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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Aug 29. 2019

제 몫이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망가진 것들을 쉽게 놓아버리지 못하는 이유

나와의 대화 2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



“기울고 닳아버린 것들에게도 제 몫이 남겨졌다면 우리에겐 인내가 필요해.”



 안경 코 받침 하나가 부러진 게 벌써 한 달도 더 된 일이다. 그때보다 더 기울어진 안경은 지금까지도 나의 코와 귀에 걸쳐져 있다. 고무 받침이 사라진 자리에 고개를 내민 날카로운 나사 끝이 오른쪽 콧등을 계속 할퀴어서 그 자리가 툭 불거졌다. 간지러운 수준이었던 게 점점 따가워지기 시작하면 나는 안경을 살짝 들어서 작게 돌돌 만 휴지 조각을 받침 삼아 끼워두었다. 그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는 날이면 왜 그런 고생을 하냐는 핀잔을 피할 수 없어진다. 


 그럴 때면 나는 뚜렷한 변명을 하지 못한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궁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기에는 형편없을지라도 귀에 걸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그보다는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선명한 세상은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게는 여전히 쓸모가 있는 거였다. 


 어릴 적부터 나는 한번 내 손에 들어온 것들은 쉽게 놓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부러지거나 망가진 것만으로는 버려질 이유가 되지 못했다. 깊은 애착이나 어떤 사연 없이 그저 그래 왔다. 처음과 다른 불편함과 수고로움을 느낄 때마다 이번에는 새로 사야겠다, 바꿔야지 했지만, 다시금 익숙한 물건에 손이 갔다. 아직까진 괜찮아, 이렇게 하면 쓸 수 있어 라며 어딘가 망가져버린 물건들을 대변하며 그들의 생명을 계속해서 연장시켰다. 


 스프링이 망가진 볼펜에도 잉크가 남아 있으면 힘껏 붙잡아가며 썼고 부러진 립스틱은 더욱 바짝 댕겨 썼다. 끈이 끊어진 가방은 손으로 묶어 메고 다녔다. 펜은 잉크가 마를 전까지, 화장품은 마침내 바닥이 보이기 전까지, 가방은 찢어지기 전까지는 버려지지 않았다. 아직은 그것들에게 제 몫이 남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망가진 펜의 필촉이, 뭉툭한 립스틱의 감촉이, 끊어진 가방의 길들여짐이 아직은 그것들만의 몫을 기다려주게 했다. 


 누군가에게는 때가 되면 새 것으로 갈아치우는 소모품에 불과한 것들이 이따금 서글프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직 더 버틸 수 있는데, 아직 제 몫이 남았는데 섣부르게 버려진 것들의 시계는 너무 이르게 멈춘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내 곁으로 온 물건들의 몫이라도 다하게 해주고 싶다. 


 제 몫을 다하는 때까지만 조금 불편하게 지내며 느린 인사를 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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