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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Aug 30. 2019

몇 등을 하든, 우리는 지금 레인 위를 달리고 있어

멈추지 않는 자리에서 발전할 수 있다는 것

당신과의 대화 5

끝나지 않은 경주 속 당신



“내가 몇 등을 하든 계속해서 그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 어느 지점에 왔다는 것보다도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가 중요한 거야. 그곳이 아닌 다른 세계에 있으면 더는 발전할 수가 없으니까.”



 무엇이든 독불장군처럼 혼자 결정하고 나아가는 건 나의 오래된 습관이지만 그런 내게도 예외는 존재한다. 어릴 적부터 아니, 존재부터 함께해온 나의 쌍둥이 언니와의 대화에서만큼은 나는 얌전히 가만히 듣는 사람이 된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어릴 적엔 그저 친구 같았던 언니는 성인이 된 이후로는 언제나 나보다 반 발짝 앞서 생각하는 어른이 되었다. 여전히 천진한 장난으로 사람들을 웃게 만들지만 그 안에는 이전과는 다른 단단함이 생겼다. 


 그 때문인지 이따금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언니와 밖을 나섰다. 집에서와는 조금 다른 온도로 이야기를 시작할 때면 언니 역시 이전과는 다른 표정으로 나를 마주했다. 우리 자매의 단단한 대화는 언제나 그렇게 시작됐다. 


 오늘 우리의 화두는 예술, 그리고 불안감이었다. 정답이 없다는 예술에도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순위와 승패 같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 나였다. 언제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속으로는 더 높은 순위, 더 잘난 위치를 바랄 수밖에 없는 나였고 그것이 근래의 나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혼자 써서 혼자 만들고 혼자 내보내는 삶은 안으로는 대체 불가한 만족과 희열을 가져다주었지만 밖에서는 외로움, 불안감과 싸워야만 일이었다. 이 오래된 싸움에 진이 빠져갈 때쯤 언니가 궁금해졌다. 당신은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한 길만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정한 길을 누군가의 도움 없이 나아가고 있는 건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밤 오디션 사이트에 들어가 맞는 배역을 찾고 이른 아침에 나가 오디션을 보고 돌아오는 삶, 새벽이든 늦은 밤이든 홀로 커다란 배낭을 메고 촬영을 하고 돌아오는 삶. 언니가 홀로 걷는 길은 어쩌면 내가 서 있는 길보다 더 고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언니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언제나 기쁘고 환한 얼굴로 길을 나서고 다시 그 길을 되돌아 집으로 왔다. 비슷한 길을 걷는 우리가 다른 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나 역시 그 환한 얼굴을 되찾고 싶어서 물었다. 


 “매일 같은 길만 생각하는 우리가 겨우 여기까지 밖에 못 왔다는 게 억울하지 않아? 언제부턴가는 제자리걸음만 걷는 것 같아.”


 “사실 우리가 마음을 두어야 하는 건 다른 게 아니야. 몇 등을 하든 계속해서 그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 어느 지점에 왔다는 것보다도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가 중요한 거야. 그곳이 아닌 다른 세계에 있으면 더는 발전할 수가 없으니까.”


 언니는 아직 우리가 몇 등이라는 결과를 쥘 때가 아니라고 했다. 이미 이른 결과를 낸 동료들이 있지만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는 건 승패가 아닌 시기일 거라고. 그래서 지금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것은 우리가 도착한 어느 지점이 아니라, 더 넓게 어디에 속해 있냐는 사실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나아갈 기회를 주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이 점점 말라가지만 점점 환해지는 언니의 얼굴빛의 이유였다.


 이야기를 마친 얼굴은 평생을 바라본 얼굴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더욱 낯설게 빛나고 있었다. 함께 태어나 자라고 비슷한 꿈을 꾸며 비슷한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훨씬 앞선 마음과 태도를 견지한 언니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나의 처음을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몇 권의 책을 얼마의 독자를 언제까지 얻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경주를 시작하고 싶었다. 레인 위를 마음껏 달리고 싶었다. 나는 그 마음을 다시 데려오기로 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경주에서는 몇 바퀴를 돌았는가가 아니라 여전히 레인 위를 달리고 있냐는 사실이 중요하는 사실을 되새긴다. 멈추지 않기 위해서 나의 심장과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는 속도를 내기로 약속한다. 


 나는 한 시즌만 달리다 사라지고 싶지 않다. 긴 경주를 이탈하지 않고 오래 달리고 싶다. 이따금 좁은 시야에 갇혀 현기증이 날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면 고개를 돌려 옆에서 부지런히 제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는 나의 언니, 그리고 이름 모를 당신을 바라볼 것이다. 그 언젠가 우리가 완주하는 날에는 서로의 흔들리는 다리를 붙잡아주며 물 한 잔 나눠 먹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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