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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amoi Jun 16. 2021

박유하 교수에 관한 단평

그의 페이스북 기고를 중심으로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 교수의 글과 포스팅을 간헐적으로 점검해왔다. 책 자체가 논란이 되는 과정에서 양적으로 일방적이었던 반대의견을 꿋꿋이 버텨내면서 반론을 제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고, (아무리 어찌 되었다 하더라도) 저 정도의 책이 법에 의해 고발되고 법정에 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책의 내용과 글쓴이의 자초지종에 귀를 기울여 왔던 사유이다.


아직도 무엇이라 정의하기 쉽지 않다. 그만큼 단박에 정의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Micro한 주장과 증명(팩트)을 쌓고 쌓아, 큰 틀의 주장을 만들어가는 스타일인데,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큰 틀의 주장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글을 조합하는 솜씨, 사유를 이어가는 능력과 객관성을 더해주는, (그 분야에 관련된) 지식의 풍성함이 잘 드러나는 글을 쓴다. 글 자체로는 나쁘지 않다.


정치사상 측면에서는, 완전 수구보수의 굴레에 갇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걸어온 민주주의의 여정에 대한 동의 수준과 협의의 정치가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한 언급을 볼 때, 폭넓은 중도 혹은 합리적 중도로 보기에 무리 없다.


일본에 대한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것을 연구하고 글로 피력하는 것이 그의 전문분야인데, 그동안 내가 알고 접한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 많아 가끔은 난해함을 느낀다. 한국 편인지 일본 편인지, 한국이 잘했다는 것인지 아닌지, 일본이 잘했다는 것인지 아닌지.. 과거와 현재와 앞으로의 관계에서 양국은 어디까지 잘잘못을 했고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고 어디로 가는 것에 합의하면 좋고 그러기 위해서 양국은 어떻게 잘하고 있고 못하고 있는지.. 좀 명확하게 서술해주면 좋으련만, 그게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여러 번 고민하게 만드는 글을 종종 던진다.


"위안부"로 대표되는, 한국/일본 간에 과거 벌어진 일에 관해 집필하는 과정에서는 사실관계에 대한 공방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므로, 그의 가치관/지향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가치관이 좀 더 명료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한국 대법원의 위안부 배상 판결 이후 한일관계가 구체적인 사안별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부터이다.  그리고, 그의 가치관과 지향에 대해 내가 명확히 정의할 수 있었던 것은 보다 최근의 일, 정확히 말하자면 2020년 4월 말에 일련의 시리즈 형태로 포스팅한 '토착 왜구는 어떻게 죽었나'를 읽고나서이다.


 그가 올린 많은 글들 중 가장 수준이 낮은 글로 보이는, 토착 왜구는 어떻게 죽었나? 는,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는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온갖 만행만에 만 주목하는데, 한국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 이에 못지않게 / 할 수 있는 만행을 일본인에게 저질렀다. 상대방을 절대 범죄자, 악으로 치환하기 이전에 우리는 스스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인지/인정하는 것이, 객관적이고 상호 건설적인 관계 정립의 출발점이다. 일본과 우리는 그런 관계 - 상호 건설적인 관계 -가 될 수 있었고, 그렇게 되어 오고 있었는데, 유독 문재인 정부 들어서, '비합리적, 비역사적인, 비사실에 기반한' 반일 의식이 노골화되는 것은 안타깝다. 문재인 정부가 잘못하는 몇 가지 중 하나가가 한 일 관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식과 사실의 왜곡에 기반한 것이어서 비지성적인 것이고 퇴행적인 것이다.’


......


그는 왜 급작스럽게 이런 수준의 글 - 설익은 개인의 정치적 소견을 조악하게 전달하는 글 - 을 올리게 된 걸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최근 사실관계의 공방에서 밀린 사례를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나의 추론이다.


그는,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게 일반적인, 아베 정부의 코로나 대응마저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일본 정부, 일본인 특유의 침착함이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비판받을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관련된 각료의 판단과 행위는 (우리처럼) 호들갑스럽지 않고, 일본의 특성을 감안하여 거시적이고 올바르다, 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일본 각료들의 침착성, 객관성, 균형성은 지소 미아/경제제재 관련한 양국 정부의 공방 시점에서, 그가 일본 정부의 일방적인 장점으로 언급하는 내용들이다.). 코로나 초기, 페리선에서 사람들을 내리지 않은 판단의 문제에 대해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글로벌 전문가들이 비판했을 때에도, 그는 일본 정부의 입장이 현명한 것임을 일본 전문가의 입을 빌어 옹호했다.


(지소미아/경제제재의 공방에서 그가 일본 정부의 시각을 옹호할 때만 해도, 혹시나 우리가(내가) 모를 어떤 사실, 내가 이해 못하는 어떤 맥락이 있지 않을까?를 고민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아베 정부의 코로나 대응은 총체적으로 실패한 것이 명확해졌다. 줄곧 일본 정부를 옹호해온 그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전 세계가 겪고 있는 미증유의 사태로써 코로나 국면에서, 일본 정부의 (그의 믿음에 대한) 배신은, 단순히 하나의 사안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게 된 것이다. 한국과 관련하여 일본 정부/아베 정부가 취한 이전의 모든 조치들을 옹호한 그에겐, 일종의 총체적 배신이자 그의 이론 기반/의식 기반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가 가진 일본에 대한 지식/애정의 깊이 측면에서 보면, 일본은 여전히 과거와 현재가 일치하는 전통적인 문화/경제강국이고 여전히 주변 국가들 중 민주주의와 합리주의가 탁월한 국가일 것이다. (큰 맥락에서 나도 그렇게 보는데 많은 이견을 갖고 있지 않다. 일본은 아직까지도 글로벌에 내놓을 수 있는 동아시아의 대표주자이다.). 핵심적으로 그가 놓치는 것은, 그 큰 맥락이 '근근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 그 밑바닥에서 발생하고 있는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일본 민주주의의 붕괴, 경제 펀드멘탈의 침식, 리딩국가에서 일개/이기적 국가로의 후퇴 양상이다.


일본은 어떠한 국가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코로나는 마치 쓰나미가 남기고 간 잿너미처럼 가장 확실한 답을 남겼고, 박유하는 그 쓰나미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된 것이다.


그는 정확히 '친일 주의자'이다. 과거의 어떤 행위로부터 정의되거나 연루된 좁은 의미의 '친일파'라기보다는, 보다 광의에서 보다 미래/건설적 관점에서 한일관계의 '친밀', '보다 밀접한 관계의 중요성'을 국익의 전술로 옹호한다는 점에서 광의의 친일 주의, 혹은 합리적 친일 주의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일본을 최우방으로 여기고, 일본과 정치/경제/문화를 포함한 모든 측면에서 긴밀한 교류와 협력을 수행하는 것이, 한국의 안정과 평화를 강화하고, 경제적 번영을 더욱 제고하기 위해 꼭 필요한 외교전략이라는 것이다.  


일본과 그런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하다고 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인식이 절대적인 동력이 된다.


1. 일본의 제국주의가 우리에게 그리 폭력적이지 않았고, 도움이 되었고, 우리의 현재의 바탕이 되었으므로, 미래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 바람직하고 합리적이다.


2. 일본이 우리보다 아직까지 [상당수준] 우위의 국가이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경제적인 측면, 넓게 정치 문화적인 측면에서, 일본과 협력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가기 어렵다. 적어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아군을 버리고 갈 필요는 없다. 결론적으로, 반일은 실리적으로 도움되지 않고, 역사적으로도 그리 타당하지 않다.


코로나에 대한 일본정부의 총체적 대응 실패(아직도 인정하지 않겠지만)는, 그를 지배하는 근본적 인식 중 2번째를 완전하게 상실시켰다, ('토착 왜구'같은 저급한 글은 이 상실감의 반대급부 아니었나 싶다.)


친일 주의는 '경제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위해 나쁜 제안이 아니다'라는 측면에서 '정치적'으로 교묘하다. 가장 가까운 이웃, 그것도 똑똑하고 잘난 이웃하고 싸우기보단 친하게 지내는 게 우리한테 유리하다..라고 말하는 건, 바득바득 사사건건 싸우려고 드는 그룹과 비교하면, 더 성숙한 듯하고, 더 현명한 듯하다. 그의 글 전체에서 의뭉스럽지만 일관되게 드러나는 것이 '스스로 더 성숙하다 하는 우월의식'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지점에서 위의 두 가지 핵심사항에 대해 우리 의식이 좀 더 잘 벼려진 것이 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두 가지 모두 사실관계의 한 측면만을 부각하여 현상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진술되는 특성을 갖는다. 이런 논제에서 특히 주의할 것이 주장하는 주체별로 무엇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것까지 포함하여 포괄적으로 사안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11. (어느 정도 우리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에게 절대악이었으며,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폭력이며, 그 잔재는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그는 이 부분을 묵과하고 넘어가자고 한다)


22. 2000년 초반까지 어느 정도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 이후 2는 점점 상실되고 있다는 점과 최근 상실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점.  


박유하  유사그룹이 주장/인지하는 1,2 관한 보다 사실적이고 포괄적이고 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은 11 22이다. 11 22 인지할  비로소 우리는 최근 '친일주의'  앞으로 친일주의가 얼마나 우스운 것으로 전락하는지 깨달을  있다.


쉽게 말해, 일본은 우리에게  이상 의미 있는 이웃도, 의미 있는 적도, 유일하거나 적어도 의미 있는 변수도 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일본은 이제 우리가 필요한 정도로, 우리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도로, 상호 예의를 갖춘 조건에서, 협력하거나 방치하거나 배제하면 되는 존재 이상 이하도 아니다. 우리가 친베트남하자, 반베트남하자고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는 것처럼..  이상 일본은 우리가 그만한 고민거리로 고려해야  대상이 아닌 것이 되었고, 이런 경향은 앞으로  빠르고 강해질 것이다.


첨언. 박유하 교슈는 과거사의 주요 사안, 사례를 다시 들춰보고 잘잘못을 따져보는 행위는 학문의 영역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므로 충분히 그 일을 잘하길 바란다. 다만 친일이 우리에게 이로우니 어쩌니 하는 철 지난 이데올로기는 그만 버려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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