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재즈피자

휘어진 길

by 일뤼미나시옹

세상에는 분명 아름다운 것, 경건한 것이 존재한다. 인간은 무엇이든 믿어야 한다. 예술이 없는 삶은 초라할 것이다!"

-산드로 마라이, 하늘과 땅



https://youtu.be/9vj8c-wEBsw



단골이신 老선생은 벽쪽으로 앉아

제의를 치르듯 소리도 없이

천천히 국수를 드신다.

웃옷 벗어제치고

목줄 타고 흐르는 팥죽땀 연신 닦아내는

붉은 얼굴, 누구라도 그럴 때는 벙긋해진

여름꽃이 된다.

묽은 밀가루음식 한그릇 비우는 일에도

혼신을 다하는 늦은 점심

마지막까지 국물을 떠올리며

노선생은 보신했다, 말하신다.

칼국수 한그릇에 몸을 보했다는 생이라면

신성에 가깝다.

잔돈 건네 받고 유리문 열고 나가는

老선생의 굽은 등이

창가 햇빛 속에 몸담은

洋蘭의 곡선과 닮았다.



봄볕을 쬔다. 윗옷 벗고 봄볕을 쬔다. 가만히 내 눈을 바라보는 개를 앞에 두고 봄볕을 쬔다. 양말 벗어 맨발도 봄볕에 내놓는다. 휴일의 봄볕을 맨살로 쬔다. 핏기 없는 흰 몸을 볕에 내맡긴다. 바람에 실려 오는 앞산 냄새를 맡으며 볕을 쬔다. 돌 틈에 파란 풀잎 돋는 것 보며 볕을 쬔다. 볕을 쬐는 내 몸에 파란 숨소리 돋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내리는 비 때문에 봄인데도 기운을 못 차리는 나무들의 검은 실루엣을 역광을 바라보며 볕을 쬔다. 봄에, 산다는 것은 봄볕을 쬐는 거다. 살비듬 일어나고 기미가 끼고 낯빛이 붉어도 상관없다. 봄볕에 나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둔다. 화분을 꺼내 봄볕에 내놓듯, 나를 가만히 내버려둔다. 현악기에서 현의 떨림을 만들 때, 자기의 마음도 조금 풀어내는 것처럼 내 마음의 일부를 봄볕에 풀어놓는다. 음악을 듣듯 세상 나무들이 일광욕하듯 볕을 쬔다. 봄볕에 귀 기울이면 내 눈은 피아노의 흰 건반 하나가 만들어내는 한 방울 음처럼 봄의 풀잎 위에 있다. 눈부시게 봄볕 쬐는 오후. 윗옷 벗고 맨살로 받아내는 봄볕. 적벽 돌의 교회엔 ‘수난주간’이란 현수막이 붙어 있는 오후다. 너도 읽고 있니 이 문장<The Time/Możdżer, Danielsson, Fresco>


춘설이다. 달빛 대신 춘설이다. 달빛을 먹고 봄물 길어 올려야 할 나무들 위로 춘설이다. 봄꽃처럼 사나흘도 못 견디는 춘설이다. 야음을 틈타 샐녘까지 나리는 춘설이다. 세상에 흰추위를 마지막 선물하는 춘설이다. 고요가 폭폭 쌓이는 춘설이다. 무한정으로 내리지만 오전의 햇살에 사라지는 춘설이다. 가난한 겨울나무들에게 첫날옷을 입히는 춘설이다. 기찻길 건너 앞산 소나무 높가지에 내려앉는 춘설이다. 느린 화물열차 등에 실려 도시로 가는 춘설이다. 귓불에 내려앉는 춘설이다. 귓불에 닿자마자 희미한 발음으로 사라지는 춘설이다. 공중의 언어를 알아챌 수 없는 귓불이지만 귀기울여보는 춘설이다. 봄의 꽃잎 보다 더 빠른 이별의 춘설이다. 죽은 나뭇가지를 나무에서 내려주는 춘설이다. 갓 핀 산수유에게 비나리하는 춘설이다. 무한 공간 별들의 언어로 내려와 한 나절 햇살에 자취 없는 춘설이다. 문 앞에 우두커니 멎게 하는 춘설이다. 나만이 사랑하는 문장을 찾아 읽게 하는 춘설이다. 낡은 나무벤치가 있는 담 밖 버스정류소에 앉아 빈 들을 보게 하는 춘설이다. 한 겹 옷을 더 입게 하는 춘설이다. 산수유 위에 쌓인 눈이 사라지고 나면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춘설이다. 봄기운 때문에 기억이 설핏한 춘설이다. 어릴 적 뒷집 흙담장 너머로 들리던 키 큰 누이의 울음 같은 춘설이다. 시집갔다는 것 말고 더 이상 아무런 소식 없는 것처럼 사라질 춘설이다. <Arild Andersen - Hyperborean (live, Til Radka, 2009)>


https://youtu.be/wTOJGGdr_Hs


전나무 밑에는 은박의 돗자리를 깔고 한 사내가 새우잠에 빠져 있다. 휴일의 야영장에는 한 무리 직장인들 야유회를 하고 있다.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놀다 버리고 간 쓰레기더미 근처에는 까마귀 떼들 번들거리는 검은 옷을 입고 서성거리고 있다. 족구를 하느라 술잔을 돌리느라 시끌벅적한 사람들 얼굴에 초봄 햇살이 쏟아지지만 가만히 있으면 으슬 한기가 어깨를 떨게 한다. 공동화장실 근처에 산수유가 피었지만 누구 한 사람 사진을 찍거나 꽃구경하는 이 없다. 은박의 돗자리 위 중회색 일복 입은 남자의 새우잠은 일대의 소란스러움과는 상반되게 고립되고 섬처럼 이질적이다. 술이 약해 일찌감치 쓰러졌거나 야유회 시작부터 작정하고 마신 과음으로 이거나 야근 하느라 모자란 잠과 술기운이 겹친 새우잠. 누구나 한번을 그렇게 잠들어 본적 있는 은박의 돗자리 위 눈부신 잠. 봄바람에 파르르 떠는 전나무 그늘을 덮고 자는 새우잠. 한줄기 햇살이 그의 귓불을 발갛게 달구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잠든 새우잠. 번개탄에 구운 고기냄새가 입안에 그득한 새우잠. 뼛속까지 스민 야근의 피로를 보여주는 새우잠. 나뭇잎 몇 장 바람에 뒤집어 질 때 새우잠의 몸도 한번 뒤척였지만 웅크린 몸은 풀어놓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 소리 질러 그의 이름이 직책을 부른다 해도 좀체 풀어지지 않을 새우잠. 두 손 사타구니께 찔러 넣은 새우잠에는 어떤 꿈이 필요할까. 아마도 구월을, 아마도 구월을 꿈꿀 거야. 오지 않았고 올지도 모를 구월을. 삼월인데도 막연히 구월을 꿈꿀 거야. 그의 귓불에 대고 구월, 구월하고 속삭이면 굳은 몸이 풀어질 거야. 아마도 구월을 꿈꿀 거야. 우리 생에 어느 때 꼭 필요한 구월. 구월하고 속삭여주면 사타구니께 두 손이 빠져나오고 뼈마디 소리 나는 기지개 펴게 될 거야. 아마도 구월을 꿈꾸고 있을 거야 당신의 새우잠. <Oslo Party/ Rita Marcotulli Trio /Pony Canyon Records (Japan)


https://youtu.be/EK9RtmizM1I




서재를 다시 꾸민다. 아무도 살지 않는 큰집으로 작업실 겸 거처를 옮긴다. 한 동안 노끈으로 묶어 놓았던 책들을 풀고 책장을 만든다. 적벽돌과, 페이퍼로 매끈하게 다듬은 송판들을 한쪽 벽면에 칸칸이 쌓고 책들을 채워 넣는다. 하루 종일 책에서 나오는 먼지를 마시며 서재를 꾸민다. 오래되어 색 바랜 누런 책들의 무게 없음과 근래에 구입한 책들의 무게감을 느끼면서, 책에서 만큼 시간의 변화를 빨리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방에는 몇 천권의 책이 있다. 몇 천권의 책이 있다고 하지만, 모두 다 읽은 책은 아니다. 어떤 책은 나를 외면하는 책이 있다. 몇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책과 나는 관계가 싸늘한 남녀처럼,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멀어진다. 손에서 멀어진 그날로 다시는 만나지 못한 책이 있다. 몇 번 손이 근처로 어른거렸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책이 있다. 어떤 책은 나와 한 사흘 정도만 함께 붙어 있다가 영영 내 손에서 멀어진 책도 있다. 어떤 책은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도 있다. 또 어떤 책은 십 여 년 이상 내 사랑을 독차지 하는 책이 있다. 바깥에서 절망하고 돌아오거나, 삶에 대한 무한정의 회의가 일 때. 나 자신이 나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을 때, 총체적으로 삶과 이상, 현실과 인간이라는 것에 대한 의문들이 몰아칠 때. 내가 위로 받고 기댄 책이 있다. 겉표지만 보거나, 화장실에서 한 페이지 정도만 읽어도 생애의 전부를 위로 해주는 책도 있다. 처세와 윤리적 격언이 난무하는 책, 교양과 위선이 난무하는 책들은 우리에게 진실을 보여주지 못한다. 진실이 베여있는 책은, 우리에게 괴로움을 준다. 우리의 괴로움을 씻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괴로움이라고 생각지도 않은 것 괴로움을 준다. 서재를 꾸민 후 생각해 본다. 책이란 내게 수많은 후처들과 같다. 본처는 없고 후처들만 있는 궁인 서재.


서재는 '진실의 방이며, 불편한 진실의 방/이다. 서재는 또한 ‘마음이 읽히는 방’이다. 삶에 있어 우리를 죽음직전 까지 유혹하고 다그치는 것. 바로 이 자본주의의 무한한 유혹. ‘소비’에의 부추김에서 우리는 한 시도 벗어날 수 없다.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든 ‘소비’하고 ‘구매’하게 한다. 그 많은 소비에의 유혹에서 단 하나의 소비는 그나마 ‘불편한 진실’을 구매한다고 생각해 보자. 불편한 진실이 들어있는 책 한 권을 사서 읽는 서재. 이 가난한 방에서의 책읽기. < Myriam Alter/ Alter Ego/ Intuition >


https://youtu.be/J6-ZOFl6lrg



TV를 본다. 맛 집을 찾아다니며 산해진미를 소개하는 프로다. 채널 마다 각양각색의 음색들 소개하느라 바쁘다. 커다란 입을 벌리고 고깃덩어리를 물어뜯는 얼굴들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엄지손가락을 내밀고 죽여준다느니, 끝내 준다느니 하면서 과장된 탄성을 내지른다. 심지어 살아있는 물고기나 꿈틀거리는 어패류들 끓는 솥에 넣고 박수치고 입맛을 쩝쩝 다신다. 맛있는 거 보여준다. 맛있는 거 소개해준다고 난리들이다. 땀을 흘려먹고 입이 찢어져라 먹고, 오늘 먹고는 다시는 먹지 않겠다는 듯이 노골적이고 무지막지로 먹어댄다.


왜 이리도 천박한가. 다소곳이 없는 얼굴은 왜 보여주지 않는가, 음식 앞에 잠시라도 숙연해 하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가. 죽어 사람의 몸에 들어가는 동물들과 생물에 대해 조금은 미안하고 감사하는 얼굴을 왜 보여주지 않는가. 오늘 나의 몸은 어제 내가 먹은 돼지고기나 닭고기거나 소고기로 만들어졌다. 어제나, 그저께나 일주일 전에 먹은 두부와 조개와 꿈틀거리는 멍게와 고등어 꽁치의 일부인 내 몸. 진짜 내 몸이란 없는 거다.


아무리 맛있는 거 먹어도 아무리 맛있는 고깃집에 불갈비니 떡갈비 소갈비 생고기를 씹어도 입안에 머무는 시간 얼마나 되는가 생각해 보자. 먹어 삼키면 뱃속이 알기나 하나 맛있다는 거. 양념이 어떠니 국물이 어떠니 육질이 어떻다는 걸 뱃속이 알기나 할까. 아무리 맛있는 거, 죽여주는 거 먹어봤자. 입 안에 머무는 몇 십초 이후엔 기억으로만 맛있을 뿐이다. 시인 황지우의 시 <거룩한 식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몸에 한 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살을 빼야할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비만의 해학이 어떻다는 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만 먹는 일에 대한 성찰은 없다. 거룩하게 먹는 얼굴은 왜 보이지 않는가. 비위가 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죽은 것을 먹고, 죽인 것을 먹는다. 아무리 훌륭한 산해진미라고 하지만 그것이상도 아니다. 나물반찬에 찬 밥 한 그릇을 먹을 때에도 몸속에 들어와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들에 대해 잠시 라도 생각하고 먹어야 하지 않을까. 인문학이 뭔가. 인간이 인간이고자 하는 공부 아닌가. TV 속 화장 진하게 칠하고 고깃덩이 입어 뜯어먹는 얼굴이 짐승 같다는 것 왜 모를까. 왜 그런 것만 보여줄까. 먹는 일의 거룩함을 왜 보여주지 않는 걸까.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는 우리의 몸이 우리 몸이 아니라 인간의 손에 길러져 인간의 손에 죽어 인간의 입에 들어오는 생물들이라는 걸 왜 모를까. <Arve Henriksen/Strjon/ Rune Grammofon >




어느 새 이 외투도 내 몸을 살아내느라 힘에 부치는지 몹시 지쳐 보인다. 소맷자락은 늘어졌고 바람이 불면 어깨와 등으로 바람이 새어든다. 소맷자락에 두 팔을 집어넣고 새가 날개를 퍼덕이듯 어깨를 들썩거린다. 외투는 전에 없이 가볍고 싱겁다. 몹시도 여윈 한 마리 물새처럼 내 몸에 걸쳐지는 외투. 더는 입을 수 없는 외투를 그렇다고 함부로 버리지도 못하겠다. 나에 대한 이야기가 외투 속에 고스란히 스며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을 살아내느라 지쳐버린 외투를 벗어놓는다. 십여 년을 보내는 사이 내 몸에서 추레하게 늙어버린 외투를 바라본다. 아직은 번듯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지만 내 몸에 걸치기만 내 몸은 이 외투가 몹시도 지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흐르는 물에 발목 담근 채 오랫동안 강물 내려다보던 물새가 푹 고꾸라져 강물에 쓸려가는 물새 같은 외투. 커다란 날개가 물에 젖은 채 하구로 떠내려가는 물새. 진작 알아챘어야 했다. 어느 날 내가 이유 없이 아팠던 날이 있었다. 이유 없이 아팠던 이유가 외투 때문이었던 것을 진작 알아챘어야 했다. 내 생은 어떻게 바래질까 한번 생각해봤어야 했다. 무엇으로 바래질지, 어떤 색으로 바래질지 생각했어야 했다. 바래진다는 것. 그것 참 괜찮은 시간이다. 바래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추레하고 힘없이 바래진다는 것을 알아채는 시간. 바람 몹시 부는 날을 택해야겠다. 햇살은 맑고 바람이 한 없이 부는 날을 택해야겠다. 그날 외투를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걸쳐두고 나는 외출을 갈 것이다. 시골만 찾아다니는 버스를 타고 하루를 낭비하고 돌아올 것이다. 내 생의 일부를 위로하면서 하루를 낭비하고 돌아오면 빨랫줄의 외투는 바람을 타고 어디 멀리로 날아가고 없을 것이다. 나의 체취와 나의 이야기를 껴안고 날아갔을 것이다. 나는 낙엽이 쓸려가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고 잠깐 허공을 응시할 것이다. <Arve Henriksen/ Cartography/ ecm>


https://youtu.be/g_ytFxa7V8g


한 소절 노랫가락 마냥으로 흘러나온 길이 있다. 멀리서 사람의 발걸음을 유혹하는 길이 있다. 한 구절 시 같은 길. 산에서 흘러나온 길은, 사람의 발걸음을 유혹한다. 산이 흘려낸 한 소절의 노랫가락은 그러나 멀리서 보면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랫가락이다. 길은 멀리 있는 들판에서도 보이고 자동차 타고 지나가면서도 볼 수 있다. 그런 길이 있다. 우리들 시선 멀리에 있는 휘어진 길. 낯선 이름의 동네 뒷산에 나 있는 길. 그런 길은 도처에 있다. 카뮈는 말했다. “위대한 세계란 인간이 없는 자연 -그리하여 이 세계는 나를 무화한다.” 이 위대한 자연을 만나려면 먼저 길을 찾아야 한다. 길을 만나야 한다. 나뭇잎이 모두 떨어졌다하더라도, 찬 겨울바람이 분다하더라도, 산이 내민 한 소절 노랫가락의 유혹. 휘어진 길에 홀려 걸어가 보자

서두르지 말자. 걷기에서는 서두름이 의미 없다. 서두름이 싫고 서두름이 두렵고 서두름이 지겨워서 우리는 걷기를 선택했다. 서두름. 그것은 달리는 것이다. 달리는 현대인에 대한 이 지겨운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이 달렸고 또 아주 많이 달려야 한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걷기가 필요하다. 휘어진 길로 들어간다. 울창한 수목들. 하얀 털실모양의 구름이 있는 파란 하늘. 햇살. 그리고 나뭇잎 바람에 쓸리는 소리.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혼자가 되어야 한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들이 묵상하고 있는 자세로. 저 마다의 호흡으로 저마다의 침묵의 깊이로, 저 마다의 기도형식으로 서 있다. 퇴색한 나뭇잎들 생기를 잃은 수목들. 푸석한 바윗돌. 길을 쓸고 가는 바람의 피부.

걷기가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걷기의 철학이 필요하다. 생활 속에서 걷기의 시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너무나 어렵게 되어버렸다. 걷기에는 무엇보다. 길이 필요하다. 우리를 유혹하는 길이 필요하다. 그런 길은 아주 많다. 우리들 마음의 안부를 묻는 길은 아주 많다. 이런 길을 찾아야 한다. 가만히 발걸음 옮기면서 땅의 느낌을 만나야 한다. 걷기에는 <여유>가 아니라, <사유>이다. 몸이 바깥에 반응하는 사유이다. 몸이 길 위에서 만나는 언어화 되지 않은 사유이다.

햇살과 찬 공기에 얼굴은 팽팽하게 당겨졌고 몸에는 한기가 느껴진다. 걷는 동안 무엇을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휘어진 길에서는 그냥 걷는 것이다. 발걸음이 노랫가락 한 소절이 되는 것이다. 몸의 철학, 휘어진 길 위에서의 무한걸음.< Nils Landgren/ Gotland/ Act >


https://youtu.be/bta1QYS8Bl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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