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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Jun 29. 2018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떠나보내는 유월

나는 오늘도 박스와 테이프를 듭니다, 한 권의 책을 위하여


[가랑비메이커 작업일지] 당신에게 내 페이지가 닿기까지 열세 번째 이야기

독립출판, 당신에게 꺼내보이고 싶었던 나날들

*당신에게 가랑비의 페이지가 닿기까지의 이야기




당신에게 닿은

한 권의 책




오래도록 책장에만 꽂혀 있는 책, 밖을 나설 때마다 잊지 않고 챙겨 나오는 책, 오래 기다려온 책 혹은 생각도 않다가 선물로 받은 책.


어떤 이유로 당신에게 닿았든지, 어떤 형태로 어떤 내용을 품고 있는 책이든지- 우리는 책을 대할 때 페이지 속 텍스트에 집중한다. 책 속의 서사 혹은 겉의 표지, 작가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책을 감싸고 있는 비닐은 누가 입혀둔 것일까? 책방에 책이 오기까지 어떤 시간들이 있었을까? 하며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조금은 엉뚱하게도 느껴지는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극소수일 것이다. 보통의 우리가 생각하는 책, 우리가 생각하는 서점들에게서는 그런 것을 궁금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테니.


그러나, 내가 3년 간 내고 있는 책들과 그 책들로 인해 맺어진 인연들이 가득한 책방에서는 그런 엉뚱한 궁금증이 고맙다. 독립출판으로 밖을 나선 책, 그런 책들이 가득한 독립 책방. 그곳에서는 당신에게 한 권의 책이 닿기까지의 과정이, 그 책 속의 서사만큼이나 촘촘한 서사가 있고 때때로 아주 다이내믹하니까 말이다.




구부러진 손가락

유월의 끝자락


특별개정판으로 돌아온 장면집 3쇄와 단상집 시리즈
장면집 3쇄의 후원자분들을 위한 발송건


이제는 그래도 많이들 들어보았을 독립출판은 말 그대로 독립적인 출판, 즉 집필은 물론 디자인과 유통까지 독립적으로 해결하는 출판 시스템을 말한다. 이제는 독립제작자들을 위한 편리한 시스템을 제공하는 곳들도 많이 생겨났지만 나는 여전히 모든 걸 스스로 해내고 있다.


집필은 당연한 것이고 모든 디자인과 유통, 그리고 때때로 있는 이벤트 모임의 기획부터 실행까지. 2015년 10월부터 지금까지 3년 간 해온 이들이지만 때때로 벅차게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나 이번 유월의 끝자락이 그렇다. 수개월 간 재고가 없었던 장면집의 중쇄를 특별 개정판으로 욕심을 부리게 되면서 제작비는 1.6배로 늘었지만 동일하게 판매하기로 마음을 먹으며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책의 실물을 만나자마자 그런 계산적인 서운함들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지만)



사실 중요한 건 제작비가 아니었다. 오래도록 절판되었기에 앞선 요청 건이 밀려 있었고 미리 예약 구매(후원) 자들에게 발송될 건도 많았다. 장마가 시작된 금주의 화요일, 책이 도착하자마자 나는 언니와 함께 그 많은 박스들을 쉬지 않고 날랐다. 좁은 방에 자리를 채 잡기도 전에 박스를 열어, 외출하기 전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포장을 했다.


물론 그러고도 시간은 부족했다. 남은 책들은 외출에서 돌아온 뒤에 잠들기 전 새벽까지. 다시 일어나자마자 세수만 마친 뒤 로션도 잊은 채 좁은 방에서 책들과 박스들과 씨름했다. 그 사이 역사적인 경기가 되었던 러시아 월드컵 2018 독일과의 경기가 있었고, 그 승리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꽤나 긴 시간을 들였지만 혼자 하는 일이기에 속도는 더뎠다. 단상집 시리즈에는 모든 책의 첫 페이지에 히든 문장 메모지를 적어두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손가락은 굳어지고 속도는 쳐졌다. 누군가는 내게 "굳이 안 해도 모를 텐데, 여기까지 했으니까 됐어. 그냥 업체에 맡기는 게 빠르지 않아?" 라며 괜한 고생을 한단 식으로 조언을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수많은 서점들 가운데, 작은 동네 책방을 찾아서. 다양한 책들 가운데, 나의 책을 만나준 이름 모를 그들에게 내내 잊히지 않을 첫인상을 선물해주고 싶다. 그 첫인상을 위해서 메모지를 반으로 가르며 TV를 보는 일, 작은 메모지 안에 문장을 새겨 넣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이 나 역시 지겹고 힘들다. 그러나 이름 모를 그들과 언젠가 만나 눈을 맞추며 나눴던 한마디들이 너무 달아서 나는 이 수고로움을 놓아버릴 수가 없다.


불평할 수 없이, 계속해서 나의 책들을 찾아주는 독자들과 책방들이 고맙다. 그래서 나는 구부러져 가는 손가락을 주물러가며 하루를 보낸다. 책을 펼쳐 메모지를 끼워 놓고 비닐 옷을 입히고 박스를 접는다. 그리고 그 박스들을 옮기며 땀을 흘린다.


누군가는 작가라는 내 직업을 듣고 나면 "잘 어울려요. 지적이네요." 라며 우아한 칭찬을 해줄지 모르지만, 그 앞에서 나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감사합니다." 우아한 인사를 전할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알겠지. 한 권의 책이 당신에게 닿기까지 나의 머리가 얼마나 헝클어지고 등이 땀으로 젖으며 손가락이 구부러져야 했는지를.




(후일담) 서점에서



포장을 하다 말고 잠시 외출을 했었다. 약속된 시간을 기다리며 들른 대형 서점에서 시원한 에어컨을 맞으며 반듯이 세워진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서점에 놓이기까지의 수고로움이 작가의 몫이 아닌 책들을 매만지며 괜히 부러워지기도 했고 단단한 다짐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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