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 그리고 소설 <시인, 동주>
가랑비메이커 매거진 [책장과 극장사이]
#movie 2. <동주>
*매거진의 모든 감상은 가랑비메이커의 개인적인 견해와 분석에 따른 것임으로 불법 복사를 금합니다.
영화는 일제강점기 그리고 그 안에서 타오르지도 차마, 꺼트리지도 못했던 청춘 '윤동주'와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의 짧은 생애에 대해 그리고 있다. 국문학도로서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들의 삶은 다시금 부끄러움을 몰랐던, 치열함을 잊었던 나를 꾸짖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날들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읽고 펜을 들어야 할지, 고민하게 할 것이다.
19세 그리고 28세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들의 이야기의 영화 <동주> 그리고 같은 시기를 담아낸 소설 <시인, 동주>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들의 삶을 통해 처절하게 이루고자 했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윤동주는 우리에게 교과서를 통해서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며 그의 시 또한 한 구절씩은 기억할 만큼 유명하나, 살아생전 시인, 이라는 그 두 글자를 이름 곁에 두고 불린 적이 없으며 평생에 소원했던 본인의 시집 또한 사후, 후배와 동료들에 의해 발간된다.
그는 15세부터 시를 썼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학생 때 이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던 고종사촌 송몽규와 달리)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이 위태롭던 일제강점기를 살며 누구보다 주변을 돌아보는 사람이었고 숱한 밤을 밝혀 시대의 고민을 풀어쓰던 시인이었다.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곁에 사라져가는 것들과 죽어가는 것만 같은 모든 상황들, 그 안에서 그는 자신만의 언어로 담담히 시대의 아픔을 써 내려가는 것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영화 <동주>를 보고 나면 윤동주 곁에 늘 함께였던 '송몽규'라는 이름 세 글자가 가슴에 박혀, 쉽사리 뽑히지 않는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이름일 수 있겠으나, 윤동주에게는 고향 북간도에서 같은 해에 나고 자라 장차, 같은 해 겨우 20일 정도를 사이에 두고 같은 운명을 만나게 된 고종사촌 '송몽규'가 있었다.
2016년 02월 26일 서울극장에서 진행되었던 시네마 살롱에서 인상 깊었던 송몽규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에 이준익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윤동주를 만나러 갔다가
송몽규의 손을 잡고 나오는 영화
영화 <동주> 뿐만 아니라 책 <시인, 동주>에서도 그리고 실제 그들의 삶에서 과연 서로를 떼어두고 각자를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이리저리 흔들리기도 하고 또 그렇게 뿌리 깊게 박혀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의 삶은 다른 듯 닮은 모양을 하고 있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도
결국 같은 뜻을 품고 있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사촌으로서 함께 자라났다. 동갑내기였으나, 언제나 성적도 조금 앞섰고 동주는 엄두도 되지 못했던 작품 발표에 당선까지. 어딘가 동주를 이끌어주면서도 자극하는 존재였다. 그런 그는 시대에 대한 행동들도 늘 앞섰다.
동주는 암울한 시대를 견디며 아파할 때마다 조용히 불을 밝히고 노트를 펼쳤지만 몽규는 무의미한 상장을 패대기치고 자릴 박차고 나갔다. 그는 사람이 사람답지 못한, 나라가 주권을 잃은 현실에 대해 그의 행동력으로 잠시 펜을 놓고 총을 들었다. 그럼에도 동주는 펜을 놓지 않기를 바랐고 그 선택이 언제나 함께였던 둘을 잠시 떨어져 있게 했다.
니는 계속 시를 쓰라. 총은 내가 들꺼이까
그들은 문학적인 견해 부분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윤동주의 문학관은 글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것들이 모여 더 나은 삶,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것이었으나 송몽규는 사람들을 일깨우지 않는 문학은 그저 감정 뒤로 숨는 것외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각자의 방법대로 몰아내고자 했던 어둠이 결국 동주와 몽규를 삼켜버리고 그들은 같은 해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그들이 그렇게도 바랬던 빛, 광복이 된다.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윤동주 시<쉽게 씌여진 시> 중
젊은 나이에, 위태로운 시대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휩쓸리지 않았던 동주의 펜촉 그리고 몽규의 총대는 좌절되지만, 그 가운데 조금 달리 보여도 결국 그들은 작은 자신들에게 눈물과 위안으로 내민 최초의 악수를 그렇게 이뤄내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광복 이후 혹은 이전에라도 동주의 시집이 세상에 발표가 되고 살아생전 그의 시들이 더 많은 이들에게 읽힐 수 있었더라면 그 지난 아픔들이 조금은 더 빨리 아물 수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영화 <동주> 속 몽규의 외침처럼 정말 그리하지 못해 한이었던 비밀 작전들이 일본 경찰들의 눈을 피해 실행되었더라면, 그곳에서 맞이 하게 된 죽음이었더라면 송몽규의 이름 세 글자는 과정만이 나는 결과 안에서도 반짝거릴 수 있었을까. 우린 그 이름을 조금 더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기 전 책 <시인, 동주>를 먼저 읽었다. 평소 좋아하던 이준익 감독이 윤동주 시인의 이야기를 그린다니, 흥분되었던 마음도 잠시 페이지를 펼치고 또 한 장 넘기며 숨소리도 작아질 만큼이나 먹먹함이 덮쳐왔다.
글쎄, 나는 과연 아무런 고민 없이 이 시인을 존경하고 그렸더라고 할 수 있을지.
아무런 찔림도 없이 가만히 폭신한 의자에 기대고 앉아, 달콤한 내음들 사이로 그 이야기들을 가만히 보고 있어도 되는지.
그럴 수가 없었다. 감히 글을 쓴다라고 지난 새벽을 꼬박 고민하였노라고 어리디 어린 투정들을 늘어놓았던 스스로를 견딜 수가 없던 시간이었고 슥, 돌아본 곳에서 희망이 없다라고 홀로 속단하며 자포자기하듯 했던 순간들에서 얼마나 큰 수치를 느꼈는지.
영화 그리고 책에서 그려진 동주, 몽규의 삶에서 '문학'이라는 것에서만 우리가 집중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삶에 대해 조금 덜 정성스러운 이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윤동주는 삶 가운데 늘 시를 쓰며 그 시절들을 버텨왔으나 그의 시 또한 문학적 측면에서만 감상되어지고 향유되어지는 것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몽규와 마찬가지로 시대를 대한 그들의 자세에서 의연함 또는 부끄러움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동주>를 보며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연출 중 하나는 '쿠미'라는 가상 인물이었다. 동주가 일본 유학 당시 하숙을 하며 가깝게 지낸 인물로 그려진 그녀는 그의 삶과 그를 닮은 시를 아주 마음에 들어한다. 그리고 동주의 상황을 헤아려 상황적으로 어려운 시집 발간을 영국에서 하도록 도와주는 인물이다. (결국, 좌절되긴 하나)
비록 살아생전 자신의 시를 세상 앞에 꺼내보이지 못했던 그이나, 누구보다 시를 사랑했던 윤동주의 바람을 긴 세월 지나 영화 속 한 인물을 통해서나마 가까이 가도록 해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그에게 해주는 이야기들은 다시 돌아간다면 우리가 해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블로그 시네마살롱 후기(2016/02/26)
이준익감독/박정민배우/김태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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