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재즈피자

백일홍 꽃그늘 아래 벤치에서의 잠

by 일뤼미나시옹


저 시궁창 하수구에 때꾸정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동시에 내 혈관 속에 똑같은 꾸정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지각할 수 없는 자는 천치바보다. -김용옥, 기옹은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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랙타임(Rag-Time) 음악은 1890년경부터 미시시피 강, 미주리 강, 오하이오 강 유역에서 시작한 새로운 음악이다. 억압에서 감정의 폭발로, 단조로운 노동에서 야생적인 축제의 형식으로 이동하는 미국 흑인들의 능동적인 삶의 한 측면이라 볼 수 있다. 랙타임이라는 명칭은 초기 연주자들의 남루한(ragged) 행색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또한 랙타임은 당김 음을 구사한다. 템포는 일정하지만 그렇게 진행되는 동안 리듬은 몇 번이나 변화된다. 싱코페이션의 끈적끈적함은 약한 비트를 강하게 만들어주고, 반복적 저음의 악센트를 돌연한 정지로 만들어낸다. 이 정지 속에서 저음부의 리듬 패턴이 멈춤으로써 최고 음부의 효과를 극대화 한다. 또한 헐떡거리는 듯한, 침묵과 함께 리듬을 완전히 파열시켜버리는 더 극적인 스톱타임도 싱코페이션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궁극적인 재즈의 이해는, 삶이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것이 아니므로, 음악 또한 불안정한 형태로 변화할 수밖에 없음에 있다. (El Trilogy/ Dave Douglas/ B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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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 달에 한 번 단식하는 날이다. 물만 마시며 집에 있는 날이다. 물만 마시면서, 물만 먹고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한다. 물만 먹어도 푸르고 싱싱한, 혈기왕성한 존재들에 대해 생각한다. 대장이 없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한다. 혓바닥이 없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한다. 혓바닥에 잠시 머물다 삼키면 그만인 것을 생각한다. 잠시 혓바닥이 느끼는 맛 때문에 산지사방 맛있는 것 찾아다닌 것에 대해 생각한다. 몸은 오후가 되면 맥이 빠지고, 방바닥에 드러눕는다. 바깥에 대한 의식이 조금 희미해진다. 여러 번의 소변을 보면서, 내 몸을 훑어온 물은, 내 몸을 어떻게 읽었을까! 생각한다. (Booker Ervin/ Lament For BookerErvin/ Enja)



보리차 냄새 나는 누런 오줌 개는 어지간해선 집안에서 대소변을 보지 않아 매일 같이 골목으로 데려고 나온다. 그럴 때마다 개는 흥분된 콧숨소리를 내며 길을 냄새 맡기 시작한다. 단 하루라도 이 길이 싱겁거나 거북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길의 끝 들판까지, 들판 끝 허리 잘린 산까지. 목줄을 끌어당기며 다급히 몸 안에 무슨 메시지를 흡입하는 것이다. 마치 갈증에 타는 듯이 길을 냄새 맡는 개는 원하는 메시지가 몸체 채워졌다 싶을 때까지 길바닥에서 코를 떼지 않는다. 나는 어지간히 인내심을 가지고 개를 따라가지만, 길을 냄새 맡는 개는 여전히 갈증에 겨워 있어 냄새 맡기를 그치지 않는다. 기필코 들어오기 싫어하는 개를 겨우 집으로 끌고 오면, 이번엔 가을 볕 환한 마다에 배를 깔고선 눈을 찍 감아버린다. 산 아래까지 걸어가며 맡은 냄새들을 하나씩 떠올리는 것이다. 길고 느린 숨소리를 내면서, 내가 도무지 해독할 수 없는 경전을 외기라도 하듯, 마당에 배 깔고 엎드린 개는 깊은 침묵에 젖는다. 어쩌면 지상에서 곧 증발해버릴 경전을 찾아 몸에 쌓고 있는지 모른다. (Mask/ Jeff Gauthier/ cryptogramophone)


https://youtu.be/8YBbEGSgn34




발치아래 저 왕국에 가볼 일이다. 가서 부역이나 해볼 일이다. 몸통의 곱절이 넘는 알곡이나 밥알을 끌고 지하창고에 갖다 쌓는 재미 말고는 별다른 놀이도 없는 순진한 몸의 나라에 가볼 일이다. 박수가 동원된 율법이나, 교리가 없는 왕국. 왕이래야 다산의 고통밖에 모르는 왕국에 가볼 일이다. 왕국 십리 밖까지 물동이 이고 오는 여인들 속에 끼거나, 성을 쌓는 벽돌지기 혹은 부화중인 알을 돌보면서, 낡아 너덜거리는 율법과 교리를 걸치고 있어 제대로 한번 사용해 보지 못한 육체. 제대로 한번 고장나보지 못한 육체를 어떻게 한번 부려볼 일이다. (Fingers and Passions/ Sergey Kuryokhin/ Leo)


https://youtu.be/_C8HNOWngQY


10년 만에 만난 그의 손은 딱딱했다. 그 손은 금형공의 손이다. 그 손은 쇳덩이를 만지며 갈고 닦는 손이다. 그 손은 차갑고 딱딱한 쇳덩이를 매일 만진 손이다. 다듬질쟁이의 손끝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다. 굳은살의 일부는 쇳덩이의 것이다. 열 손가락 끝에는 기름이 배어 있다. 비누로 몇 번씩 씻어내도 기름때는 벗겨지지 않는다. 설이나 추석 명절이나 되어야 뜨거운 목욕탕에서 불려 벗겨내야 하는 기름때. 나날의 생을 쇳덩이를 갈고 다듬느라, 쇳덩이에 혼신을 다하느라, 몸에는 살이 붙을 없다. 어쩌다가 내 손이 그의 등에 닿았을 때, 내 손은 흠칫 놀라 튕겨나가다시피 했다. 그의 몸은 희고 가벼운 새의 몸이었다. 날갯죽지가 삐쳐 나온 등은 세월에 굽어 버렸다. 허리 구부려 뭔가에 열중하는 이들은 모두 새가 된다. 그 자체로 그의 몸은 새가 된다. 안주도 마다하고 마신 깡소주 몇 잔에 창백한 안색으로 한 켠에 쓰러진다. 몇 년 동안 반듯하게 한번 누워본 적 없는 듯이 오그라진 몸에서 가쁜 숨이 샌다. 숨소리는 생이 깎여진 흔적이다. 다음 날 그의 삶을 미리 들려주는 소리이다. 그 다음 다음 날의 삶도 그렇게 진행된다는 소리이다. (Seven Days Of Falling/ E.S.T/ GUL)


https://youtu.be/Ka9HS_4SII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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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식당 추어탕이 생각나서 청도에 간다. 한여름 뙤약볕을 뚫고 뜨거운 국물 마시러 간다. 부산이나 울산에서 왔다는 이들 줄 서서 기다린다. 탁자에는 뜨거운 뚝배기 놓인 자리마다 둥그런 상처가 나 있다. 물행주가 탁자를 훔치고 나면, 검은 탁자 위로 둥그런 달 모양이 떠오른다. 나는 사실 이 흔적을 보러 여기 온 것이다. 환하게 내 이마를 비추는 월광이다. 밤의 해바라기와 얼굴을 마주한 느낌. 어둑신한 실내에는 헉헉거리며 뜨거운 국물 떠먹는 소리 가득하다. 그런 몸들에게는 아무런 괴로움도 없어 보인다. 갑자기 국물 떠먹는 소리가 슬프게 들린다. 사람들은 각자의 고통을 몸 밖으로 내보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고추씨 가라앉은 뚝배기의 밑바닥까지 비우고 나와 한길 걷는다. 뜨거운 것 먹고 걸을 때 발바닥에 전해지는 세상의 맛. 공중에 붕 뜬것 같은 몸. 고요한 세상에 괜히 시끄럽게 걷는 듯 한 느낌. 뚝배기 놓였던 칠 벗겨진 식탁의 누런 빛깔의 생으로 나는 돌아간다. (The Enemies of Energy/ Kurt Rosenwinkel)



어느새 나의 몸은 다른 몸으로 바뀐다. 물에 젖는 돌이 된다. 불투명하고, 무한한 가능성의 돌이 된다. 첫 음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된다. 토드 구스타브센 트리오의 피아노 연주 속에는 비 맞는 나무가 품고 있는 새집이 보인다. 우울한 공간이다. 새집에 새가 살지 않는다. 그의 피아노에는 흐릿한 여백이 자주 드러난다. 여백에는 푸른 연기가 스며 있다. 어슴푸레하고, 희끄무레하다. 가늘고 휘정거리는 잎, 넓은 습지 식물의 춤, 드럼의 심벌 소리는 깊은 곳에 있다. 떨어진 빗방울이 잘게 부서진다. 베이스에는 느린 걸음으로 산책 다녀온 사람의 입술이 보인다. 침묵은 산책한 자의 입술에 잘 어울린다. 제격이다. 나의 음악 듣기는 ‘몸바꾸기’다. 소리에 의탁하기면서 동시에 몸은 소리가 전해 주는 온도에 젖는다. 소리는 또한 내가 알지 못하는 내 삶의 비의도 보여준다. 서늘한 기운이 내 몸을 감싸고 있다. 전봇대의 아르바이트 광고지가 상상된다. 빗물에 젖어 있는 광고지. 잉크가 번져 전화번호가 보이지 않는 광고지. 종이에 잉크가 번지듯, 소리가 번진 가슴에 텍스쳐가 있다. 재즈 듣기는 곧 읽기다. ( The Ground/ Tord Gustavsen/ ECM))



https://youtu.be/4UOjwowDRQ4

땅 밑까지 깔린 노을 보러 상주 가는 동안 낮에 본 사진이 떠올랐다. 해머로 죽은 자의 뼈를 부수어 독수리들에게 주는 천장사를 생각했다. 가슴에 통증이 여러 날 있었던 탓에 그 사진은 통증을 더 강하게 했다. 시체를 뜯는 독수리들을 더 잘 먹이기 위해 머리 가죽을 벗기고 뼈까지 잘게 부숴 주는 천장사. 그가 몰고 오는 독수리 떼들 가득한 하늘 생각하며, 구병산 가을 하늘을 보았다. 나무를 올려다보다 하늘에 시선을 빼앗기는 가을. 낮에 울었던 풀벌레 울음들 사라지고 나면 지상에 노을이 내려왔다. 비단 같은 노을 등에 두르고 해지기 직전에 도는 몸의 한기를 온몸으로 받는다. 까만 밤이 오고, 하늘에는 독수리 떼에 뜯어 먹히는 사체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 닮은 별들 하나씩 찾아온다. 내 심장에 꼭 맞는 별이다. 심장의 통증에 쏙 들어오는 별이다. 어떤 별들은 해머에 으스러져 사방을 튄 뼛조각 같이 아프고 따갑다. 낮에 중국집에서 먹은 탕수육 조각이 어금니에 사이에 끼어 자꾸 입맛이 다셔지는 가을밤이다.(First Circle/ Pat Metheny Group)



진짜 인디언이라면 달리는 말에 서슴없이 올라타고,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땅 위에서 이따금씩 짧게 전율을 느낄 수 있다면, 마침내는 박차도 없는 박차를 내던질 때까지, 마침내는 고삐 없는 말고삐를 내던질 때까지, 그리하여 앞에 보이는 땅이라곤 매끈하게 다듬어진 광야뿐일 때까지, 벌써 막 목덜미도 말머리도 없이. -카프카, 인디언이 되고 싶은 마음- ( The Music Of Eric von Essen Volum Ⅱ)


https://youtu.be/5TJguVs3xfI

백일홍 꽃그늘 아래 벤치에서의 잠은 해질녘까지 계속 되었다. 이 잠 끝마치고 나면 몸피 한 겹 벗은 곤충으로 날아오를 것인가. 오늘은 길 건너 빵집보다 가까이 근접한 달이 떠오를 것인데, 누구라도 혀를 내밀면 녹아버리는 전병 같은 달 떠오를 것인데, 어딘가 떠나려는 자들은 결코 저런 잠을 자진 않을 것인데. 제 몸 붉은 동안 가지 끝에서 내려오지 않는 백일홍 연분홍 살빛. 그 아래를 떠나지 않는다고 공원관리인이 탓하여, 겨울 외투 들고 일어나게 하면, 등받이 벤치는 곤충이 머물다 떠난 빈 몸 같아 내 눈은 얼마간 아파할 것이나, 백일홍 꽃그늘 아래 벤치는 다시 채워지고, 잠 덜 깬 걸음으로 휘청거리며 외투에 한쪽 팔 집어넣을 때, 나는 팔랑거리며 이륙하는 나비 한 마리를 바라볼 뿐이다. (Kaleidoscope/ Lars Mo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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