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가람 Jul 05. 2021

#6 바보야, 진짜 고객은 네 생각과 달라!

처음으로 살아있는 진짜 고객을 만나다

한 번도 연애를 안 해본 사람이 연인과의 만남을 상상 속에서 그려볼 때, 그것은 실제 연애와 상당히 큰 간극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상상했던 고객과 실제 고객과의 거리가 딱 그랬다.


처음 서비스를 기획하고 잠재고객에 대해서 페르소나 시트를 만들어서 그려볼 때, 우리의 상상은 대충 이러했다. 뭔가 코로나 시국에서 온라인 판매를 원하는 농민 또는 소상공인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우리는 그분들을 도와서 디지털 격차의 창대한 심연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취지는 참 좋은 것이었고,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디지털 격차라는 것이 우리가 상상한 영역을 뛰어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처음 우리가 시도한 것은 경북 지역의 친환경 유기농 생산자 분들을 만나 뵙는 것이었다. 농민이라면 누구나 수확 시점에 제때 판매되지 못해 썩어 버리는 재고가 있기 마련이라, 대부분은 우리를 반겨 주셨다. 문제는 입점 신청서를 받는 시점에 일어났다. 모두가 휴대전화는 갖고 계셨다. 요즘은 대부분 스마트폰을 쓰시므로, 아이폰이든 안드로이드폰이든 이메일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메일 주소를 여쭤보자, 상당수의 셀러들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메일? 난 그런 거 없는데?



엄마 뱃속에서부터 한 손엔 마우스, 한 손엔 스마트폰을 쥐고 태어난 세대인 우리들은 그 순간 제대로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그렇다. 세상에는 이메일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다수를 차지한다. 우리가 좀처럼 만날 일이 없을 뿐.


연령대와 성장배경에 따라서는 알파벳으로 뭔가를 입력한다는 것 자체가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인 분들도 계셨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 외에는 한글로 무엇을 쓰는 것을 꺼려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분들에게 온라인이란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장벽이었다. 나에게 아랍어로 뭘 하라고 하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이런 경험은 매우 귀중다. 우리는 서비스를 설계할 때 영문 알파벳으로 된 아이디를 유저의 식별자로 하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휴대폰 번호를 디폴트로 하기로 했다(물론 휴대폰 번호가 없는 경우에는 이메일을 사용할 수 있도록 예외는 허용했다).   



너희를 어떻게 믿니?


아직 제대로 된 홈페이지도 없고,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도 아닌 스타트업 멤버를 경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에 전화를 걸었을 때 많은 분들이 처음 보인 반응은, '이 번호 어떻게 알았어요?' 였다(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웹사이트에 모두 공개되어 있는 번호였다). 그 다음에 어찌어찌 약속을 잡아 만나러 가면 어떤 분들은 자기 가게나 집으로는 찾아오지 말라며 카페, 면사무소, 기차역 대합실(!)과 같은 장소에서 미팅을 했다.


하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해보면 그분들이 상상한 것보다 우리가 너무 어렸고 진짜 학생이었기에 경계심을 푸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갈 때마다 내일학교에서 키운 닭이 낳은 달걀을 선물로 싸가지고 갔다. 상당수 셀러들, 특히 농민들은 우리가 직접 기른 닭이 낳은 달걀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을 여시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농사짓고 가축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아는 분들이라 그랬던 것 같다(우리가 처음에 돌았던 봉화, 영주, 안동 지역에서는 소상공인들도 크든 작든 농사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 태블릿을 구입해서 프로토타입을 (큰 화면으로!) 직접 모여드리면서 설명하자 좀 더 경계모드에서 관심 모드로 넘어가는 시간이 짧아졌다. 어쨌든 우리 서비스의 프로토타입은 가로세로 그리드가 잘 맞고 언스플래시에서 골라뽑은 사진들이 예뻤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대안학교 출신 학생들과 선생님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수상하지 않다고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대체 왜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한데?



우리가 하려는 이커머스 플랫폼은 국세청에서 '전자상거래 소매 중개업'으로 분류되는 업태를 가지고 있다. 이 경우 고객은 우리에게 물품대금을 지불하고, 우리는 그 대금의 일부를 셀러에게 지급하게 된다. 우리가 셀러에게 대금을 지급할 때, 만약 셀러가 사업자번호가 있다면 그분들이 우리에게 세금계산서를 발행하면 된다. 문제는 셀러가 '개인'일 경우, 기업이 개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대금을 지급하려면 그 사람의 주민등록번호를 알아야 한다는 데에 있다.


아마도 외국의 경우에는 주민등록번호 같은 만능 식별번호가 아니라 국세청에서만 쓰는 납세자 번호가 따로 있고, 그 번호는 경우에 따라 바꿀 수도 있는 것이라서 그걸 누군가가 안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놈의 대한민국에서는 만능키 주민등록번호를 알아야만 돈을 지급할 수 있다. 그리고 보이스피싱의 천국인 이 나라에서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민등록번호를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특히 농민들은 사업자등록을 하지 않고 '농업경영체'라는 것을 등록하는데, 이것은 1,000제곱미터 이상의 농지를 직접 경작한다는 것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사람들에게 나오는 확인서이다. 이게 있어야 농업인 자격을 받고 각종 면세 혜택과 지원 혜택 등을 받을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농업경영체에게는 사업자등록번호가 나오지 않고, 오로지 당사자의 주민등록번호로만 식별이 된다.


우리는 이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 한두 달간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다. 그건 괜찮았다. 하지만 농민분들께 이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통장에 돈 보내주면 되지, 왜 주민번호를 요구하는 것이냐? 너희 사기 치는 것 아니냐? 팔아주면 팔아주는 거지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묻는 것이냐? 난 안 하겠다. 이런 반응들을 거의 매일 겪어야 했다. 심지어 그분들 중 상당수가 크든 작든 보이스피싱 또는 카톡 사기를 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런 반응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것은 디지털 격차와는 또 다른, 일종의 행정 격차라고 볼 수 있었다. 결국 이 부분은 주민등록번호 관련 법률이 바뀌거나, 아니면 우리가 규모를 키우고 사회적으로 신뢰를 얻어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개인정보를 이유로 입점을 거절하시는 분들은 어쩔 수 없이 다음 기회에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나라에서 해야 하는 일인데... 제발 국가지원 좀 받어!



정말 농담 안 하고 가는 곳마다 들었던 말이다. 디지털 격차로 인해 코로나 시국에서 생존을 위협받게 되는 농민과 소상공인들을 위한 온라인 플랫폼 사업을 한다고 하니 그건 국가에서 해야 하는데 왜 너희들이 하느냐며, 이런 건 군청이나 도청에서 지원받아야 한다고 다들 하나같이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셨다. 사실 농업경영체 등록이 된 농민들에게는 각종 혜택이 많다. 그냥 농사를 짓기만 해도 '직불금'이라는 이름으로 통장에 돈이 그냥 꽂히고, 종자를 지원하거나 비료를 지원하거나 농기계 구입을 지원하거나 인력을 지원하는 등등의 사업들이 대단히 많다. 그래서 농민들은 우리에게 더더욱 국가지원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나중에 국가지원사업 이야기도 하겠지만, 사실 그분들의 생각처럼 지자체 또는 국가기관의 지원을 받는 것은 결코 쉽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현금지원 같은 것은 더더욱 그랬다. 그보다는 행정지원이나 홍보지원, 혹은 네트워킹 등에서는 도움을 받을 일이 꽤 있었는데 이것은 현재진행형이므로 꽤 나중에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셀러분들은 이미 자신의 사업도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를 더 걱정해주셨다. 그것도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귀찮아. 안 할래.



발품을 팔며 돌아다니다 보면, 정말 탐나는 상품을 가진, 멋진 셀러들이 은근 많았다. 대체 이런 게 왜 안 팔리고 안 알려졌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어찌어찌 연락처를 받아서 만나러 가보면, 처음엔 가게나 밭을 보여주다가 집안을 보여주시거나 선물을 바리바리 싸주는 분들도 계셨고, 주변 상인을 불러다가 직접 소개시켜주는 분도 계셨으며, 내 아들과 나이가 같아서 그냥 보낼 수 없다며 꼭 밥을 사주겠다는 분들도 계셨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시간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고 심지어 영상 인터뷰까지 촬영한 뒤에도, 어느 순간엔가 입점을 포기하는 분들이 심심찮게 나왔다. 대부분은 구체적인 개인정보를 주어야 할 때, 사진을 찍어야 할 때, 조금 복잡한 프로세스에 진입할 때였다. 아마 이분들은 현재의 재정상황이 그리 어렵지 않거나, 혹은 번거로운 것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튼 우리는 몇 주에 걸쳐 공들여 입점을 위해 시간과 비용을 써 왔는데 사소한 일로 물거품이 되면 정말 맥이 빠져버리곤 했다.


하지만 아직 출시도 안 한 플랫폼의 입점을 꼭 하라고 밀어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사람 사는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냥 포기할 일도 아니었다. 이런 내용은 '보관' 폴더에 넣어놨다가, 나중에 우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그분 주변에서 다른 셀러들이 눈에 띄는 성과를 내게 되면 다시 만나 뵙고 입점을 권하기로 했다.


이런 난항들을 겪기는 했지만, 실제로 발로 뛰면서 셀러들을 만나본 경험은 정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었다. 괜히 앞서 간 스타트업 선배들이 발품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돌아보면서 알게 된 것은, 정말 괜찮은 분들이 온라인이라는 장벽을 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과, 디지털 격차와 온라인 장벽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어떻게 소외시키고 있는가 하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개중에는 실력이 있음에도 시간과 여유가 없는 분들도 많았는데, 그분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그냥 아무것도 신경 안 쓰고 OO만 하고 싶어!



OO 자리에는 농사, 장사, 빵 굽기, 만두 빚기, 그릇 만들기, 그림 그리기 등등 모든 것이 들어갈 수 있었다. 다른 번거로운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사랑하는 것만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야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는 하나의 이상이 아닐까. 우리는 점점, 우리가 하는 작업이 누군가의 삶에 매우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5 개발자를 갈면 돼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