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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Jun 20. 2020

오후의 바람을 보라.


https://youtu.be/B8BjkMv9sME

 삼복의 뙤약볕에서도 꽃 피울 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 맺을 나무는 혼신으로 열매를 매단다. 멀리 있는 식물에 닿기 위해 냇물은 흘러가야 하기에 저의 끝과 처음이 없고, 집의 귀퉁이에서 몽상할 돌멩이는 몽상에 젖어야 한다. 먹이를 구해야할 하기에 거미는 저의 몸에서 실을 뽑아야 하고 가을에 울음 울어야 할 풀벌레는 여름내 울음 우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


 - Laurits Andersen Ring - Ole Looking out of the Window [1930]


 오후의 바람도 그렇다. 오후의 바람에게는 오후의 바람에 걸맞은 살결이 있다. 오일장 열리는 읍내의 보세 옷 가게 안에서도 쫓겨나 거리의 옷걸이에 너펄거리는 색 바랜 남방셔츠에게만 어울리는 바람의 결이 있다. 그 바람은 그 셔츠의 펄럭거림에 맞춤된 바람이다. 길에서 길을 묻는 사람처럼 오후의 바람도 그렇다 갈피 없는 바람에게는 분명 그의 방황하는 방향의 결이 있다. 오후의 바람도 그렇다. 그는 수 만 갈래 살결을 갖고 있어서, 바람의 결이 닿아야 할 곳으로 숱한 살결이 갈라 흩어지는데 저도 저의 흔들림을 알아채려고 어린나무의 전부를 흔들어 보고 노인이 앉은 이끼 낀 시멘트 포장길의 축축한 공기를 골목 끝으로 밀어낸다. 오후의 바람도 그렇다. 사람의 살결 같이 바람이 바람에게 흔들리면 먼 사람이 아프듯이 오후의 바람도 그렇다 먼 사람의 거리가 희미하고 친구를 잃은 까만 고양이의 사흘 나흘 슬픔이 가득한 눈에 그렁한 황금빛 눈망울에게도 아픈 바람이 있어서 한 해 살이 식물의 어린 떡잎 끝에 코를 닿았던 고양이 콧잔등 같은 바람이 되어 주는 것이다. 오후의 바람은 그렇다. 가령 사나흘 곡기를 끊었는지 굶주렸는지 알 수 없는 몸피로 와서 건초 냄새를 풍기는 바람에게도 괴로움이 한량없어 찢겨진 옷가지 마냥 아프기도 하다. 오후의 바람은 그렇다. 해를 향해 몸이 기울어지는 식물의 기울기 마냥 바람의 방향에고 기울기가 있어서 솟아오르는 식물의 방향 보다 쓰러지는 식물의 방향에 꽃숭어리 매달게 하는 오후의 바람도 그렇다. 맵고 짜거나 헐하고 쉬이 배가 꺼지는 가루음식이 자꾸 당기는 것은 그렇게 우리 생이 살아도 충분하기에 오후의 바람도 그렇다 저의 공복에는 저에게 걸맞은 포만이 있어 습기 많은 오후의 간이버스 정류장에 고여 있기도 하다. 오후의 바람도 그렇다. “물에 데려다 줘” 라고 몸에 닿아서 “물에 데려다 줘” 하는 바람. 가지도 산도 들판도 거치지 않고 메마른 서정으로 와서 “ 물에 데려다 줘” 하는 바람에게 사람의 발음으로 물을 이야기 하거나 바람의 발음으로 물을 이야기 할 때는 목마른 서정으로 다가온다. 오후의 바람도 그렇다. 힘든 독서를 하고 책의 말미를 버티는 것처럼 바람에게도 저의 오후를 버텨내는 독서를 닮은 세상 읽기가 있다. 바라보라. 바람의 세상 읽기에 간혹 내 생의 마지막 숨결을 느끼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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