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절실했던 단 하나의 곁에 대해

영화 <시인의 사랑> 사랑의 또 다른 이름, 투영과 성숙

by 가랑비메이커


가랑비메이커 매거진 [책장과 극장 사이]

#movie 7. <시인의 사랑>


*매거진의 모든 감상은 가랑비메이커의 개인적인 견해와 분석에 따른 것임으로 불법 복사를 금합니다.



시인의 사랑 (2017)

The Poet and The Boy



줄거리 (네이버 영화) 지금, 이 감정은 뭐죠?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마흔 살의 시인은 시를 쓰는 재능도, 먹고 살 돈도, 심지어 정자마저도 없다. 그리고 시인의 곁에는 무능한 남편을 구박하면서도 세상에서 그를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 팍팍한 현실에서도 진짜 시를 쓰는 일이 뭘까 매일 고민하는 시인, 그리고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아내 앞에 어느 날 파도처럼 위태로운 소년이 나타나고, 시인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는데... 그 사람 생각이 자꾸만 나서요.




시인, 밖으로 나오다


누군가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직 가장도 시인도 되지 못했던 한 남자는 소년을 만나고 시를 쓰고 그렇게 진짜 시인이 되어갈 것 입니다. 비록 그의 삶이 몹시 쓸쓸해지더라도 말입니다. 그의 찬란한 불행은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에겐 따뜻한 위로가 될 것 입니다.

-영화 <시인의 사랑> 파칭 대본 中




언제나 그랬듯 캄캄한 극장 안에 앉아 보내는 두시간 남짓의 시간이었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여운이 남아, 쉽사리 발길을 돌리지 못했던 이유는 영화 속 시인,의 시선에 있다.


아름답고 작은 마을, 제주의 곶자왈.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와 여린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청정 시인, 현택기. 아내에게도 친구에게도 심지어 같은 동인에게도 큰 인정을 받지는 못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를 닮은 따스하고 보드라운 언어들이 가득한 시를 쓰며 "시인이란 가장 슬픈 누군가를 위해 대신 울어주는 사람" 이라는 생각으로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만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세상을 그린 시에 대한 한계를 느끼던 중, 집 근처 새로 생긴 도너츠 가게에서 "함부로 아름답게 빛나는" 소년을 마주한다.





할아버지도 고아구나



가장 좋아하는 도너츠. 그 맛에 반해, 매일 같이 들르던 공간이 이 한마디에 새로운 공기로 가득 메워진다. 카페에서 작업을 하던 중, 창 밖으로 지나는 나이 지긋한 노인의 느린 걸음을 바라보던 시인이 속으로 읊어내던 문장 사이로 불쑥, 소년의 문장이 끼어든 것.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나도인데." 그 이후로 시인은 카페를 떠나와서도, 집에서 작업을 할 때나 동네 어귀를 걸을 때조차도 소년의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소년, 곁을 찾다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영화 <시인의 사랑> 삽입 시 (그래서-김소연) 中




제주도의 작은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도너츠 가게. 그리고 그곳에서 밝게 미소 짓고 있는 소년. 언제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던 시인에게 그 소년의 첫 인상 역시 "함부로 아름다운 것" 처럼만 느껴진다.


언제부턴가 도너츠의 달콤한 맛보다도 늘 같은 자리를 지키는 소년의 모습에 이끌리게 되는 시인. 처음 만나는 감정에 휩싸이게 된 시인은 소년의 곁을 맴돌며 습작노트를 채워나가게 되는데




소년의 곁을 맴돌던 시인은 가게 안에서의 환한 유니폼에 어울리는 미소와는 다른, 가게 밖 지극히 현실적인 현실 가운데 놓인 소년을 만나게 된다. 반항기와 취기가 섞인 소년의 위태로움은 처음 마주하던 모습보다도 강한 힘으로 시인의 시선과 걸음을 붙들게 된다.





내가 불쌍해서 그러죠?


스스로를 고아라고 생각할 정도로 가족에 대한 상처로 얼룩진 소년 곁에 찾아온 시인이라는 존재. 불쑥 찾아와, 냉장고를 채워주고 소년의 병든 아버지를 챙기는 시인에게 복잡한 심정을 느끼는 것은 소년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마치지 못한 학교, 욕창으로 몸져 누운 아빠, 억척스럽고 정 없는 엄마- 어느 곳 하나도 기댈 수 있는 곁이 없는 소년 역시 시인에게 조금씩 곁을 주기 시작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에 대해

투영과 성숙



흐린 날도 오래되면 맑게 흐릴 수 있어서
바람이 고였다가 다시 바람을 일으켜서
슬픔도 고이면 거름이 되어서
인공호흡기처럼 내 마음을 지탱해줘서
내 마음 어느 곳에 곶자왈이 있어서

-영화 <시인의 사랑> 삽입 시
마음의 곶자왈 - 현택훈 中




시인과 소년이 마침내 절실한 단 하나의 곁이 되기 시작한 건, 캄캄한 버스 안에서 그들이 문장을 주고 받으며 하나의 시를 써내려가던 순간이다.


죽음이란 문을 닫는 것, 커튼을 치는 것.
죽음이란.....



아픈 아버지를 잃어본 시인, 아픈 아버지를 잃어가는 소년. 그들에게 드리워진 부재에 대한 두려움과 곁에 대한 그리움과 절실함. 그것은 외모도 나이도 전혀 닮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이 함께 좁은 자리를 나눠 앉게 만들었고 소년에게 시인이, 시인에게 소년이 다가서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아내에게도, 가족 그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위안와 위로는 그들이 서로를 통해,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걔 사랑하니?


그러나, 나이 든 시인과 어린 소년이 느끼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과 관계에 쏟아지는 시선은 그들과 달랐다.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고 누구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 누구보다도 여린 가슴을 안고 사는 시인과 반항기 뒤에 가려진 두려움과 외로움에 사로집혀 있는 소년은 결국, 그 절실한 단 하나의 곁을 지켜내지 못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있어줄 것만 같은
단 한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그 사람은 망가지지 않아



그럼에도 영화는 말한다. 나란히 걷던 걸음이 멈춰버렸다고 해서, 주어진 시선이 내뱉는 이야기들이 시끄럽다고 해서 그들의 관계, '시인의 사랑'이 그저 스쳐지나가는 불온하고 불안정한 감정이 아님을.


여기서,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투영과 성숙일 것이다. 평생의 그리움으로 시를 쓴다는, 가장 슬픈 누군가를 위해 대신 울어야만 한다는 시인은 소년을 만나, 가장 보듬고 싶었던 자신의 한 조각을 발견했고 함께 울기를 원했고 그 그리움으로 글을 쓸 거다. 그리고 그렇게 진정한 시인과 더불어 단단한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언제나 불안정한 눈빛과 반항기로 떨리던 목소리의 소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있어줄 것만 같은, 단 한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그 사람은 망가지지 않아" 라던 시인의 말처럼 새로운 곁을 찾을 거고 제 삶을 지탱해 나갈 것이다. 비슷한 환경과 같은 시간과 같은 감정을 공유했던 둘이지만 어른이나 여린 마음을 안고 살던 시인, 휘몰아치던 현실 속에 크게 울지도 못하던 소년. 닮은 듯 달랐던 둘은 서로를 만났던 기억으로 조금씩 서로를 닮아가며 성숙해져 나갈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지나온 사랑, 이라는 것이 남겨둔 선물일 것이다.





영화, 그 이후

텍스트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어려운 영화를 만나면, 기분이 좋다. 수학문제라도 푸는 것만 같이 배부른 성취감이 느껴질 때까지, 쪼개고 이어 붙이는 작업이 허락되니까.


영화 <시인의 사랑>은 내가 조금 더 각별한 기대를 안겨주었다. 첫 번째로는 국문학을 전공했고 이미 두 권의 책을 낸, 현재 작가라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지만, 언제나 내 장래희망은 '시인'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사랑, 그 사랑이라는 단어가 영화 속에서 어떻게 풀어질 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을 풀어내기까지 이 영화가 촘촘하게 새겨놓은 장면들이 쉽지만은 않았으나, 너무나 충분하고 배불렀던 것 같다.


두번째로는 배우 양익준을 좋아하는 팬으로서였다. 대학 막학기 감독, 배우로 활동하는 양익준에 대한 PPT를 밤새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게 내 마지막 대학생활 프로젝트였다. 창의적인 인물로서의 양익준에 대한 소개를 하며, 언젠가는 또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지 기대감에 부풀었던 때가 있었다. 그 역시, 조금도 허전하지 않게 채워준 영화였다.


텍스트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난 직후, 가장 먼저 들었던 문장이다. 텍스트, 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모순적이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텍스트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다만, 맡은 바를 충실히 실현해내고 보여줄 뿐이다. 그에 대해 쏟아지는 말과 말과 말이 그 텍스트에 숱한 의미를 부여하고 때로는 극적인 선으로 악으로 갈리기도 한다.


이 영화는 작은 논란이 있을 수도 있다. 시인의 사랑, 그 사랑을 성애(에로스)로 받아드릴 것인지. 그 차원을 넘어선 그 어떤 무엇의 함축적 단어로 받아들일 것인지의 선택에 따라서. 나는 모호한 장면들 가운데서도 투영과 성숙이라는 선택을 했다. 그래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시인과 소년의 사랑에 뜨거운 눈물을 흘려주었다.


이제 다음은 당신들이 선택할 차례이다. 시인이 말하는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그 가운데 어떻게 읽어내려가고 마음에 담아내면 될지. 어느 편이 되든, 나는 더 많은 당신들이 따스하고 수줍고 사랑스러운 시인이 조금 더 단단해져가는 과정을 함께 따라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역시 조금은 더 성숙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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