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손자
기억이 끝나는 곳 어딘가에 자리잡은 단어...혹은 이미지 중에 '송방'이 있다. 하루에 상하행 각각 (무려!) 6번의 대중교통 버스가 신작로를 따라 멈추고 출발하던 정류장이 있던 앞마을. 거기서 가장 번화했던 곳에 '송방'이 있었다. (송방이 거기 있어서 그곳은 번화한 곳이었다.)
지금 단어로는 '가게'가 '송방'과 가장 유사한 의미와 이미지를 갖는 듯 한데, 도장이 찍히는 종이 버스표를 취급하는 '대중교통 정류사무소' 역할까지 수행한 점에서 '가게'보다는 더 넓은 개념이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애지중지 다루는 방법 중 하나가 '우리 손자, 송방갈까?'하는 인자하시고도 기분좋은 말씀이셨다.
손자가 우울해보일때, 들일이 끝나 본인이 여유가 있을때, 혹은 비가 내려 잠시 일손을 놓으셔야 했을때,
할아버지는 손자의 손을 이끌고 '송방'으로 가서 박하사탕, 크랙커, 샤브레, 계란과자, 맛동산, 새우깡 등을 번갈아 손자 손에 쥐어 주셨다.
송방에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절묘하게 들어차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백화점 이상이었다 . 사람들이 많이 들락날락거리는 쪽에는 주로 과자류, 식음료류가 전시되었고, 버스표를 끊어주기도 하는 주인이 앉는 계산대 책상을 뒤로 돌아 들어가면, 좁은 통로 좌우측으로 온갖 생활잡화가 빼곡했다. 특히 성냥, 양초, 비누, 치솔, 각종 못 종류, 줄 종류는 필수였고, 파리잡이 끈끈이, 쥐잡이 약 등등...그야말로 덩치 큰 것 빼고 있을 수 있는 생필품은 모두 있었다. 한 두해 동안 거기에 머물러 먼지가 내려앉았다 한들, 주인이 툭툭 털어내고 닦아내면 이내 팔릴 만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송방의 이미지를 구글에서 검색해보니 그 이미지가 검색되지 않았다. 네이버도 마찬가지. 내가 명징하게 기억하는 어떤 명사+이미지가 두 포탈에서 동시에 검색되지 않는,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그나마 검색그물에 걸린 것은 보부상과 연결되어 지식백과와 위키트리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아래 밑줄 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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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검색결과
박완서 소설어사전 : 송방 [ 松房 ]
예전에, 주로 서울에서 개성 사람들이 주단, 포목 따위를 팔던 가게.
¶ 조선 팔도를 고루 누비며 5리(厘)의 이문을 위해 10리(里)를 쫓기를 마다않는 보부상들뿐 아니라 상업의 요지마다 자리잡고 그 일대 물산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여 때로는 담대한 매점으로 거액의 이윤을 노리는 소위 송방들의 돈과 물자의 모든 길은 개성으로 통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망』 상편.
[네이버 지식백과] 송방 [松房] (박완서 소설어사전, 2003. 7. 25., 민충환)
구글 검색결과
개성상인(開城商人) 또는 송상(松商)은 개성(開城)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고려.조선 시대의 상인들이다. 국내 상업과 해상을 포괄하는 국제 교역을 담당했다.
17~18세기에는 한양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사상(私商)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이들의 상업 활동은 중요한 교역로를 따라 전국의 시장으로 뻗어나갔다. 그 중 개성 송상의 활동은 경기를 중심으로 육로를 따라 북쪽으로 황해·평안 지방, 남쪽으로는 충청·경상 지방에 미치고 있었으며, 이들은 각지에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설치하여 조선과 중국의 상인들과 갓, 포목, 홍삼, 인삼등을 사고팔았다. 그들은 상호간에 단결하여 외래 상인들을 배척하였고, 도고 즉, 상품을 독점하여 이익을 취하는 데 능했는데 조선후기 상업의 특징이다. 이들은 복식부기인 송도사개치부법을 만들어서 사용하였을 정도로, 상품을 사고파는 규모가 큰 상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