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거리, 종로
지극히 가랑 비적인 열여섯 번째 이야기
<오래된 거리에서 낯선 얼굴들이 말을 걸어왔다.>
혼자 떠난 길이었는데 마주한 얼굴들이 많았다. 늘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 있다는 빅이슈 판매원 아저씨와 성격이 급하던 아줌마. 서점에서 붉은 얼굴로 말을 걸어온 사내. 파란 눈의 앳된 사내. 그리고 일 년 만에 만난 친구 주현이.
종로, 이 오래된 거리에는 늘 낯선 공기뿐이었는데 어쩐지 오늘은 그 얼굴들에게서 익숙함을 느꼈다. 지긋해진 마음 던져버리고자 찾아왔던 마음이 어쩐지 머쓱해져, 돌아가는 길엔 옅은 웃음이. 내가 사랑하는 거리, 종로.
일을 관둔지는 오늘로써 20일. 정해진 출근 시간은 없지만 두 번째 책 원고 작업과 더불어 새로 시작한 공부를 위해서라도 아침 없는 하루는 더 이상은 안되었다. 그럼에도 요 며칠 계속되던 나쁜 꿈에 오늘도 결국 내게 남겨진 건 늦은 아침이었다.
그 때문이었다. 투정이 쏟아진 건, 게으른 내가 겨우 잡아챈 늦은 아침.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이 사소한 말에도 예민한 감정을 불러왔고 결국 나는 아침을 먹다 말고 나와버렸다. 백팩에는 노트북과 습작 파일, 그리고 쿠폰 한 장을 들고서.
짐을 챙기다 눈에 띈 건 햄버거 쿠폰. 단품을 시키면 세트로 업그레이드를 해준다는 그 쿠폰은 먹다만 늦은 아침에 허기질 배를 걱정하는 내게 좋은 소식이었다. 집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에서 가장 큰 햄버거를 시켰고 (평소 패스트푸드는 즐겨 먹지 않는) 나는 겨우 절반만 잘라먹고는 집에 들러 남겨진 절반을 두고 와야만 했다. 어쩐지 번거로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우연찮게 다시 들른 집에서 두고 나온 이어폰을 발견했다. 모든 게 순조롭게 느껴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기관지가 약한 탓도 있지만 어쩐지 지하에 위치한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습한 냄새와 기운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어쩐지 불안정한 느낌이 싫어, 돌아가더라도 버스를 고집하던 나였지만 오늘은 지하철이었다.
목적지가 없이 나온 걸음이었기에 버스를 타고 간다면 한강, 마포구- 즐겨 찾는 어디든 편하게 갈 수 있었지만 오늘은 그 어디도 아닌 종로를 가야만 했다. 언제부턴가 이유 있이 혹은 이유 없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게 되던 그 오래된 거리. 사는 곳에서 그곳까진 한 시간 반, 두 번의 환승이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종로. 그곳에 가면 어쩐지 혼자 걷는 내가 어색하지도 초라하지도 않게 느껴졌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얽혀 있고 그 사이에 놓인 사람들은 늙거나 어렸지만 모두가 적당히 보폭으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까.
온수에서 환승을 기다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을 관두고 나서 가장 좋은 건 아무래도 이런 게 아닐까. 지금의 감정들을 모른 체하며 앉아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가라앉는 마음 달랠 길을 찾아 걸음을 떼면 그때와 멀어진 새로운 지금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아무런 일정이 없어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없어도 떠나는 이 길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종로에 도착하자마자 처음 찾은 곳은 반디 앤 루니스. 주로 찾던 책을 가져오거나 잠시 들러 매대 위 책 배치 정도를 확인하고 나오는 정도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백팩 안에 담긴 노트북, 그 안에 담긴 원고 파일이 한 권의 책으로 나올 날이 이제는 넉넉하지 않게 남은 탓에 조금 더, 한 번 더 들여다보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
에세이에서 시, 다시 소설 그리고 자기경영까지. 이곳저곳 누비다 보면 아무래도 나처럼 오래 머문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럴 때면 그저 '아, 무언가 열심히구나' 하며 제 걸음 떼기 바빴지만 (사실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익숙하게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그 머문 얼굴 중 하나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오랜 거리에서 말을 걸어온 낯선 얼굴 중 첫 번째인 셈이다.
이런 이야기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다행히도 우주의 기운이라든지, 도라는 것에 대한 신념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낯선 사내는 나보다도 당황스러운 얼굴빛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아까부터 보아왔던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나는 정중하게 둘러대고서야 새 걸음을 뗄 수 있었다.
만일 그가 내게 조금만 더 시치미를 떼고 내 손에 들려진 책의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어쩌면 전혀 사랑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며 톰을 아프게 했던 썸머의 마음을 변화시켰던 그 누군가처럼- 내 발걸음도 멈춰둘 수 있진 않았을까. (물론, 나는 사랑이라는 걸 전혀 믿지 않는 편도 아니고 썸머는 더욱 아니지만.)
어쨌거나 홀로 걷는 길에서 값을 치를 때를 제외하곤 입을 열 일이 도통 없는 내 목소리를 확인시켜줘서 고마운 낯선 얼굴이었다.
엊그제 아빠에게 그런 이야길 했었다. 핸드폰이 없으면 어디서도 쉽게 전화 한 통 얻어낼 수 없는 세상인데 공중전화가 얼마나 귀한지. 얼마 전 서울역 공중전화에 글쎄, 누군가 전화를 걸고 남은 60원을 그냥 내려버리지 않고 남겨두었다는 것.
그런데 오늘 종로거리에서 이렇게 쉽게 공중전화를 만나게 될 줄이야. 겨우 저 오래된 물건 하나를 만났을 뿐인데 환영인사라도 되는 것처럼 '잘 왔다. 잘 왔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 매일 오지요.
1시부터 8시까지.
아니, 더 일찍 오는 날도 있지.
공중전화라면 나보다 더 많은 기억이 있으실 것만 같은, 오래된 목소리. 종로에서 빅이슈를 판매하는 홈리스 판매원 아저씨의 말이었다.
종로 3가에서 인사동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신호등 앞에, 빅이슈를 판매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주에도 언니가 사 온 빅이슈, 저번 주엔 신촌에서 사 온 빅이슈. 글을 쓰는 나로서 재능기부를 희망하게 했고 (아직 연락은 없는 상태지만) 평소 사회의 선과 비영리단체에 관심히 많은 나로선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하나를 더 얹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왔던 길을 돌아 편의점에서 사과주스 하나를 사고는 어떻게 나누는 것이 서로에게 편안한 방법일지에 대해 고민하다, 그저 주스를 쥔 손을 내밀었고 판매원께선 기쁘게 받아주셨다. 그리고는 내가 고른 마이클 잭슨 표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강남에서는 제법 인기가 좋은 표지인데 여기서는 이걸 고르는 사람은 영 없다고. 그래서 강남에도 직접 나가시냐 물으니, 구역이 정해져 있고 본인은 이곳에 늘 온다고 하셨다. 어쩐지 종로는 자주 왔으나 이 길목으로 지나는 것은 또 처음이라 몰랐다고 어색하게 이야기를 하니 신호가 바뀌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을 것도 같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엔 조금 더 많은 걸 묻고 싶었다.
인사동과 삼청동은 이제는 동네 산책길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익숙하다. 그런데 오늘은 들어서는 길목에서부터 새로운 자리 하나가 들어왔다. ['당신의 일 자리에 꽃이 피는 그날까지' #서울 일자리 대장장] 이란다.
모두가 빠르게 지나가는 사이에 서서 몇 번이고 고쳐 읽고 사진을 찍으니 사람들이 하나, 둘 걸음을 멈추고 즉시 한다. 더러는 핸드폰을 꺼내 나처럼 사진을 찍고.
일을 관두니 떠나올 수 있어 좋다던 내가 철 없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그래서 우리의 일자리엔 무엇이 피어 있는지, 아니면 얼마나 시들었는지. 깊어지려는 생각을 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인사-삼청동을 지나면서 늘 붐비던 쌈지길은 내게는 기피지역 이곤 했다. 늘 같은 상점들, 북적이는 사람들. 새로운 것이라곤 날마다 다르게 찍히던 날짜들뿐이라 생각했는데 오늘은 어쩐지 걸음이 옮겨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말을 걸어온 낯선 얼굴.
낯선 얼굴은 파란 눈에 탐스러운 갈색 단발머리가 매력적인 외국인이었다. 물론, 남자. 하나씩 낯선 시선으로 아보고 있는데 누군가 툭툭 쳐서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눈을 한 낯선 이가 내게 사진을 찍어주기를 바랐고 나는 흔쾌히 몇 장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카메라에서 소리가 나지 않아서 꽤나 여러 번 눌렀는데 몇 장이 찍혔는지는 모를 일. 부디 그 몇 장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쯤은 발견했으면.
요즘 혼자 길을 걷다 보면 유독 길을 묻거나 사진을 찍어달라는 외국인을 만난다. 사실 그간 없었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그들이 아니라,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다니다 보면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거니와 부탁하는 입장에서도 용기가 서지 않을 수 있을 것. 어쨌거나 오늘 같이 홀로 걷는 날에는 그들과 한 번 눈을 맞추고 익숙한 곳도 낯선 곳이 되어 나를 맞는다. 사실, 달라진 건 여유로워진 내 마음 하나인데
종로를 지나면서, 인사-삼청동 좀 다녔다고 하면서 정독도서관에 들어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붐비는 거리와 겨우 몇 걸음을 사이로 두고 잠잠한 풀숲처럼 남을 수 있었겠지.
정독도서관에 처음 오게 된 건 아마도 2-3년 전 여름이었을 것이다. 언니를 따라 시끄러운 거리를 피해 이곳의 벤치에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가만히 눈 감아보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더 오래, 깊게 머물고 싶어서 정독도서관 구석구석을 밟아보았다. 밖에서 보았던 외관보다 훨씬 크고 정돈된 느낌의 공간이었다. 구석구석 창이 많았고 놓인 식물이 무색할 정도로 푸르던 창밖. 푸르고 푸른 공간이었다.
창밖으로 조용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는데 멍하니 창밖을 보며 감탄하던 나와는 달리, 모두 무심히 지나쳤다. '이런 풍경쯤이야,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볼 텐데. 뭐.' 하는 것 같았다. 새삼, 이곳에서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무거운 백팩을 짊어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정독도서관에서 머문 시간은 1시간 반 정도. 작업을 하겠다며 노트북이며, 습작 파일이며 잔뜩 가져왔지만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절반의 시간을 건물 뒤 켠에 걸터앉아 보냈다. 유리문에 비친 하늘이 노랗게 그리고 붉게 익어가는 걸 보는 게 그렇게 행복했다. 굉장히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뿌듯하기까지 했다.
오래된 거리에서 말을 걸어온 낯선 얼굴들. 익숙한 거리 위로 불어오던 기분 좋은 낯선 바람. 그 끝에 발길을 돌려 걷던 중에 마침내, 마주한 얼굴은 익은 얼굴. 주현이였다.
딱히 목적이 있어 떠나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생각 없이 걷고 걷다 문득, 고갤 들어보니 금호미술관 앞. 오래전 아름다운가게 헌책방 사업부에서 캠페인팀으로 만나, 종종 시답잖은 이야기들 나누던 아이. 미술관에도 주현이를 보러 간 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까맣게 잊은 채로 거릴 걷다, 그것도 6시 퇴근 시간을 조금 넘긴 그때 멈춰 선 거다. 선텐 된 문을 응시하니, 주현이는 한 걸음에 달려 나와 다짜고짜 나를 안아버렸다.
오랜 시간이었다. 정확히 사계절이 돌고 난 후였지만 그럼에도 우린 거리에서 방방 뛰며 급한 인사를 나누었다. 별 일 없이 지낸다는 주현이에게 일을 관둔 것, 10월에 나올 두 번째 책을 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오늘 종일 이곳에서 낯선 얼굴들을 보다 너를 만난 것이라고 하니
넌 뭘 하든지 잘할 거야.
멋있어, 우리 사진 찍자.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고 역 앞에서 헤어졌지만, 어쩐지 내내 맴돌던 말이었다. 오래된 거리에서 만난 낯선 얼굴들이 내 하루를 특별하게 해주긴 했지만 오래된 이곳에서 오래된 얼굴을 만나 들은 이 이야기는 내 내일을 새롭게 해주리라. 감히 다시없을, 행복한 여정이고 하루였다고 쓴다. 행복, 오늘은 나와 멀지 않은 이 단어가 언제 또 찾아와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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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집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 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