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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Sep 05. 2019

최초의 적금 만기, 그리고 오래된 미러리스 카메라

나와 언니, 우리가 서로에게 보내는 애정의 방식

나와의 대화 4

전할 수 있어 기쁜 사람



'작은 방 거울 앞에서 소곤소곤 인물을 연기하는 언니에게 카메라를 선물하고 싶어.'


내 인생 최초의 만기 적금은 대학 시절 짬짬이 하던 아르바이트 월급과 차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용돈을 아끼고 아껴 모았던 100만 원 남짓이었다. 살뜰히 모아둔 만기액의 최대 지출은 언니의 대학 졸업 선물이었다. 소니 미러리스 a5100.


연기를 전공하며 다양한 이유로 카메라 앞에서 서는 언니가 중요한 오디션을 앞둘 때면 늘 작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표정을 관찰하며 인물을 연습하는 모습이 멋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늘 뭉클하곤 했다. 거울보다는 카메라로 셀프 영상을 남겨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도록 해왔던 참에 적금은 만기가 되었다. 적절한 타이밍으로 당시의 나로서는 무시할 수 없을 금액의 카메라를 구매했다.


평소 카메라에 대한 관심도 지식도 없어 작업법도 몰랐던 내가 신촌에 위치한 큰 가전제품 매장으로 들어가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밝은 조명과 매끈한 바닥을 지나고 부부나 가족 단위의 손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미리 찾아두었던 모델명을 속으로 되뇌다, 가장 먼저 눈을 마주친 직원에게 당당히 외쳤던 순간. 이런저런 설명을 하며 값이 더 나가는 카메라 모델을 내게 들이댔을 때는 잠시나마 마음이 흔들리곤 했지만 이내 정신을 다잡고서 소니 미러리스 a5100 박스를 품에 안고 나올 수 있었다.


신촌에서 집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까지 그 얼마나 가슴이 벅찼는지 모른다. 아마도 최초의 만기, 최대의 지출이라는 키워드와 더불어 누군가에게 생각도 못할 만한 선물을 전해준다는 그 사실이 스스로도 감격스러워 가슴이 뛰었던 것 같다. 긴 여정을 끝낸 뒤 마침내, 짠!이라는 말과 함께 언니에게 카메라 박스를 전했을 때서야 괜한 긴장감이 풀렸다. 깜짝 놀라 눈만 끔뻑거리다 눈물을 찔끔 흘리던 언니를 보며 사람들이 갖은 오해와 수고를 감수하며 서프라이즈 이벤트에 중독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새 카메라로 인한 감동이 지난 후에는 내 기대와는 달리, 카메라가 작동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러 이유로 언니가 바빴던 탓도 있지만 아무래도 찍히는 일이 아닌 스스로 찍는 일에는 어색함도 수고도 따르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내심 서운하기도 했다. “이제는 영상 안 찍어?”, “생각보다 별 도움이 안 되나 보네….” 라며 꼭 그 서운함을 티 내고 마는 속 좁은 동생이 바로 나였다.


다행히도 그 귀여운? 투정은 오래가지 않아 멈추었고 되려 내가 무심해지고 나니 언니는 매일 같이 카메라와 함께하기 시작했다. 모니터링을 위한 연습 영상부터 간단한 프로필 영상 등 스스로 영상 콘텐츠를 기획하고 촬영하는 일에 즐거움을 붙이기 시작한 언니는 작년부터 유투버라는 새로운 포지션에 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365일 중 300일 정도를 함께하다 보니 카메라에는 심심치 않게 잔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때로는 만만치 않은 수리비에 대한 부담으로 잠시나마 카메라는 가방 속에서 휴식을 즐기기도 하는 것 같았으나, 이내 건강한 모습으로 언니의 시선을 부지런히 옮겨냈다.


오늘은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수리를 마친 녀석을, 내가 데리고 오기로 한 날이었다. 늘 동네 센터에 수리를 맡겼으면서 오늘 내가 다녀와야 할 곳은 집에서 2시간이나 걸리는 남대문 수리 센터였다. 날도 덥고 조금 지치기도 하여, 걸려온 언니의 전화에 다소 까칠한 목소리로 굳이 서울에 맡긴 이유는 뭐냐고 물었더니 "거기가 조금 더 잘해준다는 말이 많더라고."라는 미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수리 센터가 다 같은 것이 아니냐 라는 말을 하려다 삼키고 전화를 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접수 순번이 다가오고 카메라를 수령하려는데 "이 카메라 참 잘 쓰고 계신가 봐요. 사용감은 있는데 이 정도면 오래 잘 쓰고 계신 거예요."라는 기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괜히 마음이 찡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카메라를 걱정했을 언니를 안심시키고 이번 수리비는 내가 지불하는 것으로 했다.


어색하게 카메라 가방을 메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이런저런 장면들이 눈 앞을 스쳤다. 며칠간 <소니 카메라 수리 센터>, <친절하고 잘 고쳐주는 소니 센터>와 같은 키워드의 검색을 통해 여러 후기를 보며 카메라를 만지작 거렸을 언니. 그리고 그보다도 훨씬 전 <소니 미러리스>, <입문자용 카메라>와 같은 키워드 검색과 여러 사이트 가격 비교에 열을 올렸을 대학생 시절의 나.


매일 새로운 것이 나오는 이 세대에서는 꽤 오래된 카메라임에도 여전한 마음으로 아끼고 함께해주는 언니가 참 고마웠고 가난한 시절을 졸라매며 카메라 한 대를 남겨낸 내가 기특했다. 그때의 우리는 이 손바닥만 한 카메라가 이토록 오래도록 우리의 젊음을 담아낼 것이란 걸 몰랐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더 함께할 수 있을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떠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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