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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Mar 31. 2016

뜨거운 말 한마디

가랑비 장면 집 #scene 8.



가랑비메이커 장면집

<언젠가 머물렀고 언젠가 놓쳐버린>

#scene 8. 뜨거운 말 한마디



┃4월의 눈동자


아무리 돌아봐도 아팠던 그 밤들,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늦여름의 나.

내쳐져야 했던 그에게도 내쳐야만 했던 나에게도 같은 상처로 남겨진 그날의 장면.


그럼에도 그날을 자꾸만 꺼내보게 만드는 것은 뜨거운 말 한마디였다.


내가 보았던 어느 눈동자보다도 까맸던 동공은 푸르기까지 해 보였다. 그 눈동자가 진실되게 흔들리며 짧아지는 호흡 사이로 새어나오던 한마디.


너는 사월의 눈동자를 닮았어.


그때 나는 우리가 더는 그림자 사이로도 함께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조심스럽게 늘어놓고 있었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나라도 붙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도무지 그림자만 따라 걷고 싶지는 않았다. 계절은 이제 막 생명을 길러내기 시작했고 꽃들은 조금씩 더 풍성해지기 시작했으니까.


한참동안 잠자코 입을 닫고 있던 그에게서 흘러나온 의외의 문장에,


그 눈동자가 진실되게 흔들리는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다시 또 그늘만 따라 걷을 뻔했다.



4월의 눈동자. 그도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저 4월의 눈동자가 있다면 지금 마주한 네 눈동자와 같을 거야. 알 수 없는 말만 남겼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몇 개의 장면을 내게 남긴 채로 그렇게 내 삶을 스쳐 지났지만 수계절을 돌아 다시, 그 눈동자의 계절이 오면 나는 기어코 그 뜨거웠던 말마디를 삼켜내지 못하던, 그의 눈동자를 다시 꺼내오고 만다.


4월의 눈동자, 를 지닌 소녀라는 제목의 피아노 곡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날 이후로  한참이 지난 뒤였다. 마찬가지로 그 곡이 4월의 눈동자를 지닌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그 이야기 속의 소녀는 추운 겨울밤, 잠들 곳을 찾아 헤매다 숨을 거두고 만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의 4월의 눈동자가 그녀의 죽음 위로 아름다운 꽃들을 피어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문득, 그의 눈동자가 그리워졌다.


내게는 그가 그랬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그를 위태롭게 이리저리 흔드는 것 같았고 그 결에 그가 어디론가 푹 빠져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런 그를 두고 볼 수 없어, 서로를 내치기로 결심을 내렸는데 그는 그런 이유로 나를 붙들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다시 만난다면, 그는 내게서 4월의 눈동자를 여전히 기억해낼 수 있을지.

문득 그리워졌다.





┃No Words


원망스러운 노래가 하나 흘러나오고 있었다.


The script - No Words

when it comes to you, baby, no, there are no.
there are no words. yeah, I swear this much is true.
There ain't a word in this that describes you.

/너를 형용할 수가 없어. 형언할 수 없다는 이 말 만은 진심이야. 너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어./



이 바보 같은 한 남자의 고백이 어느 겨울밤, 흔들림 없이 지켜왔던 것들을 마구 흔들어댔다.


커다란 몸에 어울리지 않는 순진한 얼굴하고 느리게, 그럼에도 한 번의 멈춤도 없이 그렇게 나를 따라오던 아이가 있었다. 마주할 용기도 없으면서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여전한 모습들이 몇 번의 고마움을 뒤로하고 답답함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미 지쳐있었고 뒤를 돌아볼 여유란 없었다. 그때의 나는 누구에게 손을 내밀기는커녕, 내밀어준 손들마저도 덥석 잡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위태로웠고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그저 가만히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몇 걸음을 뒤로 하고 드리워진 커다란 그림자에 나는 때로는 안심하기도 했지만 더러는 숨이 막혔다.


그날, 나는 조금 더 가진 자의 오만으로 뒤를 따라 걷던 그 아이에게 내치듯 물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를 나를 따라온다고 해서 나 역시 어떤 것도 따져 묻지 않고 마음을 열어줄 거란 생각은 하지 마. 나는 따져 묻길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야. 이제부터 너에게 집요하게 따져 물을 거야. 내게 이러는 이유를 말할 수 없다면 이제 여기서 그만 돌아가 줬으면 해.'


그때, 내 위로 포개진 그림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이어폰을 끼워줬고 그때 흘러나온 노래가 'No Words'였다.



그리고 작게 이어진 한마디 '그냥 좋아요,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그 자체로 내가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이제와 생각해보면 조금 유치하게 느껴지는 그 행동이, 이 노래가 내게는 하나의 비상구 같았다.


어느 것 하나 분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였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느 곳인지.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누군갈 사랑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그를 떠난다면 그 이유는 얼마나 합당한지.


그런 나를 오래 지켜봤던 그가 전해주던 마음은 어느 것 하나 분명하지 못했고 결국 그래서 우린 얼마를 함께 하지 못한 채 등을 보였지만


그럼에도, 이따금 랜덤 플레이를 돌다 흘러나오면 그 노랫말이 내 발을 묶어두었고 지금, 누구보다도 위태로운 것들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고맙다, 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 뜨거운 말 한마디에 나는 나를 조금 더 사랑할 수 있었다고.



가랑비메이커 장면집

다음 이야기 #scene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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