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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Jun 26. 2020

이 나무는 내가 아닌가!!

  깊은 밤의 결을 가르는 흰 새들을 본 적 있었다. 그런 밤이 있었다. 먼 객지에서 살았던 기억에 아직도 날고 있는 흰 새들. 소리 없이 밤을 갈랐다. 이주민처럼 뒤돌아봄 없이 미래를 향해. 당장의 궁핍 너머 풍요를 향해 별자리의 밤을 더듬었고 머릿속 철분의 나침반으로 밤을 가로질렀다. 책을 옆구리에 끼고 대문 옆 화장실을 다녀오는 짧은 시간 동안의 장면이었다. 그 시절 내가 읽었던 책 들은 지금은 온밤을 가로질러 먼 항해를 하는 있겠지.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객지의 밤. 청년 시절의 밤. 미친 듯 책에 홀려 책을 끌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객지였고 혼자였고 북향의 창으로 외풍이 심한 가게에 달린 방이었다. 풍치가 있었고 잇몸이 붓고 피가 났던 밤이었다. 그 날들의 밤에 무슨 책을 읽었던가. 카프카, 엘리엇, 이상... 그 시절의 독서는 혼자만 즐기는 생의 향연과 같았다.  시집 들을 읽었고 소설을 파헤쳤고 위대한 문학가 들을 친구로 사귀었다. 그 친구들은 전쟁과 실존 사랑과 이별 고통 기만 섹스와 배신과 고독한 생을 살아낸 위대하고 비루한 인물을 내게 보였다. 나는 이미지에 취하고 인간의 위대함에 눈물 흘렸고 비루한 삶을 살다가 예술가들을 경외했다. 온갖 생의 감정들이 끓어 넘쳤다. 이젠 그 살음의 날들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다시 또 살아내지 못할 법도 없다 싶다. 이러한 개인적 도취의 나날은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 경험치의 차이, 대상과 실체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 모두들 <알랑-비탈>의 시기가 없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에곤 실레의 늦가을의 어린 포도나무처럼 춤추듯이 살아냈을 시절이 다 갖고 있다. 에곤 실레의 늦가을의 포도나무를 보면, 나무는 생이라는 여정의 언덕에 일찌감치 올라서 있다. 나무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텅 빈 하늘. 회색의 하늘에 빈 공간은 강한 바람에 찢겨있다. 어떤 사연으로 나무는 이 언덕에 올랐는가? 아마 누구보다 일찍 생의 가을을 맛봤을지도 모르겠다. 늦가을의 어린나무는 외발로 서 있다. 한 발은 힘껏 차올리고 있다. 반사회적이며 한편으로는 살풀이 춤추듯 휘영청 들어 올리고 있다. 도취와 반항. 어린 팔들을 하늘로 풀어내고 있다. 생의 기력이 이제 막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어쩐지 나무에게서는 실존의 고통과 괴로움이 한가득이다. 전망하는 생의 미래는 나무에게는 없다. 오로지 현재의 실존적 목질의 그것 외에 달리 없다. 

 다시 그 시절의 청년시절로 돌아가자면 나는 아마도 늦가을의 포도나무처럼 살았던 것 같다. 먼 객지의 후미진 상가 골목의 끄트머리 가게에 달린 방에서 세상 것들과 무관한 것에 홀려 있었던 시절. 프루스트를 읽고 바타이유를 읽으며 흥분하고 열렬해하면서 문학의 정수를 더듬던 시절은 마치 에곤 실레의 춤추는 늦가을의 나무와 흡사했다. 몸에 살이 붙을 여력 없이 살아냈던 뜬 눈의 밤 들. 자고 싶지 않았던 밤 들. 그래서 그런가. 그림을 본 순간 '저건 내가 아닌가'. 했다. 속엣말이었다. 하지만 크게 소리 낸 말이었다. '이 나무는 내가 아닌가!!' 다시 춤추는 나무를 보면, 나무는 마치 자기를 비하하는 듯하기도 하다. 시니컬하고 쾌락 원칙의 것들을 멀리 차 버린 후의 고립무원의 지경이기도 하다. 실성한 듯 자기를 방기 하는 춤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나무의 밑동, 생의 밑바탕은 얼마나 강한 생의 의지가 담겨 있는지. 세상을 한꺼번에 모두 일갈하듯 날려버린 독야청정의 자세. 힘 안에는 고통과 고독이 함께 있다. 어린 포도나무가 일지감치 포도주의 즙액을 모두 짜낸... 너무 일찍 생을 앞서 살아버린... 애늙은이 같은 늦가을의 어린나무. 다시 그 친숙한 늙음 살아볼 수 있을까? 다시 사는 늦가을의 어린나무처럼. 그렇게 될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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