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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Nov 01. 2016

시월의 마지막 날, 낭만적 엔딩

일년 전 오늘, 그리고 다시 '내 하루'가 있기까지


지극히 가랑 비적인 열아홉번 째 이야기

<시월의 마지막 날, 낭만적 엔딩>


*본 발행글은 가랑비메이커 본인의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며 다시 없을 순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진과 문장의 불펌을 불허합니다.




진통의 가을,

그 가운데 홀로 선 감정들




사계절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단연, 가을.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람에 또렷해지는 정신과 살짝 알싸한 코 끝이 좋아서 가을이 좋았다. 가을, 이라는 단어라는 것이 풍요와 동시에 쓸쓸함이라는 상반된 감정들을 불러오는 모순이 좋아서. 한낮의 햇살을 가려줄 이도, 따스히 안아주는 품이 없이도 담담히 홀로 걷기 좋은 계절이라 좋았다.


늘 그렇게 좋기만 했던 가을이 내게 이번엔 진통의 계절인 듯했다. 바람이 두고간 알록달록한 나뭇잎들에 마음을 빼앗겼던 내가, 언제부턴가 갖가지 고민들로 땅에 시선을 꽂은 채 걷는 시간들이 잦아졌다.




춥던 계절에 두 손 불끈 쥐고서 시작했던 새 원고작업은 갈수록 살을 애고 뼈를 깎는 것만큼이나 어렵사리, 진척이 더뎌지고 있었고 다시 돌아간 학교에서는 제자리를 찾기가 힘들었다. 익숙한 듯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고민하는 아침이 늘었으니까.





'그럼에도, 시월은'

불안한 기대



정말 그럼에도 10월은, 하는 무책임한 기대가 있었다. 좋아하는 계절이었고 좋아하는 숫자가 그 달 달력장에 박혀 있었으니까. 어쩐지 지금 당장에야 내게 아무것도 없대도. 아니 빼앗긴 것들만이 천지라하여도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10월 만큼은 내게서 풍요를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 아니 그래야, 세상 공평한 건 아닐까.




2015년 10월 31일 발간된 내 첫 단상집


일년 전, 그날도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015년 10월 31일- 시월의 마지막날은 가랑비메이커라는 이름으로 첫 페이지를 펼친 날이었다. 사실 탈고와 모든 준비를 마친 건 더 몇 주 전이었지만, 내 것이었으면 했어도 늘 다른 이의 것만 같던 계절을- 그 쓸쓸함을 이렇게라도 사랑하고 싶어서 31일을 발간일로 정했었다.


책을 처음 받아들면서도 파란 검색창에 책 제목을 검색하고 나서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던 건 10월 31일이라는 가을의 마지막 이름이었다. 그래서 내게 10월은 그럼에도, 라는 불안한 기대를 걸게 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곁에 그럼에도가 하나 더 붙는다면 결국 제자리 걸음. 10월이 조금씩 자취를 감춰갈 때까지 내겐 아무런 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꼿꼿한 등으로 치켜든 턱으로 스스로를 덜 초라하게 하고 싶던 어리숙한 아이는 제가 만든 틀에 갇혀 그 어떤 투정도 뱉을 수가 없었다. 투정 없는 이에게는 달램도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은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게 배달된

낭만적 엔딩



10월 30일 주일, 겨우 10월을 이틀 남겨두고도 채워지지 않던 공허에 빠져 무기력히 잠에 빠져든 내게ㅡ 가족들은 낭만적 엔딩을 선물하기 위해 분주했다. (정확히 말하면 감쪽같이 몰랐던 나는 언니와 아빠의 메이킹 영상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처음 책이 나왔을 때도 누구보다 가까이, 그리고 먼저 나를 믿어주고 힘이 되어준 건 가족이었다. 아빠와 언니는 그 많은 책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포장했고 택배를 보내주었다. 그 곁에서 나는 고맙다 라는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미루고 미뤘었는데. 이번에도 나는, 시원스레 고맙다! 그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포장된 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리에서 다시 정성스레 포장하던, 작은 엽서를 채우던 크고 묵직한 손이 감격스러워서 그랬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 앞에 숨겨둔 꽃을 전해주면서 개구지게 들떠 있던 얼굴들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내 안에 품은 것들이 자꾸만 새어나가자, 각박하게 굴게 되던 것은 가까운 가족들이었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예민하게 굴기 일쑤였고 입을 닫고 가만히 삐딱하게 서있기도 여러번이었다. 그런 내게 어떤 일말의 미움도 없이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도록, 시월의 낭만적 엔딩을 선물해준 이들에게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지.



시월의 마지막 즈음, 우리는 그 누구보다 더 어려웠던 이야기들을 꺼냈다. 조금은 민망한 표정으로, 상기된 얼굴로. 다른 그때, 거기의 이야기는 말고 지금, 여기의 우리를 이야기 하기 시작하자 언제나 곁에 머물렀던 우리지만 조금 더 알게 된 것들이 있었고 묶여있던 무언가가 끊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처음이라고 할만큼이나 오랜만에 우리는 함께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잔을 부딪혔다. 낭만의 가을이라는 것이 늦게 찾아왔대도 나는 기다릴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나의 또 다른 계절이

다정할 수 있기를



어제의 기억과는 상관없이 오늘의 기억들이 새로 새겨지듯, 내게도 그날의 행복했던 장면들과는 상관없는 지루하고 피로한 일상이 31일, 마침내 시월의 마지막이던 어제에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퇴근 이후에도 미룰 수 없는 모임이 있어, 10월의 마지막을 겨우 1시간을 남겨두고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


지친 기색을 숨기며 겨우 현관문을 열었을 땐 어쩐지 설렘 가득한 얼굴을 한 언니가 나를 반겼다.  인사를 나누고 방으로 직진하는 나를 졸졸 따라오던 언니는 뿌듯한 얼굴로 무언가를 건냈다.



이거 받아. 
애라야 축하해.





어제로도 배불렀던 마음이었는데 언니는 세시간 동안 그랬더는 내 책의 표지 그림 액자를 건냈다. 그리고 내가 눈독 들였던 언니표 엽서 가득 나를 향한 마음들이 있었고, 언젠가 내가 잘 못 사왔다던 미스트와 작은 쪽지까지. 그 곁에는 어제 받았던 백합이 하루만에 활짝 피어있었다. 나를 향해 두 팔 벌리고 섰는 넓은 마음처럼.


고마움에 고맙다라는 말도 잊은 채로 하나 둘 씩 만지고 음미해 갔을 때 언니가 다시, 저쪽에서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어떤 동영상 하나를 재생 시켰다.




내 하루를 위한 기록이었다.
오로지, 나를 위해

이 귀한 계절의 끝을 썼을
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축축해졌다.



책을 좋아하고 자주 가지고 다니는 내가 정말 갖고 싶었던, 이북리더기가 내 시월의 낭만적 엔딩의 엔딩이었다. 얼마 전에 이야기 했던 내게 시월이 지나가버리기 전에 주고 싶어 언니는 오후에 쉽게 나가지지 않는 추위를 향해 걸음을 떼었다. 그리고는 기다렸을 것이다. 알려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늦어지는 동생의 귀가를.


그 마음들을 생각하니, 내게 오랜 시간 머물러 있던 감정들이 조금씩 자취를 감추는 것 같았다. 이유 없이 가라 앉지도 잦아지는 불평도, 모두 그렇게 조금씩 내 안의 어둠을 몰아내고 다시 이들이 전해주었던 다정함으로 나를 채우고 싶었다.


다시 시작된 11월, 여전히 내게 남겨진 2016년을 나는 다시, 그들이 생각하는 나대로 나답게 돌아갈 생각이다. 그리고 정말 낭만적 엔딩으로 이 한 해를 보내줄 것이다. 





 imyourgar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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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imyourgarang


단상집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 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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