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듬어 둘 것

콩나물 국을 끓이다가

by 가랑비메이커


오랜만에 내게 주었던, 꽤 길었던 쉼을 끝내고서 집에서 맞은 늦은 아침. 환하게 볕 든 부엌이 낯설게 느껴지던 찰나, 콩나물 국을 끓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냉장고를 열어 꺼낸 파가 시들했다. 빨간 끈에 꽁꽁 묶인 채로 채소 칸에 오래도록 숨을 죽이고 있던 파들. 오랜 시간, 다른 것들에 마음을 두고서 외면하고 싶었던 것들을 들킨 것만 같았다. 나는 그 가운데 덜 상한 것을 골랐다. 국을 끓일 때 필요한 만큼만 다듬으려다가 말고 칼질을 멈췄다. 다시 냉장고 문을 열어 처박듯 넣어두었던 파 한단을 꺼냈다. 빨간 끈을 가위로 끊어내고 모든 파들을 흐르는 물에 씻겼다. 그리고는 썩어 들어가는 파 끝을 다듬었고 언제든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적당한 크기로 잘라두었다. 흙 묻고 뒤엉켜있던 파들이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을 보니 마음마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제 파가 필요해질 때면 조금 더 상쾌한 마음으로 요리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아니면 오늘처럼 콩나물국. 그 어떤 요리를 하든 반드시 들어가야만 하는 파처럼, 그 어느 곳에 누구와 있든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내 마음 조각들도 잘 다듬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들이 조금은 성가시고 힘들지 몰라도, 그 어떤 시작에서든 머뭇거리는 일이 없도록.






하루 가운데 한 장면, 한 문단을 나눕니다.

/ 당신의 인디, 가랑비 @garangbimaker


4권의 책을 냈고 두 눈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보통의 서사와 평범한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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