꼿꼿한 등을 굽히는 동력, 부스러기를 줍는 사랑

사랑, 감정이 아닌 태도가 되어야 할 때

by 가랑비메이커

나는 사랑을, 정확히는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던 사람이었다. 사랑, 도대체 사랑이 무언지. 무엇이길래,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괴롭게도 하는지. 사랑의 의미를 찾기 위해 나는 꽤나 오랜 시간을 앓았지만 그 어떤 정의도 나를 온전히 자유하게 하지는 못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을까. 스스로 정의하지 못한 단어를 뱉는 일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곁의 연인에게도 사랑, 이라는 단어를 쉽게 내어주지 못했다. 늘 소중해, 애정 한다, 라는 식의 우회적 표현으로 그들을 충족시키고자 했으나 사랑이 없는 사랑의 표현이었으므로 되려 그들은 지쳤고 실망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한데 묶어버리면 그것이 사랑인 것일까. 내가 조용히 읊조리는 사랑이라는 말이, 저 멀리서 사랑한다고! 소리치는 누군가의 그 사랑과 같은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제각각 서로 다른 감과 정으로 뱉는 것이 사랑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취해야만 하는 것일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사랑의 미로 혹은 미궁 속으로 나는 빠져들고 말았다.


그렇게 헤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만 보이면 숨기 바빠졌다. 언제 어디서 어떤 주제에 관한 대화이든 늘 분명하고 단호한 뜻을 밝히던 내가 사랑이라는 두 음절 앞에서는 언제나 흐물흐물 힘을 잃은 채 한 발 뒤로 물러서게 된 것이다.


내게 사랑은 가장 위태로운 앎이자 감이었다. 영화와 드라마 속, 혹은 거리 위에 사랑(이라는 말는) 넘쳐났지만 그럴수록 내게 사랑은 더욱 낯설게 다가올 뿐이었다. 나 아닌 모든 세계 속에 만연한 사랑은 내게 깊은 소외감을 쥐여주었다. 이토록 쉽게 뱉어져도 되는 것인가 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경외감은 더욱 먼 거리감을 느끼게 하곤 했다.


사랑은 함께 빵을 나눠 먹고
홀로 부스러기를 줍는 일


오래 묵은 물음의 해답은 한 권의 시집 (기영석 시집 <사라지는 게 아름다움이라면 너는 아름다움이 된 걸까>)을 통해 찾아왔다. 긴 시간 꼬리를 빼며 숨어버렸던 사랑에 대한 나의 정의가 낯선 페이지 위 활자가 되어 발견된 것이다.


사랑은 함께 빵을 나눠 먹고 홀로 부스러기를 줍는 일. 그래, 내게 사랑은 순간의 감정보다는 견고히 자리 잡힌 태도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랑의 동사처럼 쓰인 ‘(함께 나누어 먹었던 빵의) 부스러기를 홀로 줍는 일’은 등을 꼿꼿이 세워 빵을 먹는 것과는 다르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하는 것이다. 사랑은 동그랗고 푹신한 빵을 베어 먹으며 느끼는 달콤한 맛에서 끝이 아니다. 입안을 가득 채운 단맛이 끝난 자리에서, 잘게 부서진 흔적을 줍는 일에서 완성된다.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벤치에 앉은 남녀가 서로를 마주 보며 빵을 나눠 먹는 모습, 그 장면 위로 들려오는 그들의 설렘 가득한 심장 소리가 (사랑다운) 사랑으로 포착되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는 홀로 남겨져 부스러기를 줍는 누군가의 굽은 등은 쓸쓸하고 초라하게 비칠지 모른다.


그러나 꼿꼿한 등을 구부리는 동력, 덩어리를 삼킨 자리에서 잔 부스러기까지 손가락으로 찍어 모으는 태도, 이것은 분명 사랑이다. ‘사랑하기에’라는 전제로 행동하는 마음, 단맛의 기쁨 이후의 몫까지 끌어안고 가는 것. 밝은 빛이 저물고 남겨진 그늘 아래에서 쉽게 발길을 돌리지 않고서 한참을 바라보는 것. 아름답지 않아도, 따듯하지 않아도 그것을 쉬이 저버리지 않는 것이 사랑이었다. (내게) 사랑은 뜨겁고 폭신한 순간에 머무는 감정이 아닌 그 모든 시간을 감내하며 머무르는 태도였다.

나를 대변해주는 문장을 발견하고 나니, 오랜 시간 사랑이라는 단어로부터 느꼈던 소외감과 경외감이 조금도 아깝거나 억울하지 않다. 그저 사랑이라는 단단한 태도를 만들어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훈련이 필요할지 생각해볼 뿐이다.



*동아일보 오피니언 사설/칼럼 <내가 만난 명문장> 2019/11/04 (월) 일자 칼럼(1,000자)의 바탕이 된 글

https://n.news.naver.com/article/comment/020/0003251081


기영석 시집 <사라지는 게 아름다움이라면 너는 아름다움이 된 걸까> 문장과장면들 / 20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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