니들 한티 부담될까 그런다. 생각만 해도 끔찍해. 니들 맘고생, 시간낭비, 돈 낭비 허게 할 생각 하면 그냥 끔찍한 생각이 들어. 그래서 알아보니까 이런 게 좋다고 하네. 혹시나 내가 치매라도 걸면 내가 먼저 알아챌 것이니, 그 담부턴 난 찾지 말거라.’
평생을 자식들이 밖으로 나가 보란 듯 자리 잡고 살게 되는 것이 지금까지 그녀 삶의 유일한 목표였는데, 이제 나이가 들자 자식들에게 일절 부담을 주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가 삶을 사는 이유는 자식을 위한 모든 일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까지도 그녀는 젊었고, 그 젊음에 아이들은 혀를 찾다.
76세 되던 어느 날, 그녀는 아주 탁한 소변을 '일생 처음' 경험한다. 원인은 급성 독성간염이었다. 시골병원에서 서울 큰 병원으로 옮길 때까지 그녀는 조급해했다. 입원실을 방문한 큰아들은 생애 처음으로,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닥친 일로 날 것의 두려움과 걱정을 드러내는 것을 처음 목격하였다. 평소 건강에 자신 있었기 때문에, 처음 당하는 상황에 허둥거렸다. 자신에 대한 걱정은 일생을 통틀어 단 일 푼도 기울이지 않았던 그녀가, 자신의 건강 때문에 그리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생경하였고 안쓰러웠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붕괴된 상태 위에. 더 많은 할 일이 남아있는데… 내가 이렇게 약해지다니… 하는 허무한 깨달음이 동시에 그녀를 덮쳤다. 달리 말하자면, 비/로/소 그녀는 삶을 아주 강하게 애착하는 젊은 그녀로부터 갑작스럽게 벗어나고 있었다.
큰아들과 방문한 손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할머니 곁을 파고들며 할머니와 함께 했다. 둘은 반가워 웃다가, 마음이 아파 울다가, 먹는 얘기로 웃다가, 마지막엔 서로 화이팅! 하고 헤어졌다. 그것은 위로라기 보단 놀이에 가까웠다. 입원 후 경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지독한 악성을 걱정했던 가족들은 일회성 간염으로 확인되자 모두 안도했다.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인 건 그녀였다. 삶의 어느 선을 넘어선 모습,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에 모종의 변화를 여전히 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이제야 내려놓은 모습, 여느 76세 노인의 모습이 그녀에게 내려앉았다. 모든 가족들이 그녀의 그 모습을 낯설어했다. 그리고 그녀를 포함한 가족 모두는, 그녀가 죽음 혹은 삶의 길이를 초월한 어떤 존재는 아니었다는 걸,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척 삶을 지탱하기 위해, 강한 척 살아왔을 뿐이라는 걸 마침내 깨닫고 아득히 절망하였다.
지극히 평범한, 오래 살고 싶은, 맘 약한 할머니... 가족들은 그녀에게서 이런 모습을 발견하고 왜 생경해했을까? 퇴원 후 그녀의 모습은 더 안쓰럽고 조급했다. 평소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집안사람, 동네 사람, 하물며 기차에서 옆자리에 동승한 사람, 누구를 만나도 본인의 증세에 대해 하소연했고 조언을 구했다. 조언을 구하는 그녀의 나레이션은 항상 동일하였다.
나는 지금 멀쩡해. 누구보다.
지금도 너무 잘 먹고, 일도 많이 해.
그래도 크게 피곤한 줄 몰라.
잠도 이불에 닿으면 바로 잠에 들어
다른 노인 내들 다 있는 신경통 하나 없어
근디 왜 간수치가 안 떨어지는 몰라.
그녀의 마지막 말은 질문이라기 보단 통곡에 가까웠다.
마음을 편하게 먹고 음식습관을 바꾸고 더 이상 몸을 많이 움직이는 노동은 삼가라는 조언은 결론적으로 큰 효과가 없었다. 퇴원 후 30일이 지난 후 첫 방문진료에서 완전한 회복을 기대했던 그녀는 간수치가 소폭 올라갔다는 말에 크게 낙심했다. 독성간염 진단을 하고, 그에 맞는 처방을 한 병원 측에서도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어머니, 혹시 지난 한 달 동안 안 하던 거 하신 게 있나요?" 의사는 의구심을 자아내며 물었다.
"크게 없어요. 평소 오후에 하던 운동들을 새벽시간으로 옮겨서 하긴 했어요."
그녀는 낙담한 심정이 짙게 묻어나는 답변을 했다. 그녀가 새벽 4시를 운동시간으로 정한 건 주위 이목 때문이었다. 낮시간에 다들 바쁠 때 혼자 노는 것 같아 영 맘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새벽시간에 조용히 일어나 간단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맨발로 산책을 했다. 동내 주위 마을을 두루 거치는 약 4km 코스 빠르게 걷기를 4주째 하루도 빠짐없이 수/행/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수치 하락에 도움이 될 거 같아서였다. 의사는 혀를 차며 그 산책을 당장 그만두라고 조치했다. 너무 무리하게 몸을 혹사한 것이다.
간염 이후로 그녀의 삶은 현격히 달라졌는데 우선 자의 반 타의 반 그녀는 더 이상 논과 들에 있을 수 없었다. 남들보다 더 오래 건강할 거라는 믿음은 사라졌고, 그만큼 자신감도 잃었다. 더 이상 땅과 연관된 생산활동, 그로 인한 수익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이, 굉장한 낭패감을 불러왔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맹렬히 달려온 그녀 앞에 더 이상 나아가지도 뒤돌아가지도 못할 낭떠러지가 놓여 있는 기분이었다. 점점 말이 줄었다. 들에 나갈 수 없게 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같은 동네에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마을회관을 출입하는 것이었으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평생을 들에서 외톨이처럼, 땅과 싸우듯 살아온 그녀였기 때문에, 그녀도 어색했고, 그들도 그녀가 그 공간에 나타나는 것을 어색해했다.
다행히 간수치가 조금 내려앉아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집 옆으로 붙어있는 작은 텃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작은 밭이었고 주인 없이 버려진 땅이었다. 50평 남짓한 버려진 땅을 밭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 녹녹한 일은 아니다. 아침을 먹고 나면 그녀는 호미 하나를 들고 수건으로 얼굴을 감 싸매고 작은 밭으로 향했다. 그녀의 둘째 아들은 처음엔 반대했으나, 그녀를 멈출 길이 없다고 판단하고 큰 힘이 들어가는 밭 다지기를 이앙기를 이용해 끝내주었다. 이앙기로 다져진 밭에 고랑을 내고 씨 (어떤 씨건)를 뿌리는 일은 그녀에겐 일도 아니었을게다. 그녀는 작은 텃밭을 가꾸는데 평소 그녀가 들에 뿌리는 정성과 노력의 배를 더했다. 어떤 잡초도 자라지 못했고, 거름과 흙은 어떤 빈틈도 없이 조밀하게 메꿔졌다. 그녀의 작은 호미가 지나갈 때마다 밭은 하루가 다르게 더욱 융성해졌다. 그녀는 주식물로 고추를 심었고, 밭을 둘러 콩을 심었다.
어찌나 정성을 다했을까? 고추가 다 컷을 무렵, 한 나무에 두툼한 고추들이 너무 무겁게 열려서, 작은 아들은 각 나무들을 별도의 지지대로 튼튼히 묶어주어야 했다. 고추는 붉은 고추로 따서 여러 날 따스한 가을 햇빛으로 말렸다. 고추밭을 둘러싼 콩을 타작할 무렵, 고추 거둬들임도 끝이 났다. 비록 50평에서 나온 수확이었지만, 여느 밭의 80평 이상에서 나온 것과 비슷한 수확이 그녀 손에 쥐어졌다. 그녀의 아들로부터 고추와 콩 판 돈을 건네받은 그녀는, 한 푼도 남김없이 통장에 저금하도록 부탁했다. 예전 같으면, 자기 것, 자기 소유라는 개념이 없는 사람인 듯, 모든 노동의 결과 혹은 과정에서 생긴 모든 부수익을 모두 아들의 것으로 간주하고 일절 자신의 몫을 따로 두지 않았을 그녀인데, 이번 것(이번 것 이후로 계속)은 마치 잃어버렸다 돌아온 자기 물품인양, 아무 말없이 서둘러 자기 몫으로 따로 거둬놓기 시작헀다.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이 집안을 이끌어가는 생산과 수확의 과정에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 그녀는 스스로를 가족으로부터 분/리/하기 시작했을 수 있다. 그녀 본성 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붙어사는 건 염치없는 짓, 할 짓이 아니었다. 그 순간 그녀가 슬프게 깨달은 건 그녀 스스로 먹고 지탱할 수단이나 벌어놓은 게 일 푼도 자신의 소유로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결정적 깨달음이었고, 너무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스스로를 위해 부와 시간과 자산을 축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삶의 법칙이었으나, 그녀 전체의 삶을 통틀어 그녀에겐 이 법칙이 부재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자신의 그 부와 자산을 생산하는데 일체의 기여를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시점에서, 그녀는 70 평생 동안 부재했던 그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 순간이 어떤 느낌이었을까.. 깊은 허무였을까 후회였을까 자조였을까..
그의 자식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그녀가 탄식처럼,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들을 정리해보면, 일종의 자각 같은 순간이었던 듯싶다. 평생 동안 자신의 삶을 자식들의 삶으로 등치 시켜 살아왔는데, 그것은 결국 자신의 삶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었다. 그 자각은 자신이 평생 동안 자신의 삶의 내용이자 목표로 수행해왔던 '자식을 위한 생산과 자식을 위한 모든 행위'를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찾아왔다. 어떤 면에서는 어처구니없는 노릇이기도 했을 것이다.
평생 자식새끼들 걱정하는 것 말고 내가 한 게 무엇인가? 내가 좋아서, 내가 해보고 싶은걸 해본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나? 왜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나?
어느 것도 답이 되어 채워지지 않았다.
모르는 집에 시집을 와서 아이를 낳았다. 그녀가 온몸을 다해 낳은 아이만이 명백히 그녀의 소유였을 것이다. 이후 모성 포유동물의 감성으로, 그녀는 그녀의 모든 것을 자식에게 쏟아붓는 삶을 ‘자신’의 삶으로 살기 시작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의 삶은 동물적인 것에 더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더 이상 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함을 깨닫게 된 모성 포유동물은 본능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게 되는가?
작은 텃밭은 두 가지 위안을 주었다. 그래도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과 실질적인 수확. 실질적인 수확에 대해 그녀는 이젠 좀 다른 계산을 하게 된다. 평소 그녀 같았으면 응당 아들 살림살이에 포함시키는 게 정상이었으나, 그녀는 (이제부터)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 일한 것으로 앞으로 남은 생을 얻어먹는 정도는 크게 염치에 없는 일은 아닐 거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분리하여 스스로를 돌아본 순간 일 푼도 갖고 있지 않는 스스로의 모습은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조금씩 쌓아나가리라는 결심이 생겼다. 어떤 결실과 목표를 위해 살아온 그녀의 특성이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하지 못하는 순간, 비로소 그녀는 가족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었다. 가족과 분리되는 순간 그녀 스스로 그녀의 일부를 인지할 수 있었다. 자신의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살아온 것이 그녀의 인생이었다. 그녀는 이제부터 그 빈 속을 어떤 것으로든 채워놓고자 결심했다.
그녀는 새로이 정부가 시행한 법을 따라, 소정의 교육을 거쳐 장애인 등급의 남편을 수발하는 간병인 자격을 따왔다. 면사무소에 들러 필요한 서류와 자격을 확인하고 그다음 날로 모든 절차를 마쳤다. 월 몇십만 원이 주어지는 자리였기 때문에 하루도 늦출 수 없었다. 월 단위로 혹은 명절 때마다 자식들로부터 전달되는 현금들도 이제는 쉽게 손주들에게 흘리지 않았다. 모든 걸 그녀의 계좌로 분리해서 쌓아갔다.
훗날, 그녀는 큰아들의 둘째 딸이 미국 서부의 명문 대학교에 입학 허가를 받았을 때, 자신의 통장을 큰아들에게 건넸다.
"거기 학교 보내려면 네가 얼마나 힘들겠니. 학비가 비쌀 거 아니겠어?"
"아직 걱정 안 해도 돼. 모아놓은 거 있고. 미국 대학은 가정형편에 따라 등록금을 많이 깎아 주기도 해."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본다.
그녀와는 다른 삶을 살기를 원했다. 아이가 좀 더 편하게, 자식 걱정 없이, 말하자면 속 편한 부자로 살게 되길 원했다. 그러나 아이는 주저주저하며 그럴 것 같지 않았으나, 결국 그녀와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농사일이 회사일로 바뀌었을 뿐, 생을 사는 목적이 자식 뒷바라지에 있고, 자기 수중에 남은 건 없는 형국이 너무 자기와 닮아 있었다. 자식들이 밖으로 나가 잘 살길 바랬던 것. 밖으로 내보내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아지리라 믿었던 것. 다른 집들이 아이들을 품에 앉고 넘치지 않는 결실을 소중히 여기며 단단히 영글어 갈 때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은 뿔뿔이 밖으로 밖으로 흩어졌고, 밖으로 나아간 만큼 관계와 관계는 성글어지고 엹어진 것. 아이들이 바깥바람에 물들고 치인 채, 스스로 견디는 법을 배워야 했던 것. 모든 것이 닮아 있었다.
50을 앞둔 아이는 아직 번듯한 집 한 채 없이 바깥세상을 떠돌았다. 아이는 그 현실을 그리 버거워하지 않았다. 아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을,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했듯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투입하는 걸로 반평생을 살고 있다. 그녀가 그랬듯, 아이는 무릇 인생이 그런 것이라 여겼다. 그녀는 조실 고향 마을, 이십 리 떨어진 시집 마을, 차로 다섯 시간이면 도착하는 서울을 반경으로 이런 삶의 역경을 거쳐왔고, 아이는 고향 - 서울 - 미국으로 삶의 반경이 약간 넓어진 것일 뿐, 어미와 자식의 삶의 내용과 방향은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다른 자식새끼들은 그 유사성이 조금은 덜 하여, 자기 것을 챙길 줄 알고 작은 것에 기뻐할 줄 알고, 주어진 조건에서 자식들과 오손도손 하였다. 그들은 그녀로부터 배워야 할 것만 배웠다. 성실함, 염치, 주저함 없는 노동 등. 그녀의 손이 가장 많이 닿은 큰아들은 결과적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따라 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그녀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일까? 그녀의 질문은 스스로에게 닿아 가슴 한구석에 아득히 자리 잡았다.
그녀는 지난 3년 동안 모질게 한 푼 한 푼 모아놓은 통장을 큰아들에게 건네어, 그 돈이 미국 서부 유명 사립대학교에 입학한 손녀 등록금에 도움되도록 함으로써, ‘밖으로 나가 더 나아져야 한다’는 삶의 굴레를 아들의 다음 세대로 확장하고 있었다. 큰아들은 통장을 받아 들었다. 마음속으로 자신의 딸은 이미 이 굴레를 벗어나는 삶을 살기로 했을 거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 행위가 딸의 삶의 방향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