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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람 Jun 29. 2021

#5 개발자를 갈면 돼요

개발경험이 전무한 스타트업에 멘토들이 남긴 말

살다 보면 인간관계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풀릴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2019년에 안동에 있는 콘텐츠진흥원에서 '모바일 UX UI 입문'이라는, 대체 무슨 뜻인지 알기조차 어려운 이름의 강좌가 개설되었을 때 그냥 호기심에 한번 신청해보았다. 모바일 앱 개발하는 걸 알려주는 강의겠거니 했다. 봉화에서 안동까지는 한 시간 걸려 차를 타고 가야 했기에 기름값도 아깝고 해서 내일학교 자람도우미 3명과 학생 3명이 우르르 몰려가서 거의 강의실을 점령하다시피 하고 수업을 들었다.


콘텐츠진흥원과 같은 곳에서 하는 강의는, 매우 훌륭한 강사진과 매우 열의가 없는 수강생의 미스매치를 연출하는 경우가 많다. 무료 강좌이기 때문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신청하는 경우가 많고, 절반쯤 나오다 말아버리는 일도 드물지 않다. 반면에 국가기관에서 진행하는 강좌라 그런지 강사들의 수준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리고 경북에는 모바일 앱 개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지 우리는 선생님을 거의 독차지하고 질문세례를 퍼부으며 개인과외 수준으로 배워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2년 뒤, 그 선생님은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선생님, 저희 졸업생이 창업을 해서 플랫폼을 만들려고 하는데요...


그 선생님은 베테랑으로서 여러 창업팀을 도와주고 멘토링도 해보았지만, 아마도 우리처럼 답 없는 팀은 처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분명 선생님은 강의 첫 시간에 '처음 앱 개발할 때는 알람이나 일정관리처럼 간단한 것부터 만들라'라고 알려주었건만, 왜 플랫폼란 말인가.


게다가 우리는 UX UI 뿐만 아니라 개발도 막막했기 때문에 혹시 주변에 멘토링이 가능한 개발자가 계시면 함께 모셔와 주십사 부탁을 했다. 그래서 100미터 바깥에서 보아도 '아 저분 개발자구나'라고 알아볼 수 있을 듯한 아우라를 풍기는 분도 난생처음 경북 봉화의 산골에 거의 납치되다시피 실려서 도착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치고 우리가 환영하는 마음으로 두 분에게 내민 것은 '보안유지 각서'였다. 오랜 대안학교 생활과 커뮤니티 활동을 거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좋은 문서가 좋은 친구를 만든다'는 금과옥조 같은 진리였다. 상대방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내가 그를 믿는지 못 믿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호의적인 관계일수록 예민하고 중요한 부분을 문서로 규정해두어야 불행한 사건을 방지할 수 있고, 혹 헤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깔끔하게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란 구현되고 나면 다들 '왜 저걸 그동안 아무도 안 했지?'라고 생각하는, 아주 작고 허무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불과 몇 달 사이의 간극으로도 선발주자는 후발주자를 따돌릴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만큼 진지하다는 뜻으로, 그리고 만약의 경우 두 분이 집으로 돌아가 편한 마음에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무심코 '경북에 있는 대안학교에서 글쎄 이런 걸 하더라고요~'라고 말씀하시지 말아 달라는 뜻에서 문서를 내밀었다.


워낙 경험 많은 베테랑이라 그런지 두 분은 보자마자 그게 뭔지 알았고, 쏘쿨하게 사인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 문서에 사인을 하면서 두 분은 약 5분 뒤에 뭘 보게 될지는 상상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우리가 한 달 동안 Adobe XD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만든 프로토타입은, 초짜들이 손대기엔 너무나 거대한 플랫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발표를 듣고 두 분이 처음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 솔직한 의견을 원하세요, 기분 좋은 의견을 원하세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두 분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아무리 잘 봐줘도 '곤혹스러움' 정도였다. 대체 이 시골 학교의 선생님과 학생들은 뭘 믿고 이런 걸 짰단 말인가. 말려야 하나 밀어줘야 하나.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는 솔직한 의견을 원했다. 일단 가장 큰 궁금증은, '개발이 가능한지'였다. 우리의 CTO 이현은 일단 컴싸 전공에 마이크로소프트 인턴 경력이 있긴 하지만 실전 개발 경험이 없는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비개발자로서 측정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본인도 자기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을 수도 있다.


그때 풀스택 개발자인 멘토 선생님께서 갑자기 CTO에게 마법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주문처럼 들렸다는 건 그냥 내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는 뜻이다. 나중에 CTO에게 물어봐서 복원한 두 사람의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멘토 : 그래서 이걸 어떻게 개발하려고 하세요?
CTO : 저희가 지금 개발팀 인력들이 다룰 줄 아는 언어가 자바스크립트 밖에 없어서요. 그걸로 프론트엔드랑 백엔드를 둘 다 하는 방향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MERN Stack으로 가려고 하거든요.
멘토 : (끄덕끄덕)
CTO : 지금 백엔드는 Node를 다룰 줄 아는 인력이 있으니 걱정이 안 되고, Express는 당연히 따라가는 거고, Mongo DB랑 React만 조금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면서 하려는 계획입니다. 이 정도 규모에 별 무리가 없겠죠?
멘토 : 네,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대마법사께서는 우리를 보고 말씀하셨다.


개발자를 갈면 어떻게든 되겠네요.


...설마, 개발자를 바꾸라는 것인가? 역시 이 시골에서 우리 힘만으로 이런 서비스를 만드는 것은 무리인가? 오만가지 생각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멘토님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기획이 이 정도로 다 나와 있으니, 개발자를 갈아 넣으면 어떻게든 서비스는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 개발자를 갈라는(change) 게 아니라 갈아 넣으라는(blend) 뜻이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판교 공밀레의 전설이었다. 우리 서비스가 무슨 인공지능이니 생체인식이니 하는 엄청나게 어려운 기술적 성취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CTO가 컴싸 전공생이니 물어물어 가면서 어떻게든 만들 수는 있을 것 같고. 그래서 멘토님이 내린 결론은 '쟤를 갈아 넣으면 된다'였다.


안도하고 있는 우리의 표정을 보고는 여전히 감을 못 잡고 있음을 간파한 UX UI 선생님이 이어서 말했다.


사실 제가 걱정되는 건 더미 데이터예요. 일반 유저가 구글, 애플 앱스토어에서 앱을 다운받았을 때 텅 비어있는 경우 보셨어요? 없죠? 이미 판매할 수 있는 상품하고 유저들의 포스트가 올라가 있어야 돼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더미 데이터'라는 말 앞에 우리의 표정은 거의 덤앤더머가 되어버렸다. 그게 뭘까? 더미 데이터라는 건 어떻게 만들지?


제가 스타트업 멘토링 많이 다녀봤는데, 여기처럼 인원 많은 곳은 별로 없었어요. 선생님들하고 학생들 열심히 뛰어서 초기 서비스에 들어갈 셀러분들을 만나서 더미 데이터를 만드세요. 제가 보기에 여긴 그게 강점이에요.


그렇다. 지금 우리가 할 것은 개발 걱정을 하고 UI를 1픽셀 단위로 짜고 MAU 백만 명이 되었을 때의 어뷰징 위험에 대비한 알고리듬을 고뇌할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서 발품을 팔며 잠재고객을 만나는 일이었다.


두 분은 그 외에도 두고두고 피가 되고 살이 될 조언을 쏟아주셨다. 다시 먼길을 더듬어 돌아가실 멘토님들을 성대하게 배웅하고, 우리는 드디어 사업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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