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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Aug 27. 2019

어느 가을, 시를 쓰기보다 먼저 시인이 되고 싶었다

부드러운 주름의 시간이 찾아올 때면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당신과의 대화 

부드러운 주름의 당신



“...... 사람의 가슴속에는 누구나 다 시가 들어 있다. 그 시를 내가 대신해서 한 권의 시집으로 묵었다. 당신의 가난한 마음에 이 시집의 시들이 맑은 물결이 되어 흘러가기를. 1998년 6월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속 작가의 말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작가라는 넓은 바다 가운데 시인이라는 좁고 깊은 강물이 되고 싶었다. 천천히 흘러서,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으면 얼핏 멈춰있는 것만 같은 낮고 고요한 흐름을 따라 살아가고 싶었다. 여전히 유효한 그 바람은 고등학생 시절에 들었던 어느 강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마도 문학인과의 만남이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매년 초청된 한 명의 시인이 강연을 진행하는 그 시간이 내게는 일 년 중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날이었다. 성적과 무관하고 자신의 흥미와도 동떨어진 행사에 모두들은 시큰둥했지만 나는 신입생 때부터 수험생이 되기까지 부지런히 강연에 참석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가장 위태로웠던 시기였던 고등학생 시절, 그 강연이 내게는 무한한 용기와 삶에 대한 낙천을 쥐어주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서로 다른 모양으로 굽이쳤던 시인들의 삶과 그것들이 만들어낸 문장들은 가난했던 주머니와 그보다 더 가난했던 마음을 부끄러워하던 나를 가만히 안아주는 것 같았다. 겸손하지만 부끄러움 없는 고백들은 그들의 문장처럼 연약한 풀대 같기도 했고 단단한 바위 같기도 했다. 작고 연약한 삶과 단어들이 모일 때면 그 합보다 더 큰 무게와 움직임을 가질 수 있다는 걸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시인이 되고 싶었다.


 시인. 꿈을 품고도 손에 닿을 것 같지 않던 동경의 이름, 그 삶에 다가갈 용기를 건네준 어른은 정호승 시인이었다. 이제는 십 년도 더 지난 그 하루를 선명히 기억해낼 수는 없지만 어렴풋이 기억하는 것들이 있다. 기르는 강아지를 이야기하며 칠판에 그림을 남겼던 것, 자연으로부터 느끼는 것들을 이야기하던 것, 그리고 그 모든 시선에는 삶을 향한 다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깨달음 같은 것들. 그 넉넉함으로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보다 앞섰던 건 그 넉넉한 시선을 향한 마음이었다. 열일곱, 열아홉. 아직은 서툴고 미련하고 날 선 마음이지만 세월이 흘러 부드러운 주름에 닿게 될 때면 나도 그런 보드라운 마음으로 스스로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마음이 다른 누군가의 삶을 품어낼 수 있지 않을까. 절박한 기대 같은 것들이 불쑥 자라나던 가을이 있었다. 시인이라는 이름에 닿고 싶었던 건, 시라는 창작의 결과보다도 시인이라는 이름이 품는 마음을 향한 갈망이었다.


 긴 시간이 흘렀고 이제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몇 권의 책을 내었지만 나는 여전히 시인이 되지 못했다. 거기에는 시집을 내지 못했다는 명료한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안다. 그 마음에 닿지 못해 시인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연약한 것들이 모여 힘내기까지 들여야 하는 뜸이 여전히 남겨져 있다. 


 그럼에도 이제는 안다. 아름다운 문장은 온전히 아름다운 존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닿고 싶은 몸부림의 흔적이다. 나는 계속해서 몸부림치고 있다. 현실에 부딪혀 날카로워지는 감정으로부터 내 안의 시를 지켜내기 위해서, 고이지 않고 맑은 물결이 되어 다른 누군가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그러다 보면 그 언젠가 멀게만 느껴지던 그들과 나의 교집합이 훌쩍 커져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싶어 진다.


 10여 년 전 그날의 짧은 만남이, 당신의 흩어진 말들이 누군가의 삶을 세워갔다는 것을 시인은 알까. 그 가난한 마음에서도 깊은 시 한 줄을 발견할 수 있다고 당신이 던져준 말 한마디를 붙들며 나아간 어린 삶 하나 있었고, 그 삶이 자라나 이제는 누군가를 대신하여 내리는 비가 되고 바다가 되어 파도를 데려오겠다는 다짐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느리게 알 게 되었으면 좋겠다. 내 삶이 흐르고 흘러서 한 편의 시가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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