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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amoi Sep 30. 2021

소년. 그녀를 보는 또 다른 창 3

두 번째 상경. 가난의 냄새

1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아버지는 1톤 트럭을 운전하여 고불고불한 금호동 비탈길을 올라왔고, 얼마 되지 않은 이삿짐을 싣고 그다음 날 시골로 내려왔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소년은 아빠가 운전하는 봉고트럭 운전석 옆에 앉아 시골로 내려왔다. 소년이 내려온다는 소문은 일찍부터 마을 꼬마들에게 퍼져나갔다. 도착한 다음 날 아침부터 대문 밖 비탈길에는 소년의 또래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소년을 불러내었고, 소년은 번개처럼 아침밥을 먹어치우고 또래들 곁으로 뛰어 나갔다. 아이들은 잠시 동안 어색해했다. 소년의 말투가 약간 달라져 있었고, 얼굴빛이 달라져 있었다. 여름 가을을 지나면서 시골에 있던 또래들은 같은 빛깔로 물들어 가는 사이에, 소년은 햇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생활했던 까닭이다. 또래들은 잠시 동안 소년이 신기했고, 소년은 잠시 동안 서울 말투를 즐겼지만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이 모든 구분은 사라졌다. 


시골로 돌아온 소년은 그야말로 꿈 같은 국민학교 2,3,4학년을 시골학교에서 보냈다. 떠나기 전에도 다른 아이들보다 숙성한 면이 있던 아이였는데, 6개월 동안의 서울생활은 아이를 자의 반 타의 반 약간 다른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학업과 방과 후 활동, 모든 면에서 소년은 아이들의 중심이었다. 특히 학업면에서 소년은 다른 아이들의 추종을 불허했는데, 서울 아이들과 경쟁해서도 뒤지지 않았다는 자신감이 소년의 학업 성취도를 자연스럽게 배가시킨 듯했다. 소년은 모든 면에서 거침이 없었다. 


시골 4학년을 마친 소년은 겨울방학 때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1학년 때 올라왔던 기억이 소년에겐 뚜렷하지 않았으므로, 이번 상경이 소년에겐 본격적인 상경이었다. 소년의 심경은 복합적이었다. 지난 1학년 때와 달리 서울로 간다는 것, 새로운 아이들을 만난다는 것, 거기서 학교 공부를 한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은 가늠하고 있었다. 지난 2,3,4학년의 경험 때문인지 서울 아이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의 두려움보단, 새로운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조금 더 컸다. 


첫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치른 첫 시험에서 소년은 전체 반 학생 중에서 3번째에 해당하는 성적을 기록했다. 당시 서울은 인구가 폭발하는 도시였다. 시골에서 서울로, 지방에서 서울로 사람들은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밀려든 사람들, 토박이 사람들 가릴 것 없이, 셋방이건 전세건 자기 집이건 장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애를 낳았다. 전쟁과 절대 빈곤의 긴 터널을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공동체 절대다수는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라 확신했다. 그 확신은 엄청난 '애 낳기'로 이어졌다. 내일이,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순간, 다시 말하면 경쟁에 의한 도태 가능성보다는 존재 자체로 자신의 부와 영토와 후손이 풍성해질 것이라는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순간,  암컷/숫컷에게는 애 낳기가 어떤 행위보다 승산 있는 승부처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정반대로 애낳기는 99% 이상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승부이기 때문에 암컷/수컷들은 애 낳기를 포기한다. 자신들의 인생을 갈아 넣어도 자신과 자신의 후예들이 1%의 지배자들에게 먹히거나 정상적인 삶의 도정에서 도태될 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애 낳기를 포기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 합리적이고 / 효용 높은, 지극히 동물 본성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의사결정이다. 나아가 상위 1%에게 평생을 착취당할 바에는 상위 1%의 존재의 의미를 차라리 말살하고야 말겠다는 최후의 보복의 수단이자, 자신의 존재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일종의 자살테러이다. 생존/경쟁의 룰을 DNA에 새기고 있는 포유류는 경쟁에서 지고 비참하게 바에는 차라리 내가 죽더라도 너에게 치명타를 입히겠다는 결정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당시 강남은 더욱 그러하였다. 부와 인구가 동시에 팽창하는 그야말로 성장의 용광로 같은 곳. 교실은 책상으로 꽉 차서 여유공간이 별로 없었고 그 안에서 80명 정도의 아이들이 숨 막히듯 북적였다. 그런 아이들 속에서 시골티를 벗지 않은, 낯선 아이가 주목할만한 성적을 거두자 교실이 술렁였다. 

'선생님. 이게 누구예요?' 아이들은 익숙지 않은 이름과 시험 점수를 확인하고 담임선생님께 물었다.

'응, 저기 저 아이' 담임 선생님은 교실 뒤쪽에서 짝꿍과 열심히 떠들고 있는 소년을 가리켰다.

'와. 쟤가 우리 반 3등이에요?.' 


학기 초반이었지만 아이들은 이미 지난 학년에서 누가 우등생이었는지, 누가 반장이었는지, 누가 가장 부자마을에 사는 아이인지.. 이미 알음알음 알고 있었다. 낯선 아이, 낯선 이름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 번째 학기부터 반 회장도 맡았다. 서울 아이들은 시골에서 온, 시골스런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것이 신기했다. 소년은 공부뿐 아니라 축구를 포함한 아이들의 모든 놀이에서 상당히 두곽을 보였다. (시골의 들과 산과 나무와 시냇물과 저수지를 놀이터 삼아 하루 해가 부족할 정도로 뛰어놀던 소년이, 정해진 공간과 막힌 벽 사이에서 정해진 놀이를 하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은 일이었다.) 서울 아이들은 신기한 물건을 제 것으로 만들 듯, 소년을 자기네 집에 초대하여 가까워지고자 하였다. 


소년이 다니던 국민학교는 방배동에 위치해 있어서 강남구의 아이들과 동작구의 아이들이 반반 섞여 있었다. 아이들은 학교 교실에 있을 때는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그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방과 후에는 차이가 확연하였다. 사당동의 아이들은 거리에서 혹은 길목에서 시간을 보냈고, 방배동의 아이들은 집에서 학원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소년은 학교에 있을 때는 방배동 아이들과 방과 후에는 사당동 아이들과 주로 어울렸다.  


소년의 짝꿍 수진이는 그때 이미 엄청난 도수의 안경을 쓴 채 매 수업시간마다 곧은 자세를 유지했다. 선생님이 칠판에 판서해주시는 것 외에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최대한 노트에 기록해놓으려고 애를 썼다. 항상 남들이 알아듣기 힘든 질문을 해서 아이들의 이목을 받았고, 선생님에겐 칭찬을 받았다. 약간 통통한 편이었고 항상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당시 유행하던 포동한 여자아이 인형이 살아서 나타난 모습이었다. 점심도 혼자서 곧은 자세로 먹었다. 방과 후에는 학습지, 영어, 플루트 과외를 받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수진이는 반에서 5등 안에 드는 ‘우등생’ 그룹은 아니었는데, 이것이 수진이한테는 항상 스트레스처럼 보였다. 반에서 5등 안에 드는 아이들은 대체로 수업이나 시험에 크게 스트레스가 없고, 오히려 여유가 있었고 수업시간에도 장난꾸러기처럼 굴었다. 이 아이들은 이미 공부를 다하고 와서 이미 알고 있거나 아니면 크게 집중하지 않아도 내용을 습득하는데 큰 무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수진이는 10등 안에 드는 성적을 유지했다. 


수진이는 공부하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거나 집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소년이 항상 자기보다 성적이 잘 나오는 게 이상했고, 소년은 수진이의 모든 게 신기했다. 수진이는 너무 착했고, 너무 곧고, 너무 일관되었다. (어른이 된 소년은 아직도 수진이가 '넌 어떻게 공부해?'라고 진지하게 물었을때, '그냥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잘 들으면... 잘 안 잊혀져.'라고 대답했고, 그때 수진이가 '넌, 좋겠다.' 하면서 부러운듯 쳐다보던 눈빛을 기억한다. 누군가에게 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첫 기억이었다.)


3월이 지나자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소년은 방배동 삼호아파트에서 처음으로 소니 VTR로 성용의 취권을 보았고, 친구 엄마가 내어주는 생크림과 딸기를 먹었다. 삼호아파트에는 반 친구 3명이 살고 있어서, 삼호아파트 놀이터와 근처는 소년이 속한 아이들 모임의 주 놀이터가 되었다. 같은 삼호아파트에서도 '평'이가 살던(성 : 남궁, 이름 : 평) 3동 아파트와 다른 두 친구가 살던 2동 아파트는 많이 달라서 소년의 눈에도 그 차이는 쉽게 드러났다. 3동 아파트는 방이 4개, 평이는 독방을 썼고, 2동 아파트는 방이 2개에 거실이 부엌과 붙어있었다. 평이 집은 남향이어서 갈 때마다 거실 창으로 햇빛이 눈부셨던 반면, 2동 아파트는 거실 끝쪽으로 햇빛이 잠시 비췄다 사라졌다. 젊고 예뻤던 평이 엄마는 외동아들인 평이에게 극진했고 친구들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친절을 다 베푸셨다. 엄마가 외출 중이면 평이는 능숙한 솜씨로 중국음식을 주문하고 스/스/로 비용을 지불했다. 


5학년 봄, 어느 토요일. 점심. 삼호아파트 3동.  평이네 집에서 아이들끼리 주문해서 먹었던 짜장면과 짬뽕. 그 맛. 정신없이 먹으면서 정신없이 떠들던 기억. 그리고 마지막 순간. 음식을 계산할 때, 평이가 너무나 예의 바르게 배달 아저씨에게 건네었던 말.


'아저씨, 잔돈은 주셔도 돼요. 저희 엄마가 그러시라고 했어요'

'응, 맛있게 먹었니? 고맙다.'

'네. 수고하세요'


당당하고 예의 바른 평이. 그 꼬마 아이에게 고맙다고 말씀한 배달 아저씨. 소년의 눈에 비친 이 광경은 소년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숙제처럼 남았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거나 놀이터 시설이 필요할 때, 야구경기를 할 때면 삼호아파트에서 모였고, 학급신문을 만들거나 행사를 준비할 때면 방배 사거리 단독주택에 살고 있는 아이의 집에 모였다. 놀이가 끝나고 헤어질 때면 아이들은 가까운 집으로 돌아갔고, 소년은 먼 길을 걸어 사당동으로 돌아왔다. 


삼호아파트에서 멀어지고 사당동에 가까워질수록 건물의 높이는 낮아졌고, 거리는 더 어두워졌다. 소년의 의지와 달리 시간이 착실하게 흐르는 탓이기도 했고,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의 크기와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든 탓도 있었다. 소년은 길바닥 위에 놓인 돌멩이를 축구공 몰듯 툭툭하며 사당동 쪽으로 걸어 나아갔다. 둥글지 않은 돌멩이가 몇 차례 차임을 당한 후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면 다시 다른 돌멩이를 툭툭 차며 걸어 나아갔다. 마치 돌멩이를 차기 위해 걷는 것처럼. 돌멩이가 없어서는 걷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당동과 방배동을 가로지르는 개천(이 개천은 몇 백 미터 앞 한강으로 바로 흘러들었다)에 다다르면 소년은 멈춰 서곤 했다. 


이 개천을 건너면 사당동. 지금 서 있는 곳은 방배동.


개천에는 항상 검은 물이 흘렀고,  두 공간을 명쾌하게 구분해주는 냄새가 났다. 소년은 항상 이곳에서 머뭇거렸다. 방금 전 평이네 집의 냄새, 그것으로부터 더 이상 멀어지기 싫었던 것일까? 개천을 넘고 나면 평이네 냄새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두려웠을까? 소년은 항상 가/까/스/로 개천을 건넜다. 개천을 건너고, 자동차 하나를 건너면 사당동 반지하방은 멀지 않았으나, 소년은 집으로 곧바로 향하지 못하고 바람이 잘 드는 골목길에서 서성였다.


방배동에 가지 않는 토요일이면 소년은 사당동 집 근처의 아이들과 팽이를 치며 다방구를 하며 도로 위에서 놀았다.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승일이네 집은 사당동 남영시장 앞 큰길이 산기슭을 만나 끝나는 지점에 간이식으로 지어진 집이었다. (방배동에 사는 현주를 좋아했던 승일이는 소년이 방배동 아이들과 놀고 돌아오는 날이면 소년으로부터 현주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어 했다. 소년은 현주가 이번에는 어떤 옷을 입고 왔고, 어떤 얘기를 주고 했는지를 가능한 한 상세하게 승일이에게 말해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의무와 같았다. 소년이 현주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승일이는 소년의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고 빙긋이 웃다가 심각하다를 반복했다. 어떤 사유인지 승일이는 방배동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예전에는 연탄공장이 있었다고 했다. 승일이네 집에서, 골목에서 놀고 나면 코끝에 까만 먼지가 쌓였다. 쌓인 먼지가 답답해서 손자락으로 혹은 손끝으로 문지르면 검은 연탄 먼지는 물감처럼 아이들 얼굴에 자국을 남겼고, 꼬마들은 서로를 보며 낄낄거렸다. 




겉으로 보기엔 큰 문제없는 서울생활이 이어졌으나,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시간을 방배동과 사당동을 넘나들 수록.. 더 많은 시간 평이네 집의 냄새와 반지하방의 냄새를 교차하며 경험할수록, 소년의 마음에 어떤 '불편함'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승일이가 방배동 아이들에게 초대받지 않는 것이 불편했고, 냄새나는 개천을 오고 가는 것도 어느 순간 불편해졌다. 그럴수록 소년의 마음은 시골로 향하였다. 시골을 기억하는 순간 그런 불편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방앗간을 하는 상규네 집이나, 소작일로 여섯 식구가 먹고 사는 자승이네 집이나 먹는 것은 비슷했고 또래들끼리 놀 때는 오히려 자승이가 상규보다 더 재밌고 쾌활하였다. 시골에는 검은 물이 흐르는 개천이 없었고, 코끝을 까맣게 만드는 골목도 존재하지 않았다. 필시 승일이도 시골에서는 누구에게나 초대받을 것이라고 소년은 상상했다. 능숙한 솜씨로 짜장면과 짬뽕을 주문하고 배달 아저씨에게 팁을 건네주던 평이의 모습 때문에 주눅 들 일도 없었다. (물론 평이가 주문해주었던 짜장면의 맛은 잊을 수 없지만.)


그런 사유로 모든 방학이 시작하는 첫날, 소년은 어김없이 혼자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로 향했다. 그것은 일종의 의식과 같았다. 어떤 고민도 주저도 지체도 없었다. 엄마와 사는 동안이건 이모집에 묵었던 동안이건, 방학 다음날 시골에 갔고 개학 전날 상경했다. 그래서 소년은 항상 시골소년으로 남았다. 사오 개월 서울생활로 조금 허연 얼굴이 될라치면, 조금 서울 말투에 익숙해질라치면 어느새 여름/겨울 방학이 다가왔고 다시 시골소년으로 돌아갔다.


소년의 그 행위를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다. 자상한 이모도 한 번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혹시 그러는 편이 더 좋으셨을 수도 있다. 내려가고 올라가는 길은 대부분 혼자였다. 백 원 단위까지 계산되어 차비와 약간의 군것질 비용이 주어졌다.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붉은 색 직행버스는 천안, 공주, 부여를 거쳐 5시간 동안 달려서 시골에 도착했다. 소년은 차창 밖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정거장 풍경을 항상 뚫어지게 바라보고 기억했다. 작년하고 달라진 걸 또렷하게 찾아낼 수 있었다. 당시 시외버스는 천안, 공주, 부여에서 15분 이상 쉬어야만 했다. 엔진이 버티지 못했다. 어른들은 15분 동안 바깥 바람을 쐬고, 먹을 것을 사 먹고, 화장실에 갔으나 소년은 웬만해선 내리지 않았다. 차 안에 있어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시골에 도착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년이 도착하는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시골 동네는 비로소 생기를 얻은 꼬마들의 난장판이 되곤 했다. 소년과 동네 꼬마들은 새벽부터 해질 녘까지 모였다 헤어졌다를 반복했다. 방학을 마치고 서울로 출발해야 하는 날이 다가올 때마다, 소년은 극심한 거부감에 시달렸다. 마치 꿈속에서 모든 평화와 행복을 누리다가,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을 때 깨어나기를 거부하는 심정과 같았다. 소년에게 내일이면 닥칠 현실을 가장 강력하게 인식시켰던 것은, 머리 깊숙히 강인하게 자리잡은 내일부터 살아야 할 공간의 냄새였다. 엄마와 누이들이 아무리 닦고 말려도 지워지지 않았던 반지하 공간의 그 냄새, 공간이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서는 물건과 사람이 쌓일수록 복잡해지고 강해졌던, 누추한 그 냄새. 




소년이 충분히 성장했을 때, 반지하를 무대로 한 한국 영화 한 편이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영화의 특징 중 하나를 짚은 평론 중에서, ‘감독이 눈에 보이지 않는 냄새를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는 구절 있었는데, 어른이 된 소년은 단박에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소년은 영화를 봤고, 최소한 영화 속 등장하는 그 반지하와 그 반지하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이 풍겼다는 그 냄새에는 전혀 과장이 없음을 확인했다.  


사당동 반지하에서 하루 종일 맡을 수 있었던 보편적인 냄새 

하루 2~3시간, 좁은 창문의 절반 정도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으로는 도저히 말려낼 수 없던 그 냄새

그 냄새를 지우기 위해 누이가 덕지덕지 뿌려댄 방향제와 섞였던 그 냄새

공간이 수용할 수 없는 물건들이 켜켜이 쌓이고, 사이사이로 습기가 섞여 들어 서로 썩어 들어가던 냄새

생활/의복/음식.. 모든 것의 일부여서  그곳을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의 일부였던 그 냄새

잊고 살다가 방배동 친구 집을 갔다 오면 명쾌하게 전달되었던 그 냄새.

반지하 = 골목 = 절반의 햇빛 = 절반의 곰팡이 = 절반의 공생

학교의 운영진이라는 아이들이, 시골에서 온 이상한 아이와 친해지겠다는 이유로 찾아 들어왔을 때, 무엇보다 잊을 수 없었던 그 아이들의 표정 - 어떤 냄새인 건가를 두리번거리며 찾던 표정.

빨리 그 냄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작은 구실이라도 찾으려고 허둥거리던 아이들의 표정.


소년에게 그 냄새와 아이들의 표정은, 영화 속에서 송광호의 냄새가 뒷자리에 앉은 사장의 표정을 통해 스크린 밖 관객에게 전달되었듯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였다. 시골의 일상에서 냄새는 없었다. 너른 들판, 너른 마을터에 띄엄띄엄 자리 잡은 집들, 그중에서 할아버지의 집은 동네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 잡았던 터라, 마루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살랑이는 공기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소리는 들렸으나 그 공기에 이렇다 할 냄새는 배어있지 않았다. 냄새란 특별한 어떤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어야 하는 존재임이 마땅했다. 


시골에는 없고 서울에만 있던 그것. 방학의 모든 시간을 시골에서 보내고, 서울에 도착했을 때, 소년의 몸이 잠깐 굳어지고, 자신이 다시 어느 공간에서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지, 그것은 얼마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지를 퍼뜩 깨닫게 만드는 그것. 그것은 가난의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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