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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Nov 10. 2019

퓌라모스와 티스베

John William Waterhouse



John William Waterhouse - Thisbe or The Listener [1909]



세미라미스 여왕의 치하 바빌로니아에서 으뜸가는 미남은 퓌라모스, 으뜸가는 미녀는 티스베였다.

두 사람의 집은 가까이 있었다. 집이 가깝다 보니 집안 사이가 가까웠고, 집안 사이가 가깝다 보니 이 두 젊은이 사이도 가까워져 이윽고 서로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기꺼이 결혼 상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부모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서로의 가슴에서 같은 뜨거움으로 타오르는 것, 이것만은 부모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손짓, 눈짓으로 속마음을 나누었다. 그러자니 서로의 불길은 서로의 가슴 속으로만 타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두 집 사이에는 벽이 있었는데, 이 벽에는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벽을 쌓을 때 제대로 쌓지 못해서 생긴 구멍이었다. 그 때까지 벽에 구멍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용케 그 구멍을 찾아냈다. 하기야 사랑을 구하는 이들 눈에 무엇인들 안 보였겠는가.

이 구멍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통로 구실을 했다. 달콤한 사랑의 말이 이 구멍을 통하여 넘나들었다. 퓌라모스가 벽 이쪽에 서고, 티스베가 벽 저쪽에 서면 두 사람의 숨결은 하나같이 달아올랐다. 두 사람은 이렇게 탄식했다.


「무정한 벽이여, 어째서 우리 둘을 이렇게 갈라놓는다지? 그러나 우리는 너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사랑의 말에 목말라 있는 귀에 달콤한 사랑의 말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다 네 덕분이니까.」



두 사람은 벽 양쪽에서 각각 이렇게 속삭였다. 이윽고 밤이 되어 이별을 고해야 할 순간이 오면 티스베는 티스베 집 쪽 벽, 퓌라모스는 퓌라모스 집 쪽 벽에 입술을 눌렀다. 그 이상으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새벽의 여신 에오스1)가 별들의 불을 끄고, 태양이 풀잎에 맺힌 이슬을 떠나게 할 즈음이면 두 사람은 같은 곳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기구한 팔자를 한탄하다 한 가지 대책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밤이 되어 모두가 잠이 들면, 양가 부모의 눈을 피해 들판으로 나가자고 약속한 것이다.

두 사람은 한꺼번에 움직이면 혹 남의 눈에 뜨일 염려가 있으니까 마을 경계선에서 멀리 떨어진〈니노스의 묘〉라고 불리는 유명한 왕릉에서 만나되, 먼저 도착한 사람이 그곳에 있는 나무 밑에서 나중에 오는 사람을 기다리기로 했다.두 사람이 지칭한 나무는 흰 뽕나무였는데, 이 뽕나무는 그곳 왕릉의 차가운 샘가에 서 있었다. 서로 말을 맞춘 두 사람은 태양이 물에 가라앉고, 바로 그 물에서 밤이 떠오르기를 하마하마 가슴 졸이며 기다렸다.이윽고 티스베는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는 집안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집을 나와 예의 왕릉으로 갔다. 그리고는 약속했던 나무 밑에 앉아 기다렸다.



어스름 초저녁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는데, 암사자 한 마리가 그곳에 나타났다. 암사자는 갓 잡아먹은 짐승의 피를 입가에 잔뜩 묻힌 채 목이 말랐던지 샘을 찾아 그곳까지 왔던 모양이었다. 티스베는 암사자에 놀라 그곳에서 도망쳐 바위 틈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도망치던 나머지 그만 쓰고 있던 너울을 떨어뜨리고 말았다사자는 샘물을 마시고는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리다 땅바닥에 떨어진 티스베의 너울을 보고는, 피투성이 입으로 그것을 물어 흔들어 발기발기 찢고 말았다.  


조금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한 퓌라모스는 모래에 찍힌 사자의 발자국을 보고는 낯색을 잃었다. 곧 갈가리 찢긴 채 피투성이가 된 티스베의 너울도 그의 눈에 띄었다. 퓌라모스는 그 너울을 보고 부르짖었다.


「아, 가엾은 티스베, 나 때문에 죽었구나. 나보다 오래 살아야 마땅한 그대가 나를 앞서 희생되었구나. 그래, 나도 그대를 따르리라. 그대를 이렇게 무서운 곳으로 오게 하고도 내 손으로 지켜 주지 못한 허물이 어찌 작다고 할 수 있으랴? 자, 사자여! 바위 틈에서 나와 이 죄 많은 몸도 그 이빨로 갈가리 찢어다오.」

퓌라모스는 너울을 수습하여 약속했던 나무 밑으로 갔다. 그는 그 너울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며 눈물을 뿌렸다.
「그대 피로 물든 이 너울, 내 피로 다시 한 번 물들이리라.」
퓌라모스는 이 말과 함께 칼을 뽑아 제 가슴을 찔렀다. 찔린 곳에서 용솟음쳐 나온 피는 하얀 뽕나무 열매를 빨갛게 물들였다. 그 피가 땅에 스며 뿌리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가지를 타고 뽕나무 열매에 스민 것이었다.

그 동안 티스베는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다가, 너무 오래 숨어 있으면 애인이 실망할까봐 조심스럽게 바위 틈을 나와 애인을 찾아보았다. 자기에게 닥쳤던 위기를 한시바삐 애인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티스베는 약속 장소로 가보았다. 뽕나무 열매 색깔이 전과 달랐다. 티스베는 뽕나무 열매의 색깔이 변한 것을 보고는, 혹 나무를 잘못 찾은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티스베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티스베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떨림이 온몸으로 번져 갔다. 일진광풍에 조용하던 수면이 일렁거리는 것과 흡사했다.

티스베는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애인이라는 걸 알고는 울부짖으며 자기 가슴을 쳤다. 티스베는 숨이 끊어져 가는 퓌라모스를 부둥켜안고 상처에 눈물을 뿌리며 이제 식어 버린 입술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울부짖었다.

「오, 퓌라모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요? 퓌라모스, 당신의 티스베가 이렇게 부르고 있어요. 자, 고개를 들어 보아요.」

퓌라모스는, 티스베라는 이름에 잠깐 눈을 뜨고는 피에 물든 너울과 빈 칼집을 보았다.

티스베는 울부짖었다.

「자기 손으로 찌르셨군요. 그것도 나 때문에······. 이번만은 나도 당신만큼 용감할 수 있어요. 내 사랑도 당신의 사랑 못지않게 뜨거울 수 있어요. 나도 죽어서 당신 곁으로 가겠어요.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죽음도 당신 곁으로 가려는 나를 말릴 수는 없을 거예요. 아, 가엾은 양가의 부모님들이시여, 저희들의 애절한 소원을 용납하소서. 사랑과 죽음이 저희를 묶었으니 바라건대 한곳에 묻어 주소서. 그리고 뽕나무여, 우리 죽음의 표적을 잊지 말고 기억해 다오. 우리 둘이 흘린 피를 열매로 기억해 다오.」

말을 마친 티스베는 제 가슴을 칼로 찔렀다. 티스베 부모는 딸의 소원을 용납했고, 신들도 이를 옳게 여겼다. 두 사람의 유해는 한곳에 묻혔고 뽕나무는 오늘날까지도 이를 기념하여 붉다 못해 검붉은 열매를 맺는다.

무어는 『기정(氣精)의 무도회』(The Sylph’s Ball)에서 데이비의 안전등2)에 빗대어 티스베와 퓌라모스를 갈라놓던 벽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오, 은밀히 타오르던 저 위험한 불꽃 가에,
데이비가 교묘하게 얽어놓은
저 안전등의 철망이,
저 방화망의 커튼이
있었더라면!
데이비는 불꽃과 공기 사이에
그물의 벽(젊은 티스베의 희망을 가로막던 저 벽 같은)을 세워,
이 위험한 둘에게
모습은 서로 볼 수 있게 할지언정 입맞춤은 허락지 않았으리.

미클이 번역한 『루시아드』3)에는 퓌라모스와 티스베의 이야기와 뽕나무 열매의 전신(轉身) 이야기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인유가 엿보인다. 시인은 이 시에서 〈사랑의 섬〉을 노래하고 있다.  

이 섬에서는, 포모나4)가 인간의 밭에 내려준
갖가지 과실나무가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자란다.
그 달콤한 향기, 아름다운 빛깔,
인간이 애써 가꾸어도 여기에 미치지 못했다.
버찌도 여기에서는 반짝반짝 빛나고,
연인들 피에 젖은 오디도 뽕나무 가지가 휘도록 줄줄이 달린다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2009. 6. 19., 토마스 벌핀치,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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