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걷기왕> 나만의 속도를 존중해주세요.
가랑비메이커 매거진 [책장과 극장 사이]
#movie 6. <걷기왕>
*매거진의 모든 감상은 가랑비메이커의 개인적인 견해와 분석에 따른 것임으로 불법 복사를 금합니다.
모바일에 최적화되게 편집하였습니다.
(Queen of Walking, 2016)
줄거리 선천적 멀미 증후군으로 세상의 모든 교통수단은 그림의 떡인 만복의 유일한 주특기는 걷기. 꿈도 없고 머리는 없어도 왕복 4시간 거리의 학교로 매일 걷고 또 걷는 불굴의 소녀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빨리, 열정적으로! 를 외치지만 뭐든 적당히 중간이나 가고 싶던 그녀의 삶에 '경보'라는 것이 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빠르게 가고 싶다면 부지런히 걸어야만 하는, 달리는 것을 참는 것이 가장 힘들다는 경보를 시작하게 된 만복. 과연 만복은 새로운 도전 끝에 무엇을 얻게 될까.
내 걸음이 좋아요
여고생 만복은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 매일 왕복 4시간의 걸음을 걷는다. 모두가 그런 그녀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혹은 미련하게 볼지 몰라도 이미 오랜 기간 익숙한 걸음을 걸어온 그녀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울 뿐이다.
매일 부지런히 걸어도 늘 교문 앞에 턱, 걸려 지각을 하기 일쑤이지만 만복이에게는 언제나 제 걸음을 걷는 것이 편하다. 선천적 멀미 증후군으로 어쩔 수 없는 걸음을 걷는 것을 아는 아버지마저도 이따금 걷는 것으로 고생스러운 딸에게 쓴소리를 하지만 만복은 그저 헤헤, 웃음으로 넘기며 자신의 속도에 맞춰 발을 움직일 뿐이다.
꿈을 향해 가는데
매일 걷고 또 걸어야만 하는 만복이의 사정을 알게 된 담임선생님은 그녀에게 육상부를 제안한다. 만복에게 딱 맞는 종목이라는 경보. 만복은 생각지도 못한 운동이었지만 꿈도 흥미도 없는 지루한 일상에서 경보, 라는 이 두 글자에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육상부 '경보' 에는 유일한 선수가 였던 에이스 수지는 갑작스럽게 합류하게 된 만복이 마음이 들지 않는다. 별다른 끈기나 의지가 없어 보이고 경보에도 영 소질이 없어 보이는 만복이,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켜내고자 하는 경보 선수의 자리를 쉽게 생각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만복에게 수지는 이런 말을 한다. "있지, 나는. 목숨 걸고 해. 이거 목숨 걸고 안 하면 제자리도 찾기 힘들어." 이 대사에서 그간 무의식적으로 만복과 비슷한 마음으로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던 때가 내게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흘린 땀과 피에 대해서 우리는 언제나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으면서 제 자리에 선 무게에 대해서만 목소리 높이기 바쁘지 않았는지. 그게 내 모습은 아니었는지, 반성이 들었다.
그러나 만복은 그간 어느 곳에서 속하지 못한 채 주변만 맴돌던 자신이 육상부라는 곳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에서 큰 위안을 얻는다. 빨래와 청소를 하며 육상부 막내로서 나름의 포지션을 얻기 시작한 만복은 수파르타라고 불릴 정도로 열심인 선배, 수지에게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 열심히 훈련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따라서 열심히 해서 무언가를 이뤄내고 싶다는 만복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수지. 매일 함께 운동장을 돌고 경보에 대한 마음을 나누면서 둘은 가까워지기 시작하지만 멀미로 이동이 힘든 만복에게는 대회마저도 크나큰 산이다. 게다가 만복이의 열정에 대한 아버지와 친구,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라는 식인데....
전국체전 준비로 맹훈련에 돌입한 만복은 매일 학교 수업 내내 피곤해하는데 그런 만복을 지원은 한심하게 바라본다.
정신 차려, 이만복.
너 그거 언제까지 하려고 그래?
딱히 좋아서 하는 것도 아니면서.
만복은 화가 나, 지원에게 역시 상처가 될 이야기를 해버리고 만다. "그러는 너는? 공무원이 좋아서 하는 거냐? 평생 그렇게 등본이나 떼면서 살아라."
담임선생님과 원치도 않은 진로상담을 하게 된 지원은 만복과의 대화가 마음에 걸렸지만, 꿈에 대해 묻는 질문에 공무원이 되는 것이라고 답한다. 이때 담임선생님은 지원에게 다시 한번 되묻는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진짜 꿈!
반짝거리고 왜, 그런 거 있잖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때 지원은 말한다.
왜요? 공무원은
왜 꿈이 아닌데요?
안 그래도 힘든데
뭘 자꾸 참고
견디라고 하는 건데요..
/이 장면이, 지원과 담임선생님의 대화가 내게 여고시절을 불러왔다. 지원에게는 현실적인 꿈에 대한 지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믿어주고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그리고 정말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지원에게는 적당한 현실적 타협이 아닌, 두근거리지 않을지는 몰라도 진짜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지원에게 반짝거리고 두근거리는 것이라니. 꿈은 언제나 그 자체로 그 누구의 가치평가도 필요치 않다.
내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어쩌면 정반대의 입장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고시절,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고3 때까지 희망 직업란에 새겨진 그 두 글자를 그저 응원해주는 이는 없었다. 나 역시 많이 외로웠고 평가가 아닌 그저 응원이 필요했었다. 내 꿈도 꿈이라구요.
지원과 마찬가지로 내게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킨 만복의 외침이 있었다. 만복은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수지와 함께 서울로 가기 위한 긴 여정을 떠난다. 이미 만복의 지독한 멀미를 알았기에 수지는 만복과 함께 걸어 잠실경기장까지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훈련으로 성한 곳이 없는 만복의 발은 점점 더 나빠지는데 이를 발견한 수지는 (수지 역시 부상을 숨기며 운동에 매진했었다) 자신 같이 되어버릴까, 만복에게 크게 화를 낸다. 그런 수지에게 만복은 외친다.
왜 선배가 하는 건 노력이고
제가 하는 건 미련한 거예요?
내 노력도 노력이에요!
/만복은 경보 경기를 준비하면서도 자신의 소질에 대해 고민해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자신 스스로도 미덥지 않은 자기를 외면하며 열심히 걸어왔는데 그런 자신을 보며 미련하다는 수지의 말은, 만복에게는 큰 상처였을 것이다.
내게도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남들과 조금 다른 길을 가려는 내게 세상은 조금 더 배부를 수 있는 삶에 대해 이야기했고 내가 걸어가고자 하는 길에 대해 내가 쏟는 열정들은 한 줌의 것들처럼 가벼이 만 여겨졌었다.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만복의 외침에 마음이 크게 울렁거렸다. 그리고 앞으로의 만복에게 어떤 결과가 주어진다 한들, 그저 그 걸음을 응원하고만 싶었다.
만복은 결국 전국체전에 잘 도착했을까. 그곳에서 어떤 결과를 얻게 되었을까. 그건 극장에서 직접 확인해볼 수 있기를.
결과야 어떻게 되었든 나는 만복이의 마지막, 한마디에 다시 '그 자리'가 아닌 '내 자리' 찾아 제 걸음을 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그렇게 빨리 걸었지?
가끔은 천천히 걸어도 되지 않을까?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듯 사는 삶이라고 하여도 하루에 한 두어 시간쯤은 좋아하는 영화와 책과 함께 보내는 직장인, 온종일 도서관에서 책 속에 파묻혀 있다가도 하루쯤은 탁 트인 공원을 찾아 맥주 한 캔을 비워내는 당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큰 소리로 대사를 뱉어내는 언젠가의 대배우들, 그리고 내 이름 세 글자는 던져버리고 가랑비메이커 라는 이름으로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 우리는 모두 어쩌면 만복이일지도 모른다.
조금씩 제 속도로, 제 걸음으로 그렇게 울렁거리는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imyourgarang@naver.com
instgram.com/garangbimaker
http://blog.naver.com/imyourgarang
단상집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 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