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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Jul 08. 2020

그녀의 종착지

창가 자리와 이어폰만 있다면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그녀는 자주 떠났다. 오래지 않아 돌아와야만 하는 여행이었대도 좋았다.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시간보다도 이동하는 시간이 더욱 긴 여행이었대도 좋았다. 아니, 그녀는 돌아오기 위해서 떠났고 좁은 의자에 구겨져서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싣기 위해 떠났다. 단지 그뿐이었다. 손바닥만 한 버스카드 한 장이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꽤 이르게 시작된 그녀의 여행은 처음 교복을 입던 중학교 신입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떠났던 그 여행은 조금은 무모했는지도 모른다. 어린이를 지나고 이제 겨우 청소년이 되었을 뿐이었던 그녀들은 매일 어제보다 더 넓은 세상을 꿈꿨다.


난생처음 입어보는 교복이라는 것이 주는 책임감과 조금은 멀리 떨어진 학교 탓에 건네받은 통학버스카드가 주는 해방감에 도취되어 그녀들은 서로를 조금 더 어른스럽게 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교하던 길에 보이던 버스를 가리키며 끝까지 한번 가보지 않겠냐는 그녀의 호기로운 제안에 작은 여행이 시작되었다. 친구들은 언제나 앞서 걸으며 자신들을 리드해왔던 그녀를 따라 망설임 없이 카드를 찍어댔고 차창 너머로 펼쳐지던 낯선 풍경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들은 각자가 품은 생각과 함께 그 풍경들에 익숙해져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일찍 들려온 잔액이 부족합니다, 라는 문장 앞에서 그녀들의 여행은 심심하게 막을 내려야 했다.


성인이 되고 나니 후불교통카드라는 걸 사용하게 되었고 이제는 정말 그녀가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이 사실은 그녀의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목적이 없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갈수록 시간이 모자라다고 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여행을 멈출 수 없었다. 이제는 생활비에서 꽤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버린 교통비가, 이 목적 없는 여행이 그녀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었는지를 알려준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그녀이지만, 홀로 잠잠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질 때면 그녀는 언제든 이어폰과 교통카드를 챙겨 버스에 올랐다. 그녀가 이 여행에서 반드시 사수하는 것은 단 하나 창가 자리. 이를 위해서라면 몇 대의 버스도 미련 없이 보내고 마는 그녀에게 창은 더 넓은 세계와 낯선 세상에 대한 상상을 데려왔다.


그건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창가의 자리에 앉아서 이어폰을 꽂은 그녀는 몇 시간이고 창밖의 장면에 눈을 떼는 법이 없었다. 푸르게 펼쳐진 풍경에 마음을 놓았다가도 빽빽이 들어찬 빌딩들이 펼쳐질 때면, 그 아래 작은 가게들의 간판을 줄줄이 발음해보기를 좋아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건 사람이었다. 어느 장면이 펼쳐지든 늘 한결같은 무표정의 사람들. 그녀는 그 얼굴들에서 나름의 고민들을 짐작해보기를 좋아했고 그 나름의 심심한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유리창을 사이에 둔 채 마음으로 전하는 위로가 전부였지만 그 시간들은 그녀가 그녀 스스로에게 보내는 애정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이름 모를 얼굴들에게 보내는 애정은 말할 것도 없이.


버스가 전환점을 돌아서, 익숙해진 길을 되돌아갈 때면 어둑해진 창으로 비치는 승객들의 피로한 얼굴에서 그녀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조금 서글퍼지기도 했지만 다시 다정한 애정이 솟는 걸 느꼈다. 이따금 외면하려 해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던 그 공허한 눈빛과 지친 기색에 못 이겨 그녀는 몇 번이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어느 날엔가 그녀는 발뒤꿈치가 벌게진 채로 구두 위를 위태롭게 흔들리는 제 또래의 여자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녀는 30분을 더 가야 했고 그 뒤꿈치의 여자는 겨우 두 정거장이 지나자 다른 사람에게 자릴 내주고는 사뿐히 내렸을 뿐이지만, 후회는커녕 그녀는 그 벌건 뒤꿈치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근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길고 긴 여정 끝에 마침내 감사합니다, 를 남기고 착지하는 그녀의 종착지는 언제나 그녀가 사는 작은 아파트 단지 앞. 익숙하다 못해 닳고 닳은 걸음이 가득한 곳이지만 여행을 마친 날만큼은 전혀 새로운 공간이 되어 그녀를 맞아주었다. 무표정한 사람들 사이로 새어 나오는 애정을 숨기지 못해 웃음 짓는 그녀의 씩씩한 발걸음이 바로그 곳, 그녀의 종착지에 하나씩 늘어갔다.






홀로 떠나는 길 위의 당신에게 건네는 이야기

가랑비메이커 장면집

<언젠가 머물렀고 어느 틈에 놓쳐버린>

157p. 그녀의 종착지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298419


출판사 문장과장면들 인스타그램

작가 가랑비메이커 인스타그램

현, 에세이 클래스 9기 모집 중  (한여름반 토요 낮 수업 7/18 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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